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4장. 검신무쌍(劍神無雙). -01
특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사사혈천교주는 놀란 표정을 애써 수습하며 팔을 휘저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거력이 담긴 일장이 반호진을 집어삼킬 기세로 뻗어 나갔다.
몸과 마음에 어제의 공포가 아직 남아 있었으나 사사혈천교주는 애써 그 기억을 떨쳐 냈다.
적어도 지금이라면 다른 이들처럼 반호진을 압도하지는 못하더라도 어제처럼 무기력하게 밀리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아직 한 마리가 더 남아 있기도 하고.’
임기응변으로 흡정신공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명천문주는 여전히 그의 권역 안에 있었다.
그러니 밀린다 싶으면 재빨리 다시 잡아먹으면 되었다.
반대로 그의 예상보다 이번에 얻은 힘이 커서 반호진이 밀린다면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이번에야말로 반호진을 잡아먹을 수 있을 테니까.
뚝.
어느 쪽이든 다 대비가 되어 있었기에 사사혈천교주는 자신만만하게 반호진의 심장을 노렸다.
피해도 머리나 단전으로 방향을 틀기 용이한 한 수였다.
그러나 사사혈천교주의 얕은수는 시작도 하기 전에 원천봉쇄당했다.
반호진이 피하지도, 튕겨 내지도 않아서였다.
“이익!”
태산조차 단숨에 짓뭉개 버릴 위력을 지닌 일장을 검극으로 가볍게 받아 내는 모습에 사사혈천교주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거렸다.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번 공격으로 반호진을 날려 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충격은 줄 거라 예상했는데 조금의 미동도 없자 사사혈천교주는 자존심이 상했다.
더불어 겨우겨우 가슴 깊숙한 곳에 눌러 놓았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느꼈다.
‘모자라면 더 끌어오면 되는 법!’
사사혈천교주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초식의 깊이나 정교함으로는 반호진의 상대가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사사혈천교주 본인이 잘 알았다.
또한 그 방식은 그가 선호하지도 않았고.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해야 했기에 사사혈천교주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슈우우욱!
일장이 반호진의 검에 완벽히 막힌 것과 동시에 사사혈천교주의 수족과도 같은 강기 하나가 발바닥을 통해 지면을 관통한 후 멍 때리고 있는 명천문주의 용천혈을 꿰뚫었다.
땅속으로 은밀하게 이동해서는 단숨에 낚아챈 것이었다.
“큭!”
거기다 앞서 있었던 실패 때문인지 사사혈천교주는 강기를 하나만 보내지 않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세 개의 강기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보냈고 결과적으로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일차적으로 발바닥을 노리고 이차적으로는 발목을 잘라 내지 못하게 양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기동력을 완벽히 제거한 것이었다.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아주 좋아.”
“응?”
순식간에 목내이로 변하는 명천문주와 달리 점점 젊어지던 사사혈천교주가 순간 당혹성을 흘렸다.
당연히 긴장해야 할 반호진이 너무나 여유롭게 서 있어서였다.
분명 달라진 자신의 기도를 느꼈을 텐데도 태연하기 짝이 없는 반호진의 모습에 사사혈천교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깜빡 잊은 것 같은데 나는 마도련과 같은 편이 아니야. 같은 편이었던 건 오히려 너지. 즉 명천문주의 죽음은 나에게 이득이란 말이지.”
“본좌가 더 강해졌는데도?”
사사혈천교주가 비릿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만히 들으면 반호진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명천문주가 죽은 대신에 그가 강해졌다는 것이었다.
흡정신공이 없었다면 명천문주의 죽음이 무조건 반호진에게 이득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강해지긴 했겠지. 내공만 늘어서 그렇지.”
“크크큭!”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으나 사사혈천교주는 개의치 않았다.
내공을 제외하면 모든 부분에서 반호진에게 밀린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강자를 잡아먹을수록 육체가 젊어지고 있으나 근본적인 체력과 근력은 반호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육체가 젊어진다고 해서 체력과 근력이 느는 건 아니었기에 여전히 사사혈천교주의 가장 큰 무기는 방대한 공력이었다.
