제 115장. 가장 바라는 것. -02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제 꿈이 무탈하고 평화롭게 오래 사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죽으려면 멀었습니다.”
“형!”
“조운이 형!”
익숙한 목소리에 반호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뒤늦게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인지 아이들과 함께 백휘경, 백휘성 형제가 달려왔다.
예유화도 나란히 달려오고 있었는데 의외로 움직임이 조신했다.
빠르게 이동하면서도 기품을 유지하는 모습에 반호진은 실소를 흘렸다.
“문주님!”
“부총관도 고생 많았어.”
예유화와 함께 황매향도 달려왔는데 반호진은 그녀의 인사도 받아 주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성취도 확인했다.
반가운 것과 성취는 별개였기에 반호진은 냉정하게 아이들을 살펴봤다.
“문주님!”
“괜찮으세요?”
“다들 열심히 수련했네?”
떼로 몰려와 순식간에 포위하는 아이들을 보며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자신이 떠나 있는 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단순히 공력이 늘어나고 키가 자란 걸 넘어 몸 곳곳에 잡힌 물집과 굳은살이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수련했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웃으며 아이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했다.
“유 호법이 잘 가르쳐 주었어요!”
“호오. 압존법도 쓸 줄 아네?”
“예전의 저희들이 아니예요!”
재기발랄한 아이들의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새삼 아이들이 많이 자랐다는 게 느껴져서였다.
“그럼 훈련량을 좀 더 늘려도 되겠네. 예전의 너희들이 아니라고 하니.”
“헉!”
곽춘을 위시로 아이들이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말만 들어도 두려움이 엄습해 와서였다.
“왜? 예전의 너희들이 아니라며?”
“제,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제대로 말했어. 그러니까 달라진 점들을 내게 직접 보여 주었으면 해.”
“히끅!”
진심이 담긴 반호진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딸꾹질을 했다.
그 정도로 공포에 휩싸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도 반호진은 뱉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자, 들어가자.”
퍼렇게 질린 아이들을 데리고서 반호진은 안으로 들어갔다.
악동같이 웃으면서 말이다.
또르륵.
“늦었지만 승리한 거 축하해, 오빠.”
“고마워.”
“그리고 우리 대신 복수해 줘서 고마워.”
“하오문을 대신해서 싸운 건 아닌데.”
난희주가 따라 준 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오문을 위해서 싸운 건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그 부분을 명확히 했다.
“결과적으로는 복수해 준 거나 마찬가지니까. 본문 때문에 천사맹과 엮이기도 했고. 우리로서는 오빠에게 고마워할 수밖에 없지.”
“보통은 은근슬쩍 넘어갈 텐데 말이지.”
“나도 그렇고 사부님도 몰염치한 성격이 아니라서. 고마운 건 당연히 고맙다고 말해야지.”
“나 역시 하오문과 너에게 받은 도움들이 있으니 서로 주고받은 걸로 하자고.”
“그럼 계산이 안 맞는데? 혹시 원하는 거 있어?”
난희주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말만 하면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는 표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아무리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도 반호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빚으로 지워 둘게.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은근히 빚 지워 두는 걸 좋아한단 말이지.”
“당장은 필요한 게 없어서.”
“하긴. 오빠 같은 사람에게는 필요한 게 거의 없을 수밖에 없지. 지금의 오빠 위상을 생각하면. 백도무림의 영웅이잖아.”
“딱히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말이지.”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남들이라면 어떻게든 갖고 싶어 하는 칭호이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진심으로 귀찮다는 기색이었다.
“특이하다니까. 남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고 싶어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가져갔으면 좋겠다.”
“그럴 수가 없지. 사람들은 멍청하지 않아. 몇몇 분들은 세상 사람들을 개돼지라 생각하지만 그건 크나큰 오산이지. 사람들은 결코 무식하지 않아.”
“맞아. 근데 작은 녀석이 의젓하네?”
