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장. 인면악심(人面惡心). -03
반호진의 주변에서 우렁차고 믿음직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소림사의 장로들과 일대제자들이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을 펼친 것이었다.
그런데 나한진은 한 개가 아니었다.
최정예로 꾸려진 백팔나한진을 중심으로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이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퍼퍼퍼펑!
달리 소나한진(小羅漢陣)이라 불리는 십팔나한진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사사혈천교를 공격했다.
죽음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사사혈천교도들의 기세가 대단했지만 소림사 역시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야 집단 광기에 기가 질렸지만 지금은 달랐다.
몇 번의 싸움으로 익숙해졌기에 소림사의 무승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전투를 치러 나갔다.
“공격해라!”
“이번에 끝장을 내는 거다!”
거기에 어제 합류한 표사들도 힘을 보탰다.
늦게 가세한 만큼 누구보다 힘차게 달려들었다.
“버러지들 따위가.”
그 모습에 사사혈천교주가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약해 빠진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달려드는 것 같아서였다.
“딴 데를 신경 쓸 겨를이 없을 텐데.”
뻐어어엉!
어제와 달리 반호진은 처음부터 검을 뽑았다.
오늘 결판을 내고 싶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어제 사사혈천교주를 놓쳤기에 반호진은 남모르게 다짐했다.
다시 싸운다면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말이다.
“크아아악!”
“꺼억!”
반호진의 일검에 수십 명의 사사혈천교도들이 양분되었다.
황금빛 검격에 곳곳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던 것이다.
그러나 사사혈천교도들은 공격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광신도가 괜히 광신도가 아니라는 듯이 반호진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모든 걸 쏟아부어!”
“교주님을 지켜야 한다!”
“악마를 처단하라!”
사사혈천교주가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아도 사사혈천교도들은 광인처럼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동귀어진도 불사하겠다는 기세로 온몸을 던져 왔던 것이다.
그 독기와 광기에 몇몇 나한승들조차 질린 표정을 지었으나 반호진은 달랐다.
이미 한 번 겪어 보았기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스윽.
그저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개화의 여지는 둘째 치더라도 적을 봐주는 건 반호진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적은 그저 적일 뿐이었다.
전장에서 잡념은 사치에 불과했기에 반호진은 단 한 가지에만 집중했다.
‘반드시 잡는다.’
많은 이들을 잡아먹었고, 앞으로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잡아먹을 위인이 사사혈천교주였다.
지금은 혼자서 잡을 수 있을 정도지만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당장 반년만 지나도 잡지 못할 수 있었기에 반호진은 분노와 걱정을 잠시 가슴 깊은 곳에 눌러 두고 딱 한 가지만 생각했다.
‘이 자리에서.’
쩌어억! 쩌저저적!
소림사의 나한진이 상당 부분 감당해 주고 있긴 했으나 그럼에도 엄청난 숫자가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천사맹 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이룬 곳답게 어마어마한 인원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중에 반호진의 근처까지 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심히 휘두른 일검에 짓쳐 들던 사사혈천교도들은 물론이고 간부들도 절단되어 허물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대지마저 갈라졌다.
거대한 검흔을 남기며 그대로 사사혈천교주에게 나아갔다.
“교주님을 지켜라!”
“사악한 악마를 막아야 한다!”
찬란하게 빛나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땅을 가르며 뻗어 오는 검기에 사사혈천교도들이 몸을 날렸다.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사사혈천교주를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눈물겨운 희생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반호진은 도리어 눈살을 찌푸렸다.
저 마음조차도 사사혈천교주가 이용하는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휘이익!
검격으로 만든 길을 따라 반호진이 몸을 날렸다.
단숨에 사사혈천교주와의 거리를 좁히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이럴 생각으로 참격을 뿌리기도 했고.
“더 이상은 못 간다!”
“교주님께 가려거든 우리를 뚫고 가라!”
“하아.”
사사혈천교주와의 거리를 십 장 정도 남겨 두었을 때 반호진의 앞으로 열 명의 노인들이 나타났다.
얼굴은 전부 다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새로이 나타난 이 열 명 역시 사사혈천교의 장로들이란 사실을 말이다.
굳이 묻지 않아도 사사혈천교주가 비릿한 미소로 그의 추측에 무게를 실어 주었기에 반호진은 짧은 한숨과 함께 달려드는 열 명의 노인들을 바라봤다.
“죽어라, 마귀야!”
“당장 저승으로 꺼지거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고 있네.”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악마와 마귀라는 단어에 반호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흡혈귀나 다름없는 것들이 자신더러 마귀나 악마라고 하자 어이가 없어서였다.
“교주님께 칼을 댄 걸 죽음으로 속죄……!”
“그럴 생각 없다.”
담현이 상대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 장로들 역시 초절정의 경지 끝에 다다라 있었다.
그러나 경지만 그러할 뿐 실력은 형편없었다.
힘만 센 어린아이처럼 공력을 제어하는 능력이나 초식에 대한 숙련도는 전혀 없었다.
그저 무작정 휘두르기만 할 줄 알았다.
스걱.
그런 이들에게 반호진은 진짜 무인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내공만이 전부가 아님을 몸소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 대가는 목숨이었다.
“어……?”
“이, 이게 어떻게……!”
단순한 횡베기일 뿐인데도 열 명의 장로들은 반응하지 못했다.
목이 베이고서야 따끔한 감각을 느꼈고, 그게 끝이었다.
쿠웅! 쿵!
경지가 높아졌다고 해서 강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절대 고수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반호진은 단 일검으로 증명했다.
“역시 열 명으로는 무리려나. 그럼 스무 명은 어떨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그럼 마흔 명은? 여든 명은?”
너무나 허무하게 장로 열 명이 절명했으나 사사혈천교주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보면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이다.
