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장. 인면악심(人面惡心). -01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제갈문곡은 물론이고 회의장에 앉아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그 정도로 노인이 꺼낸 말은 충격적이었다.
“휴전이라고 했습니까?”
“그렇소.”
“천사맹주와 마도련주의 전언이라고요?”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않소?”
진심으로 놀란 제갈문곡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노인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거만하게 턱을 높였다.
조금이나마 주도권을 가져온 것 같아서였다.
“휴전이라. 그것도 뜬금없이.”
“갑작스러운 반응은 이해하오. 그러나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과거에 수도 없이 있었던 사정대전, 마정대전 때도 휴전조약을 맺은 경우는 꽤 많았소이다.”
“그렇긴 하지요.”
제갈문곡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정사대전, 정마대전을 사정대전, 마정대전이라고 면전에서 말할 줄은 몰라서였다.
사파인들과 마도인들이 그리 말한다는 걸 건너 듣기는 했으나 이렇게 직접 들은 건 처음이었기에 제갈문곡은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휴전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오. 정천맹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고.”
“지금의 발언에 대해서는 정정할 부분이 있군요.”
“이대로 제 살 파먹기를 하자는 것이오? 정천맹으로서는 부담스러울 텐데.”
“피를 봄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법이지요.”
은근한 어조로 양패구상을 에둘러 표현했으나 제갈문곡은 흔들리지 않았다.
많은 피를 보더라도 천사맹과 마도련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결코 손해가 아니어서였다.
특히 흡정기공을 익히는 걸 넘어 전파하는 사사혈천교는 반드시 멸절시켜야 했다.
“또 그 진부하기 짝이 없는 대의를 꺼내려는 것이오?”
“중원무림에 대의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또한 백도무림이 대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에 평화로웠던 것이고요. 그 평화가 사도무림과 마도무림은 지루하고 지겨웠을 테지만 말이지요.”
“역시 평행선인가.”
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말투에는 불만이 가득했으나 의외로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예상했다는 표정에 제갈문곡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정상이지요.”
“하긴. 언제나 평행선이긴 했소이다.”
“또한 늘 먼저 맹약을 어긴 건 사도와 마도 쪽이었지요.”
“꼭 그렇지만은 않소만.”
노인이 정색했다.
하지만 냉랭한 노인의 표정에도 제갈문곡의 신색은 담담했다.
“제가 알기로는 그랬습니다. 역사적으로 그랬고요. 자료와 증거를 원하신다면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무의미한 대화는 이쯤 합시다. 지금 중요한 건 과거의 맹약들이 아니니.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으니 현재만 생각합시다.”
“좋습니다.”
“천사맹주님과 마도련주님도 정천맹의 입장은 이해하고 있소이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휴전을 제의하면 당연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두 분께서는 한마디를 더 남기셨소이다. 정천맹이 휴전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배신자들을 넘겨주겠다고 하셨소.”
제갈문곡은 물론이고 회의장에 있던 모두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조건이 있을 거라 예상하긴 했으나 이런 조건일 줄은 몰랐기에 제갈문곡조차 표정을 수습하지 못했다.
“……그게 사실인가?”
“나는 사자일 뿐이오. 그저 두 분의 뜻을 전달할 뿐.”
믿기 힘들다는 듯이 공동파의 음여창이 묻자 노인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은 전달만 할 뿐 설명할 생각은 없다는 태도였다.
“배신자들을 넘겨주겠다라.”
“이 정도면 괜찮은 조건 아니오?”
“반발이 상당할 텐데요?”
“천사맹주님과 마도련주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못 할 일은 없소.”
제갈문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뇌부가 비교적 수평적인 관계인 정천맹과 달리 천사맹과 마도련은 맹주와 련주의 권위가 강력했다.
애초에 힘의 논리에 의해 천사맹주와 마도련주가 정해진 만큼 정점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면 다른 이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배신자를 넘겨주는 대가로 휴전이라. 천사맹과 마도련의 속사정이 썩 좋지 않은 듯합니다.”
“그건 피차일반 아니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한 건 정천맹일 터인데 말이오. 정천맹도 지원군이 계속 오겠으나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외다. 오히려 단순 규모만 따지면 천사맹과 마도련이 훨씬 더 많을 것이오. 그럼에도 휴전을 제안하는 것은 각자 전력을 복구한 다음에 제대로 진검승부를 벌이자는 뜻이오.”
노인이 짐짓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천사맹과 마도련이 특별히 아량을 베푼다는 듯이 말이다.
그 노골적인 태도에 몇몇 수장들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사자 자격으로 왔기에 기세로 압박하지는 않았으나 눈총이 따가웠다.
“진검승부라.”
“배신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소만.”
“그렇지만 현재 천사맹 소속 아닙니까. 그런데도 내어주겠다는 겁니까? 그들이 어찌 될지 알면서?”
“이유를 묻는 것이라면 다행히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소이다. 한 번 배신한 이들이 또 배신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소이까. 도구가 쓸모없어지면 폐기처분하는 게 맞기도 하고. 안 그렇소?”
반문하는 노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냉정하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는 정론에 제갈문곡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선뜻 대답하기가 애매해서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재미있게 흘러갔다.