반호진의 시선이 난희주의 옆에 호위하듯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강아지에게로 향했다.
어미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은 모양인지 흰털은 얼굴에만 집중되었고 몸은 까만색이 도는 황색 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강아지답지 않게 오두방정을 떨지 않고 얌전히 앉아서 반호진을 주시했다.
“신기하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엄청 점잖아. 근데 또 놀아 줄 때는 되게 활발해. 애교도 많고. 무릎에도 자주 올라오고.”
“되게 예뻐하네?”
“예뻐할 수밖에 없지. 이렇게 귀엽고 충직한데. 설이도 부럽다고 난리야. 백동(白冬)이가 새끼 낳으면 자기한테도 달라고 매일 졸라.”
“백동이?”
“응. 내가 지어 준 이름이야. 어때? 괜찮지?”
“흐음.”
반호진은 말을 아꼈다.
썩 잘 지은 이름 같지는 않아서였다.
하지만 난희주가 마음에 들어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별로인 모양이네?”
“내 의견이 중요한가? 주인인 네 마음이 중요하지.”
“그렇긴 하지.”
“근데 확실히 다른 녀석들하고는 다르네. 일동이 새끼지?”
“응.”
“일동이는 옆에 붙어 있지를 않는데.”
반호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애교도 부리고 똘똘하기도 하지만 백동이처럼 곁을 계속 지키지는 않았다.
성견이 되었어도 매일 바깥에서 뛰어놀다가 잘 때가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왔기에 반호진은 신기하다는 눈으로 백동이를 바라봤다.
“삼형제는 할 일이 많잖아. 목장도 둘러봐야 하고 장원 전체도 확인해야 하고.”
“영역을 지킨다기보다는 그냥 놀러 다니는 것처럼 보이는데.”
“오빠는 모르지? 매일 도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순서도 매번 똑같아. 이건 내가 신기해서 설이랑 직접 확인해 봤어. 날씨와 상황에 따라서 약간의 변동이 있기는 한데 거의 같아.”
반호진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뺀질나게 돌아다니는 것만 알았지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였다.
“진짜?”
“응. 애들 진짜 영특해. 그래서 우리 백동이도 똑똑한가 봐. 지금처럼 자리를 지키며 기다릴 때와 편하게 애교를 부릴 때를 기가 막히게 구분하거든. 나랑 설이한테 대하는 태도랑 비천대원들에게 대하는 게 완전히 달라.”
“어쨌든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네.”
“완전 행복해. 이게 자식을 키우는 건가 싶기도 하고. 눈빛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느낌이랄까. 그치, 백동아?”
난희주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거리던 백동이가 사람처럼 웃듯이 입을 쩍 벌리며 혀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난희주가 비명을 지르며 백동이를 안아 들었다.
“살살해. 그러다가 죽겠다.”
“괜찮아. 우리 백동이는 이제 적응했거든. 그치, 백동아?”
헥헥헥!
반호진의 우려와 달리 격한 애정공세에도 백동이는 오히려 기분 좋다는 듯이 난희주의 볼을 핥았다.
그러자 난희주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뭐, 서로 좋다면야 그걸로 됐지.”
“오빠는 애정표현이 너무 없는 것 같아. 삼형제가 애교를 부리는 거에 비해.”
“내 성격이 원래 이래서 어쩔 수 없어. 나 말고 애정표현 해 주는 사람들도 많고.”
“그래도 주인은 오빠잖아. 애들도 다 알고 있고. 잠은 오빠 방에서만 자잖아. 가끔은 원하는 만큼 만져 주고 안아도 줘. 애들이 좋아할 거야.”
“참고할게.”
자신이 무뚝뚝하다는 건 반호진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난지라 애정을 표현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볼 생각이었다.
“의외네. 단칼에 못 한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노력을 안 하는 거지.”
