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344화 (344/468)

제 113장. 인면악심(人面惡心). -02

마혈은 점혈했어도 아혈은 짚지 않았기에 포박된 이들이 피를 토하는 듯이 소리쳤다.

심지어 몇몇은 입술을 깨물었는지 양쪽 입꼬리에서 시뻘건 피가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정도로 결박당한 이들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신의라. 배신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비열한 자식!”

“유혹할 때는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기더니!”

흥분한 그들과 달리 평온한 얼굴로 차를 들이켜는 사사혈천교주의 모습에 더욱 큰 고성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런 살벌한 반응에도 사사혈천교주는 태연했다.

“꼬드겼다라.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천사맹주씩이나 되는 이가 약속을 이렇게 가볍게 여기다니! 사내대장부가 어찌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느냐!”

“약속을 하기는 했지. 근데 상황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지는 게 인생 아니더냐. 그리고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다들 예상은 했을 텐데?”

까드드득!

미안해하기는커녕 도리어 뭐가 문제냐고 따지는 어투에 울분을 토했던 이들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변명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가까이에서 사사혈천교주를 직접 봐 왔으니까.

그러나 나름 전우인데도 이렇게나 아무렇지도 않아 할 줄은 몰랐기에 다들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사사혈천교주를 바라봤다.

“……어제 전투로 천사맹의 피해가 크지 않소. 우리를 이렇게 결박시켜 놓는 건 전력 낭비라고 생각되오만. 거기다 정천맹에는 지원군이 합류하기도 했고.”

“지원군은 우리에게도 왔지.”

“숫자는 수적들이 좀 더 많을지 몰라도 질적으로는 표사들에게 상대가 안 될 것이오.”

그나마 가장 이성을 유지하고 있던 중년인 한 명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협상이 결렬되었으니 이제라도 점혈을 풀고 함께 같은 적과 싸우자는 뜻이었다.

이번 일로 서로에 대한 신뢰는 깨졌으나 공공의 적을 가진 건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힘을 합치자고 말한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자네의 말이 맞겠지. 그런데 과연 자네들이 진짜로 우리에게 협력할 수 있을까? 앙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지. 또한 선택지가 우리와 힘을 합쳐 정천맹과 싸워야 하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흠칫!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입을 열었던 중년인이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속내를 들여다본 것처럼 사사혈천교주가 말해서였다.

그건 몇몇 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안색이 파리해졌다.

“아마 대부분은 점혈을 해혈해 주는 즉시 몸을 내빼겠지. 너희들에게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신의도, 명예도 아닌 스스로의 안위일 테니까.”

“약속할 수 있소이다!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물론입니다! 우리는 사문을 배신한 순간부터 맹주님께 충성했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분노만 토해 내던 이들이 표정을 싹 바꿨다.

지금 처세를 잘못하는 순간 죽음을 피하기 힘들다는 걸 다들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보다 사사혈천교주의 행동이 훨씬 더 빨랐다.

푸푸푸푸푸푹!

“어?”

“이, 이게 무슨……!”

사사혈천교주의 발밑에서 뻗어 나온 새빨간 강기가 결박된 채로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의 단전을 꿰뚫었다.

뱀의 혓바닥처럼 요사스럽게 흔들리며 단숨에 하복부를 관통했던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피는 단 한 방울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점혈당한 이들의 선천진기와 후천진기가 사사혈천교주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끄아아악!”

“아, 악마!”

“어떻게 우리를……!”

“영광으로 알도록. 나와 함께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니까.”

꾸물거리는 강기를 통해 자신의 정기가 빨려 나가는 걸 보며 모두가 악을 질렀다.

하나 그런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잠시 후 수십 명이 동시에 목내이가 되어 바닥에 허물어졌다.

푸스스스…….

얼마나 완벽하게 빨린 것인지 몸이 땅바닥에 닿기 무섭게 먼지로 화했다.

시체조차 온전히 남기지 못한 채 죽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사혈천교주는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이들에게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에게는 벌레나 마찬가지였다.

쓸모없는 벌레 몇십 마리 죽인 것 가지고 유난을 떨 필요는 없었기에 사사혈천교주는 멀리 보이는 먼지구름을 응시했다.

저곳 어딘가 있을 반호진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반드시 죽여 주마. 반드시.”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표정으로 사사혈천교주가 중얼거렸다.

여유도, 차분함도 없는 살기만 가득한 눈빛과 얼굴이었다.

더불어 굴욕감도 은은히 서려 있었다.

반호진에게 당한 치욕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꾸우욱!

사사혈천교주가 되면서 그는 공포나 두려움 같은 감정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없어서였다.

또한 죽이지 못할 존재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신감이 반호진을 만나고서 산산조각 났다.

흡정신공을 익힌 후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을 곱씹으며 사사혈천교주는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대업을 위해서라도 네놈은 반드시 오늘 죽어야 한다.”

사사혈천교주의 두 눈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지금도 끔찍할 정도로 위험한 존재이지만 문제는 반호진의 나이가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처치하지 못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기에 반드시 이번에 죽여야 했다.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에는 그가 죽을 것이기에 사사혈천교주는 결연한 얼굴로 전장을 향해 나아갔다.

스스슥!

그런 그의 뒤로 사사혈천교도들이 소리 없이 따라붙었다.

여전히 눈이 돌아간 모습으로 말이다.

반호진의 강렬한 안광이 전방을 훑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었다.

또한 위치 역시 지금까지와 달랐다.

늘 조금 후방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소림사 진영과 함께 이동 중이었다.

“애들은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지고 지킬 테니까.”