우우우웅!
그렇기에 사사혈천교주가 사용할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압도적인 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사사혈천교주는 반호진을 찍어 눌렀다.
아예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겠다는 듯이 사사혈천교주의 몸에서 흘러나온 무지막지한 기운이 사방을 집어삼켰다.
“지금부터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다. 또한 누구도 너를 구하러 올 수 없지. 오는 순간 나에게 잡아먹힐 테니까.”
사사혈천교주가 통보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이미 마도십문의 수장 중 셋을 잡아먹기도 했고.
다만 사사혈천교주의 협박은 반호진에게 통하지 않았다.
“굳이 움직일 필요가 있을까.”
“그 자신감이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사부가 잡아먹히고도 지금처럼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궁금한데.”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 없어. 그 전에 끝날 거거든.”
사사혈천교주의 미간이 좁혀졌다.
모든 게 반호진에게 불리한 상황임에도 저렇게 여유를 부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물론 반호진의 주변을 아직 완벽하게 장악한 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움직이는 순간 그 역시 진기를 조종해 압박할 생각이니까.
그걸 반호진이 모를 리 없을 텐데도 한껏 여유를 부리는 게 사사혈천교주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변에 도와줄 아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천하의 소림검신이 시간을 끌 생각인가. 이건 좀 의외인데.”
“그럴 리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이죽거리는 사사혈천교주를 보며 반호진이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허공에 열한 자루의 검이 나타났다.
바로 이기어검이었다.
한데 그걸 본 사사혈천교주가 실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또 이기어검인가. 이제는 안 통한다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지금까지는 그랬지.”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거다. 다른 수법도 마찬가지고.”
“글쎄.”
반호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 순간 열한 자루의 검에 찬란한 금광이 솟구쳤다.
츠츠츠츠!
순식간에 검을 휘감은 금광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
검을 중심으로 수십, 수백 줄기의 검강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며 사사혈천교주가 지배하는 공간을 찢어 버렸다.
“고작 생각해 낸 수가 이것이더냐!”
무시무시한 기세로 공간을 갈가리 찢어 버리는 한 수에 사사혈천교주가 가소롭다는 듯이 포효했다.
분명 반호진의 일격은 강력했다.
그조차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못 막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내가 왜 지켜봤을까.”
“그야 지켜볼 수밖에 없었으……!”
웅웅웅!
자신의 공간을 가르는 금광을 순수하게 힘으로 밀어내던 사사혈천교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얘기만 숱하게 들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인 기형검(氣形劍)에 놀란 것이었다.
말은 많았으나 누구도 믿지 않았던 기형검이 반호진의 왼손에 생성되자 사사혈천교주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찬란하게 빛나는 기형검에서 가공할 존재감이 뿜어져 나와서였다.
덜덜덜!
단순히 기형검을 발현시킨 것뿐인데도 사사혈천교주는 몸이 떨렸다.
두려운 게 아니라 압도적인 존재감에 심신(心身)이 억눌린 것이었다.
더불어 자신의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느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았다는 걸 이번 한 수로 절절하게 느낀 것이었다.
‘이, 이대로는……!’
그저 기형검을 발현시킨 것뿐이지만 사사혈천교주는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 저 기형검을 받아 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힘을 쏟아부어도 일검을 막지 못할 터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사사혈천교주는 땅을 박차려고 했다.
“또 도망가게?”
“큭!”
하지만 좀 전과 달리 사사혈천교주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미줄처럼 뿌려진 반호진의 검강이 그를 억압해서였다.
힘으로 그물망처럼 펼쳐진 황금빛 검강을 찢어 내려고 했으나 놀랍게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힘을 쏟아부어도 끊어지기는커녕 밀어지지도 않는 반호진의 검강에 사사혈천교주의 안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을 아나?”
“……나를 이용해서 마도련의 힘을 약화시켰다고?”
“맞아. 거기다 천사맹 역시 분열되었지.”