“맞아. 노력하면 웬만한 건 다 되니까. 절대 안 되는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참, 나 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 이제는 본문으로 돌아가려고. 전쟁이 끝났으니 나도 제자리로 돌아가야지.”
난희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두 눈에는 아쉬움이 살짝 담겨 있었다.
“적당한 시기이기는 하지.”
“오빠에게도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내가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게 없으니까. 이미 말이 많이 나오기도 했고.”
“그런 건 신경 안 쓰는데.”
“알지. 내가 오빠 성격을 모를까. 근데 내가 오빠한테 피해 주기 싫어서. 이제 와서 이런 말 하는 게 웃기긴 한데 여기서 더 피해 주고 싶지가 않아.”
“네가 원한다면야.”
반호진은 난희주의 뜻을 존중하겠다는 듯이 대답했다.
냉정히 말해 그녀가 무상문에 더 머물 이유가 없기도 했고.
“안 붙잡네?”
“붙잡을 이유가 없잖아? 네 입장도 있고.”
“흐음. 역시 모른 척하고 있었단 말이지.”
“나도 너에게 할 말이 하나 있어.”
“뭔데?”
난희주가 눈을 반짝였다.
평소 반호진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딱히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중용의 도를 따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데 그런 반호진이 할 말이 있다고 콕 짚어 말하자 난희주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하는 말인데, 욕심 부리지 말라고.”
“……!”
난희주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핵심 단어가 빠져 있었음에도 그녀는 반호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들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과한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야. 이미 역사에 답이 나와 있기도 하고.”
“솔직히 말하면 욕심이 나는 건 사실이야. 오빠도 알겠지만 본문은 힘에 대한 갈망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금단의 사공에 손을 댈 정도는 아니야. 과거에는 그럴 계획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부님과 내 대에서는 그럴 일 없어. 이미 사사혈천교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직접 보기도 했고.”
“다행이네.”
“나는 물론이고 사부님도 진심으로 오빠랑 적이 될 마음은 없어.”
난희주가 정색하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녀는 진심이었다.
또한 무림공적의 대가가 흡정기공이라면 너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것도 다행이네. 나도 너와 하오문주님과 적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오빠는 잘만 검을 휘두를 것 같은데. 아니지. 굳이 휘두를 필요도 없지. 이기어검만 펼쳐도 본문은 끝장날걸.”
“싸움이라는 게 꼭 칼로만 치고받고 하는 게 아니니까. 내가 잘하는 건 그런 거지만 하오문의 힘은 다르니까. 나라고 부담이 안 되는 건 아냐.”
“그렇게 말해 주니 기분이 좋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신이 본문을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난희주의 입매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빈말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서였다.
“검신이라.”
“참, 오빠 그 소식 들었어? 개왕께서 천하십대고수에서 물러나신다는 말. 그래서 오빠를 개방주님 자리에 넣을 거라고 하던데.”
“그건 누가 결정하는데?”
“세인들이? 혹은 당대의 천하십대고수들? 솔직히 많이 늦었지. 나이가 뭐가 대수라고.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인데. 사실 지금까지 밀린 게 말이 안 되잖아?”
난희주가 작게 씩씩거렸다.
실력순으로 천하십대고수를 정한다면서 정작 나이가 어리다는 핑계로 반호진을 차별한 게 백도무림의 명숙들이었다.
심지어 반호진의 실력은 말석도 아니고 최상위권이었는데 말이다.
자기들 마음대로 기준을 바꿔 버리는 모습에 난희주는 겉으로 표현은 안 했지만 불만이 많았다.
“왜 그렇게 흥분해?”
“짜증 나서 그렇지. 답답하기도 하고. 이럴 때 보면 진짜 고지식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오히려 하루아침에 바뀌는 게 더 이상하지.”
“오빠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네?”
“천하십대고수에 속하고 안 속하고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무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자기 실력이지. 남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 중요치 않아. 떠받들어 준다고 해서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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