“에이. 제가 방이 형의 보호를 받을 실력은 아닌데요. 함께 싸우면 모를까.”

“이건 동의. 우리가 애도 아니고.”

반호진이 최대한 전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는 듯이 선우방이 말했다.

동갑이자 가장 형으로서 반호진을 대신해서 챙기겠다는 뜻이었다.

또한 신경이 분산되지 않게 해 주려는 배려였다.

한데 그 말에 서조운과 모용척이 거세게 반박했다.

“애는 아니지만 나보다 동생이지. 억울하면 먼저 태어나지 그랬어.”

“우와. 치사하게 나이로 공격하다니.”

“동생보다 못나더라도 장남은 장남이지. 장남에게는 동생들을 챙길 의무가 있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야.”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걸 보여 줘야겠네요.”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정말 한마디도 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모용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서조운과 같은 생각이었다.

“선우세가에 안 가도 되겠어?”

“아버지가 계시니까. 가주이시기도 하고. 어차피 내가 가 봤자 보좌하는 것밖에 안 하는데. 또 이해해 주시기도 하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님. 모용세가를 위해 싸우는 건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반호진은 물론이고 선우방의 표정도 애매해졌다.

전투를 코앞에 두고서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다.

미신을 믿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도 있기에 반호진과 선우방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조금 위험한 발언 같은데.”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데. 걱정 안 해도 돼. 형님 덕분에 열심히 수련하시기도 했고. 물론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개인연공실을 사용하지만 나는 알지. 희수가 늘 말해 주거든. 아버지께서 독기를 품고 수련하신다고.”

듣다 못한 정이륭이 슬쩍 한마디를 했으나 모용척은 개의치 않았다.

자포자기한 게 아니라 자신감의 발현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진심으로 오대세가를 목표로 노력하는 걸 알았기에 모용척은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 정도 각오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지. 그러니 의성이를 부탁한다.”

“걱정 마세요! 의성이는 제 동생이기도 하니까요. 조운이랑 같이 제가 잘 보호하겠습니다.”

“안 해도 되는데요.”

호기롭게 장담하는 모용척의 모습에 서조운이 눈살을 찌푸렸다.

두 살 차이 가지고 너무 뻐기는 것 같아서였다.

형이기는 하지만 실력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기에 서조운은 더더욱 못마땅했다.

“어련히 잘하겠지만 그래도 모두 몸조심하고. 절대 무리하지 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물러나. 소림사와 함께 싸워.”

“알았어.”

“예!”

“그럴게요.”

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으나 이번 전투가 섬멸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흡정기공의 특성을 생각하면 시간을 주면 줄수록 위험하기에 최대한 빨리 처치하는 게 좋았다.

그걸 알기에 일행들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꼭 흡정기공이 아니더라도 전쟁은 빨리 끝내면 끝낼수록 좋았기에 다들 비장한 얼굴로 천사맹과 마도련의 진영을 노려봤다.

“형님도 조심하세요.”

“난 걱정하지 마. 절대 무리하지 않으니까.”

“믿을게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라보는 사마의성을 향해 반호진은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땅을 박찼다.

더 이상 어제와 같은 방법을 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사혈천교주와는 싸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반호진!”

어제의 패배의 설욕하겠다는 듯이 먼 곳에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솟구쳤다.

사사혈천교주가 자신의 위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이었다.

일종의 선전포고에 반호진은 비릿한 미소와 함께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다른 이들은 걱정하지 말거라!”

“사부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걱정 말거라. 네 손주는 보고 갈 거니까.”

담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살기와 광기가 뒤섞여 휘몰아치는 전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자대비한 미소였으나 그렇기에 반호진은 안심했다.

저 각오가 보통 각오가 아님을 알아서였다.

그리고 담현은 혼자가 아니었다.

“크아아아! 복수의 시간이다!”

이번 전투는 총력전이기에 팽만철도 참전했다.

몸 곳곳에 피로 젖은 붕대가 감겨 있었으나 그럼에도 팽만철의 기세는 여전했다.

특유의 패도적인 기세로 하북팽가를 이끌며 천사맹의 진영을 향해 돌진했다.

“다른 분도 계시니.”

저돌적으로 달려 나가는 팽만철의 모습에 반호진이 시선을 돌렸다.

말린다고 들을 성격이 아니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었다.

그렇다고 혼자서 돌격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팽만철과 나란히 질주하는 남궁호, 당우혁을 일별하고서 사사혈천교주를 바라봤다.

“오늘이야말로 끝을 내자!”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흥!”

육지비행술을 펼치기는 했으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기습이 아니었기에 다른 이들과 이동속도를 맞춘 것이었다.

그럼에도 거의 최전방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반호진은 금세 사사혈천교주와 가까워졌다.

“패기롭게 소리친 것과 달리 혼자가 아니네?”

사사혈천교주를 호위하듯 두껍게 인의 장막을 치고 있는 사사혈천교도들의 모습에 반호진이 이죽거렸다.

호기로운 목소리와 달리 꼭꼭 숨어 있어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의 도발에도 사사혈천교주는 흥분하지 않았다.

일 대 일로는 아직 반호진을 쓰러뜨릴 자신이 없어서였다.

“이곳은 연무장이 아니라 전장이다.”

“맞아. 그래서 나 역시 혼자가 아니지.”

콰콰콰쾅!

어제는 사사혈천교도들이 인해전술을 펼쳐도 반호진에게는 해결책이 없었다.

묵묵히 혼자서 상대하는 것밖에는.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미타불!”

“출진(出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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