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4장. 검신무쌍(劍神無雙). -03
반호진과 비교해 부족할 뿐이지 백귀전주는 천사맹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사도육주의 일인이었다.
또한 외공을 극한까지 단련한 고수이며 무인치고는 특이하게 철갑에 투구까지 착용해 완전무장 했다.
하지만 기형검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가 자랑하는 검과 철갑은 기형검에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어……라?”
천사맹을 대표하는 고수답게 백귀전주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반호진이 기형검을 휘두르는 순간 그 역시 검을 휘둘렀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전심전력이 담긴 그의 검과 검강은 무 썰리듯이 너무나 쉽게 갈라졌다.
푸하핫!
그뿐만 아니라 검과 함께 백귀전주의 육신 역시 사선으로 동강 났다.
백귀전주의 검은 물론이고 철갑과 한꺼번에 베어 버린 것이었다.
분명 자신은 꼼짝도 하지 않는데 세상이 움직이는 듯한 광경에 백귀전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게 그가 본 마지막 장면이었다.
“백귀전주!”
“히이익!”
몇 차례의 공방도 아니고 단 일검에 백귀전주를 찢어 버리는 반호진의 무위에 구룡문주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반대로 환요궁주는 기함을 토하며 몸을 돌렸다.
이번 일검으로 다시 한번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였다.
더불어 반호진의 의도 역시도.
“환요궁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내달리는 그녀의 모습에 무영각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분노가 가득 담긴 무영각주의 외침에도 환요궁주는 도망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눈치 빠른 그녀답게 반호진에게 붙어 봤자 필패라는 걸 안 것이다.
더욱이 지금 이 자리에는 반호진만 있는 게 아니라 천하십대고수 중 무려 네 명이 있었기에 환요궁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질주했다.
“어딜 가려고.”
쿠웅!
하지만 안타깝게도 환요궁주는 멀리 가지 못했다.
가장 빨리 판단을 내리고 움직였음에도 남궁호의 제왕검형이 흩뿌리는 권역에서 벗어나지 못해 붙잡히고 말았다.
“어리석은! 차라리 힘을 합쳐 공격했으면……!”
“그런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환요궁주에 이어 무영각주가 당우혁과 황보태경의 협공에 무너지는 걸 보며 구룡문주가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비록 전세가 기울었다고 하나 비굴하게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각오로 끝까지 싸울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길이 보일지도 몰랐다.
스극.
신검합일의 기세로 반호진에게 달려들던 구룡문주의 동공이 더 이상 커지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찰나의 번뜩임이 몸을 스쳐 지나간 걸 느낌과 동시에 모든 게 끝났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고통은 없었으나 구룡문주는 알 수 있었다.
기형검의 검격이 자신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는 사실을 말이다.
쩌저적!
애병이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졌고 뒤이어 그의 육신 역시 정확히 좌우로 양분되었다.
백귀전주와 마찬가지로 구룡문주 역시 반호진의 일검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헛된 꿈이었는가.”
양쪽으로 나뉜 채로 허물어지던 구룡문주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고통은 없었지만 대신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꺄아아악!”
구룡문주에 이어 환요궁주도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절명했다.
남궁호의 검 아래 고혼이 되었다.
무영각주 역시 천하십대고수 두 명의 협공에 별다른 반항도 못 하고 목과 사지가 잘린 채로 죽었다.
“도, 도망쳐!”
두두두두!
순식간에 수장들이 죽자 사도육주의 세력들은 물론이고 간신히 응집해 있던 천사맹의 무인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각자 제 살길을 찾아 도주하는 것이었다.
“쫓아라! 한 놈도 남김없이 죽여!”
“모두 진군!”
그 모습에 전투에는 나서지 않고 한발 물러나 지켜보고 있던 팽만철이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못해도 이런 건 하겠다는 듯이 팽만철이 포효하며 하북팽가의 무인들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건 제갈문곡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기세를 살려 천사맹을 일망타진하겠다는 듯이 제갈문곡은 빠르게 지시하며 포위망을 구축했다.
스윽.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뒤는 제갈문곡에게 맡겨도 될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사사혈천교의 잔당들도 거의 다 정리가 된 듯싶었기에 반호진은 마도련의 진영으로 훨훨 날아갔다.
쿠웅!
마지막으로 붙어 있던 오른팔을 잘라 낸 마도련주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사지가 모두 잘렸음에도 사사혈천교주는 아직 죽지 않아서였다.
심지어 여전히 흘러나오는 기운은 압도적이었다.
출혈이 상당한데도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았다.
“크르르르!”
오히려 살기와 광기가 뒤섞인 눈빛을 번뜩이며 마도련주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나 다른 이들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사지가 끊어지고 다섯 개의 병장기가 몸을 관통해서 땅에 고정시킨 상태였기에 사사혈천교주는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상황은 마도련주를 비롯해서 마도십문의 수장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욱! 훅!”
“으음!”
사사혈천교주를 제압했지만 마도련주와 수장들의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다들 몰골이 처참했다.
이기긴 했으나 상처뿐인 승리였다.
저벅저벅.
“……빌어먹을.”
이마에 흥건한 피와 땀을 소매로 닦으며 마도련주가 이를 갈았다.
다가오는 기척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몸의 대화는 잘 나눈 것 같네.”
“……!”