“너를 비롯해서 모두를 죽이면 끝난다. 중원무림이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이지.”
“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 근데 모두가 꿈을 이루는 건 아니야.”
반호진이 땅을 박찼다.
움직임을 봉쇄했으니 이제 끝을 낼 생각이었다.
“벌써부터 다 이긴 것처럼 나불거리지 마라!”
점점 가까워질수록 기형검에서 흘러나오는 압박감 역시 커져 갔지만 그럼에도 사사혈천교주는 기죽지 않았다.
기형검은 분명 대단하지만 그렇다고 승부가 난 건 아니었다.
무공의 고하만으로 승패가 결정되지 않기에 사사혈천교주는 이를 악물고서 반호진을 향해 파상공세를 펼쳤다.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모든 걸 쏟아부었다.
콰콰콰쾅!
사사혈천교주의 전신에서 솟구친 수십 개의 강기가 수백 개로 나뉘어졌다.
공간 자체를 잠식하며 그대로 반호진을 덮쳤다.
반호진과 공간을 동시에 지워 버리겠다는 기세로 전심전력을 다했다.
조금 전의 여유는 사라지고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말이다.
뻐어어엉!
비록 공력은 사사혈천교주에 비해 부족할지 모르나 출력은 달랐다.
한번에 방출할 수 있는 힘은 반호진도 꿀리지 않았기에 단숨에 사사혈천교주의 공격을 날려 버렸다.
쇄도하는 수십 개의 강기들을 힘으로 분쇄해 버렸던 것이다.
그런 다음 사사혈천교주와 거리를 좁혔다.
으득!
단 일격으로 맹공을 파쇄하고는 순식간에 간격을 좁히는 반호진의 모습에 사사혈천교주가 이를 악물었다.
혼신의 힘을 다했음에도 반호진의 검격 한 방에 연기처럼 흩어지는 광경을 보자 허탈하기 그지없었으나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가만히 있다가는 그대로 목이 잘릴 게 분명하기에 사사혈천교주는 다시 한번 진기를 끌어올렸다.
웅웅웅웅!
지금까지 송곳처럼 뾰족한 강기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이번 강기는 거대한 망치를 닮았다.
똑같은 방식으로는 반호진을 쓰러뜨릴 수 없다 생각하고 형태를 바꾼 것이었다.
“죽엇!”
반호진을 날려 버릴 기세로 거대한 강기가 벼락같이 쇄도했다.
장정 한 명 정도는 가볍게 짓뭉개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크기였다.
쩌어억!
그러나 사사혈천교주의 간절한 마음이 담긴 일격은 기형검에 닿기 무섭게 모래처럼 흩어졌다.
어마어마한 진기를 쏟아부었음에도 기형검을 감당해 내지 못한 것이었다.
스윽.
애초부터 이럴 거라 반호진은 알고 있었기에 두 눈을 부릅뜬 사사혈천교주를 보며 기형검을 내밀었다.
거대한 망치 형태의 강기를 파훼하고는 그대로 기형검을 내지른 것이다.
우우우웅!
그 모습에 사사혈천교주가 다급히 호신강기를 일으켰다.
우선은 시간을 벌 작정이었다.
기형검을 감당할 수는 없지만 싸움이라는 게 꼭 부딪쳐야만 하는 건 아니었기에 사사혈천교주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며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반호진은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쩌저적!
기형검으로는 여러 겹의 호신강기를 단숨에 꿰뚫어 버리고 소천검으로는 쇄도하는 강기들을 갈라 버렸다.
반격할 여지를 아예 없애 버린 것이었다.
푹!
이윽고 호신강기를 모두 파괴한 기형검이 사사혈천교주의 배를 찔렀다.
정확히 하단전의 바로 윗부분이었다.
“이대로, 이대로 끝낼 것 같으냐!”
쑤아아앙!
잠시 멍하니 배를 관통한 기형검을 내려다보던 사사혈천교주가 울부짖었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무지막지한 기운이 솟구쳤다.
탁한 사기(邪氣)들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역시 선택한 게 폭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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