그 모습에서 반호진은 다시 한번 사사혈천교주의 성정을 느낄 수 있었다.
“해 봐. 모르겠으면.”
“너는 결국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끝내 나에게 잡아먹힐 거다.”
“내 대답은 방금 전과 같아. 할 수 있으면 해 봐.”
으득!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반호진의 모습에 사사혈천교주의 눈가가 잔뜩 일그러졌다.
두려움에 가득 찬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흥분은 해도 이성을 잃지는 않았다.
이성을 놓는 순간 반호진에게 잡아먹히는 건 자신이 되리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죽여라!”
대신 그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장로들과 교도들을 움직였다.
갈아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사사혈천교주는 조금도 안타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숭고한 희생이라고 생각했다.
반호진의 심력과 내공을 조금이라도 소모시켜 그의 승리를 이끌어 낸다면 그 또한 대업에 일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웅웅웅웅!
그런데 대책은 사사혈천교주만 준비한 게 아니었다.
반호진 역시 결국 전투가 이렇게 흘러갈 거라 예상했었다.
때문에 반호진은 장로급들이 아무리 많이 달려들어도 놀라지 않았다.
대신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검과 도, 창 등등의 병기를 모조리 들어 올렸다.
“막아라!”
두둥실 떠올라서 반호진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각종 병기들의 모습에 사사혈천교주가 다급히 소리쳤다.
반호진이 무엇을 하려는지 보자마자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러나 사사혈천교주의 일갈보다 반호진의 의지가 훨씬 더 빨랐다.
퍼퍼퍼펑!
애초에 세밀한 제어보다는 다수를 공격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에 반호진의 공격은 투박했다.
정교한 움직임은 일절 없고 어검술처럼 오직 한쪽 방향으로만 날아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협적이었다.
공격을 한 이가 다른 이도 아니라 반호진이었기에 사사혈천교도들이 강기를 뿌리건 호신강기를 일으키건 상관치 않고 앞을 가로막는 것은 모조리 뚫어 버렸다.
“커헉!”
“켁!”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반호진의 공격은 강력했다.
또한 반호진은 의지를 보였다.
이 자리에서 모든 걸 끝내겠다는 의지를.
파아앗!
단 일격으로 부나방처럼 달려들던 이들의 기세를 꺾은 반호진은 그대로 땅을 박찼다.
다시 사사혈천교주를 노리고서 몸을 날린 것이었다.
“이익!”
그와 동시에 사사혈천교주도 신형을 움직였다.
어제의 전투로 그는 처절하게 느꼈다.
반호진을 상대로 접근전을 벌이는 게 얼마나 무모하고 미련한 짓인지를.
인정하기 싫지만 내공을 제외하면 모든 것에서 자신이 열세였기에 사사혈천교주는 절대 반호진에게 일정 거리를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쌔애애액!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해 다니기만 할 생각은 아니었다.
결국 이기기 위해서는 싸워야 했고 도망만 쳐서는 절대 승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사혈천교주는 반호진과의 거리를 벌리면서 끊임없이 강기를 뿌리고 조종했다.
퍼퍼퍼펑!
웬만한 초절정고수조차 감히 받아 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의 강기였으나 반호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검강에 닿기 무섭게 허망하게 바스러지는 모습에 사사혈천교주는 이를 악물었다.
저럴 거라 예상을 하긴 했으나 그래도 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반호진의 공격에 분쇄되더라도 계속해서 몰아붙여야 했다.
‘조금만 더.’
반호진과의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사혈천교주는 눈을 빛냈다.
장기전으로 가려는 것도 있지만 그에게는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쌔애액!
주변을 살피던 사사혈천교주가 화들짝 놀랐다.
익숙한 파공음에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그런데 놀란 것치고 사사혈천교주의 대응은 기민했다.
소리만 듣고 무엇인지 알아차리고는 강기를 움직여 쇄도하는 병기들을 튕겨 냈다.
“쳇!”
그러나 튕겨 내기 무섭게 병기들이 허공을 선회하며 다시 내리꽂혔다.
개수에 치중했던 좀 전과 달리 이번에는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는 정도로만 조종했기에 사사혈천교주도 더 이상 신경을 분산할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기어검에 목이 날아갈 판이었기에 그도 집중해야만 했다.
‘노리는 게 있는 것 같은데.’
한편 사사혈천교주를 추격하는 반호진은 미간을 좁혔다.
누가 봐도 무언가 노리는 게 있어 보여서였다.
사실 처음에 도망쳤을 때 반호진은 내심 크게 놀랐다.
아무리 어제의 격전에서 밀렸다고 하나 이렇게 쉽게 정면대결을 포기할 줄은 몰라서였다.
‘장기전이 끝은 아닐 테고.’
도주를 선택했다는 건 사사혈천교주가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스스로 인정했다는 말과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포기한 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설욕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을 리 없었다.
즉 무언가 준비하고 있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내공이 아무리 많아도 정신력과 체력을 대체해 줄 수는 없어.’
초식의 숙련도나 육체의 단련도가 경지에 어울리지 않게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하나 사사혈천교주는 엄연히 초월경의 벽을 넘은 무인이었다.
검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던 장로들과는 충분히 격이 다른 존재였기에 반호진은 우선 움직임부터 봉쇄하기로 결정했다.
거리를 벌려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대로 못하게 만들면 준비한 게 무용지물이 될 것이었다.
부우우웅!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열한 자루의 검이 사사혈천교주를 포위했다.
공격하기보다는 방해하는 것에 집중한 것이었다.
한데 열한 자루의 검에서 섬뜩한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음에도 사사혈천교주는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사혈천교주의 강기 중 하나가 근처에 있던 염라문주의 단전으로 파고들었다.
“어어?”
“크흐흐흐! 일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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