노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하는 이들 반, 솔깃한 표정을 짓는 이들 반으로 나뉘었다.
아무래도 배신자들을 직접 처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혹한 듯했다.
“흐음.”
그 분위기를 제갈문곡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누구보다 주변의 분위기를 예민하게 파악하는 게 그였기에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흐르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어느 쪽이든 결정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하오. 아무래도 입장이 각자 다를 터이니.”
제갈문곡과 눈을 마주하며 노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다 안다는 듯한 미소였다.
그게 제갈문곡은 심히 거슬렸으나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길게는 못 드리오. 천사맹주님과 마도련주님께 허락받은 시간은 한 시진뿐이외다. 물론 결정된 사항은 정천맹에서 직접 알려야 하오.”
“알겠습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으나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기에 제갈문곡은 노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럼 좋은 결정을 내리길 바라겠소이다.”
“조심히 가시길.”
눈치껏 비켜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제갈문곡은 정중히 포권했다.
적임에도 사자로서의 대우를 충실히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고마운 기색 없이 쌩하고 몸을 돌려 천막을 나갔다.
‘흐음.’
서두르지만 그러한 티를 전혀 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느긋한 표정으로 천막을 나서는 사자를 반호진은 지그시 바라봤다.
여기 있는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반호진 역시 노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언뜻 듣기에는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제안 같았으나 반호진의 생각은 달랐다.
‘분명 꿍꿍이속이 있겠지.’
보기 그럴 듯한, 달콤한 제안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교활한 흉계가 숨어 있을 터였다.
만약 진짜 서로에게 이득인 타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면 애초에 지금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전쟁은 엄청난 손해를 보더라도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저지르는 행위이니까.
즉 상호 이득이라는 말은 겉만 번지르르한, 정천맹을 꼬드기기 위한 술책일 게 분명했다.
‘문제는 그게 무엇이냐는 것인데.’
반호진은 미간을 좁히고서 턱을 쓰다듬었다.
의심은 가지만 무슨 속셈인지는 전혀 짐작가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갈문곡을 쳐다봤다.
비공식적이긴 하나 총군사를 맡고 있는 제갈문곡이라면 반호진이 보지 못한 무언가를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기회입니다.”
“응?”
한데 제갈문곡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다들 반호진과 같은 심정인지 똑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기회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무슨 흉계를 품고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요. 천사맹과 마도련은 분명 노리는 게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자를 보낸 것일 테지요.”
“정론이지. 다들 비슷한 생각일 테고. 노리는 게 있으니 사자를 보냈겠지. 그건 무식한 나도 짐작할 수 있어.”
의외로 정확하게 자기 자신을 파악하고 있는 팽만철의 모습에 남궁호와 당우혁을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팽만철이 이렇게나 정확하게 자기객관화를 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래서인지 몇몇 이들은 해연히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이 기회입니다. 한 시진 동안 우리가 회의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가장 크게 방심하고 있을 거라는 말이로군요.”
“맞습니다.”
오중건이 눈을 빛냈다.
이제야 제갈문곡의 말을 이해한 것이었다.
동시에 수장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방심을 노리는 건 전술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배신자들을 인도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오.”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그게 승패보다 중요합니까?”
누구보다 솔깃한 표정을 지었던 음여창의 말문이 막혔다.
배신자를 처벌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사문과 가문의 기강을 제대로 잡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전쟁의 승패보다는 아니었다.
“……내가 실언을 했소이다.”
“음 장문인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확하게는 모두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니까요. 그렇지만 소탐대실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약속을 확실하게 지킬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음여창은 물론이고 내심 그와 같은 마음이었던 이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들이 너무 순진하게 사자의 말을 믿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배신자들을 꼭 포기할 이유도 없고 말이죠. 우리 손으로 쟁취해도 되고요.”
“그렇습니다.”
시기적절하게 보조설명을 하는 오중건을 바라보며 제갈문곡이 빙그레 웃었다.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 정말 딱 필요한 부분을 짚어 주어서였다.
“우리라고 당하기만 하란 법은 없으니까 말이지. 난 찬성이야.”
“나 역시.”
“허를 찌르는 전술, 아주 좋네.”
팽만철, 남궁호, 당우혁이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거기에 많은 이들이 동조했다.
기습작전은 결코 비겁한 행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먼저 한 건 천사맹이었기에 명분도 있었다.
“시간을 줄 필요는 없으니 바로 시작하죠. 물론 사자는 죽이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이것만은 확실하게 해 두겠다는 듯이 제갈문곡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반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자 한 명의 목숨이 전쟁의 향방을 좌지우지하지는 않아서였다.
이 정도 아량은 모두가 베풀 의향이 있었고.
“그럼 움직이지요.”
결론이 나온 듯한 분위기에 담현이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입을 연 것이었다.
그러면서 담현은 반호진을 바라봤다.
***
미세하게 진동하는 땅의 울림을 느끼며 사사혈천교주는 입매를 비틀었다.
굳이 보고를 듣지 않더라도 정천맹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알 수 있어서였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으나 정천맹의 규모가 상당했기에 그로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뭐, 나야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사사혈천교주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사지가 결박된 건 물론이고 마혈을 점혈당한 이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곳으로 말이다.
“이,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갑자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악마! 신의를 이따위로 갚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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