뒷짐을 지고서 걸어오는 반호진의 모습에 마도련주가 피로 붉게 물든 이를 드러내며 노려봤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수십 번도 더 죽였을 눈빛이었으나 반호진의 표정은 태연했다.
그리고 반호진은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사사혈천교를 정리한 구파일방의 수장들과 정천맹의 전력 절반이 반호진을 호위하듯 뒤따랐다.
꿀꺽!
서서히 다가오는 정천맹을 보며 마도련의 마인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몇몇은 아예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암만 봐도 승산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하하하. 하하하하!”
느리지만 언제라도 포위할 수 있도록 진영을 구축해서 다가오는 정천맹의 모습에 마도련주가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단 하루 만에 상황이 극변한 게 너무나 어이없어서였다.
그것도 순수하게 싸워서 이렇게 된 게 아니라 사사혈천교주의 배신으로 모든 게 어그러졌기에 마도련주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차라리 전투에서 패배했다면 이렇게 울화가 터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크르르르!”
그러나 정작 상황을 이렇게 만든 원흉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만 있었다.
죽지도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말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봉문하겠다는 말이라면 별로 듣고 싶지 않은데.”
“본좌를 환요궁주 따위와 비교하지 마라.”
“아닌 모양이군.”
진심으로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마도련주의 모습에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패도(覇道)를 숭상하는 마도라서 그런지 봉문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 듯했다.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묻는 것이다. 대답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마도련주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반호진이 체력과 내공을 회복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건 아닐까 의심할까 싶어 마도련주는 그 부분에 대해서 먼저 선을 그었다.
하늘에 맹세코 절대 그런 마음이 없어서였다.
“뭐지?”
“사사혈천교주가 배신할 걸 알고 있었나?”
“어느 정도는? 근데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 혈맹이니 동맹이니 그런 게 영원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반대로 천사맹이 약해졌으면 마도련이 잡아먹었을 거 아냐?”
“…….”
마도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러니까 억울한 표정들 하지 마. 가증스러우니까.”
“닥쳐라!”
가증스럽다는 말에 마인들이 살기를 폭발시켰다.
하지만 거대한 살기에도 반호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만 끝을 보자고.”
“차합!”
반호진의 말대로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휴전이나 항복은 마도련주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치욕스럽게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기에 마도련주는 남아 있는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리고서는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그런 그를 시작으로 살아남은 마도십문의 수장들 역시 땅을 박찼다.
“아미타불.”
“원시천존.”
그러나 마도련주는 반호진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가 신형을 움직이기 무섭게 담현과 운상이 앞을 가로막아서였다.
상황은 마도십문의 문주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협공하자 제아무리 마도십문이라도 별수 없었다.
“크아악!”
“끄륵!”
마도련의 핵심인 마도십문이 흔들리자 다른 마도문파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사사혈천교주로 피해가 막심한 상태였기에 마도련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정천맹도 피해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마도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저벅저벅.
대신 나서 준 담현과 운상 덕분에 반호진은 검을 뽑지 않고 편안하게 전장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잠시 후 반호진이 멈춰 섰다.
“크르르르!”
양쪽 어깨와 허벅지에 검과 도, 창이 박혀 꼬치처럼 꿰인 채로 꿈틀거리는 사사혈천교주의 모습을 반호진은 무심히 내려다봤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으나 반호진의 눈빛에는 조금의 동정심도, 연민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사사혈천교주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게 약과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단전을 꿰뚫은 검으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내공이 빠져나가고 있었음에도 사사혈천교주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상당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상황이 너에게는 축복이겠네. 적어도 고통은 느끼지 못할 테니까. 죽음도 인지하지 못할 테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모습에서 이성의 잔재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맹목적인 살기와 광기만 드러냈다.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인데도 이를 드러내며 울부짖는 사사혈천교주의 모습에 반호진은 아주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혈천교주에게 상처받고 희생된 이들이 받은 고통에 비하면 너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 같아서였다.
“이제는 모두 편안히 눈 감으시길. 그리고 극락왕생하시길.”
푹.
반호진의 오른손에서 솟구친 기형검이 사사혈천교주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심장이 갈라졌음에도 사사혈천교주는 죽지 않았다.
여전히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모습에 반호진은 기형검을 재차 휘둘렀다.
스극. 슥.
놀라운 일이기는 하나 당황할 정도는 아니기에 반호진은 무심히 목과 허리를 베었다.
아예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조각조각 찢어 버렸다.
엄청난 출혈 속에서도 지금껏 살아 있었기에 반호진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사사혈천교주를 삼매진화로 불태워 버렸다.
사사혈천교주라는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려는 것이었다.
푸스스스…….
이윽고 사사혈천교주의 육신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흔적 자체가 사라진 것이었다.
“이겼다!”
“우리가 승리했다!”
“으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거대한 함성에 평야를 쩌렁쩌렁 울렸다.
천사맹에 이어 마도련이 와해되자 살아남은 모두가 승리를 만끽하는 것이었다.
“어흐흐흑!”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복수는 했다.”
승리의 함성 곳곳에는 눈물도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번 전쟁으로 죽은 이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리는 것이었다.
“형님!”
“호진아!”
“괜찮으십니까!”
반호진의 곁으로 일행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다들 격전을 치렀다는 걸 보여 주듯 의복이 멀쩡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사마의성조차 무복에 핏자국이 가득했다.
“나야 당연히 멀쩡하지. 일이 쉽게 풀리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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