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2장. 이제 와서? -02
이견은 없었다.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모르지 않았기에 표국주들은 깔끔하게 수긍했다.
반대의 입장이었어도 자신들 역시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해하고 말고 할 게 아닌 문제이니까요. 더구나 생존은 저희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정천맹의 무인들만큼은 아니지만 이곳까지 함께 온 이들은 각 표국의 최정예들입니다. 대의를 위해 합류하긴 했으나 가급적이면 피해가 적은 게 좋으니까요.”
“그래서 저와 본가가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요. 그럼 회의를 시작해 볼까요.”
인사와 소개가 얼추 끝나고 분위기가 충분히 자리 잡은 듯싶었기에 제갈문곡은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이른 아침부터 반호진은 불려 나왔다.
회의에 참석하고 싶지 않았지만 담현과 제갈문곡의 간곡한 부탁에 반호진은 끌려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발언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나서지 않아도 제갈문곡이 알아서 잘 조율하기에 지켜보기만 했다.
후르릅.
그를 불러낸 담현과 제갈문곡도 이 이상 바라지 않았고.
애초에 반호진이 이럴 거라 알았기에 두 사람은 참석한 것에 의의를 두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편하게 차를 홀짝였다.
“급보입니다!”
작전이 실패했으나 의외로 전체적인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성과 역시 있어서였다.
거기다 지원군까지 합류했기에 반호진의 예상과는 달리 분위기는 괜찮았는데 갑자기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출입구로 향했다.
“무슨 일인가?”
벌게진 얼굴이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를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중년의 무사는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곧바로 보고했다.
“처, 천사맹과 마도련에서 사자를 보내왔습니다!”
“사자?”
헐레벌떡 뛰어온 무사의 말에 제갈문곡은 물론이고 모두가 눈을 껌뻑였다.
뜬금없이 사자를 보냈다고 하자 다들 의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어제만 하더라도 수백 명이 죽고 그만큼의 인원이 다쳤는데 갑자기 사자를 보내오자 반호진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어떻게 할까요?”
“그 전에 숨부터 고르시게나.”
“아, 예! 감사합니다!”
인자한 담현의 말에 무사가 이제야 편하게 호흡을 골랐다.
그사이 제갈문곡을 위시로 각 파의 수장들이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의도인지 각자 추측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시선이 향하는 곳은 모두가 같았다.
“다른 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수십 쌍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제갈문곡이 담현을 바라봤다.
정천맹의 맹주는 현재 공석이지만 맹주직에 가장 가까운 이는 누가 뭐래도 담현이었다.
그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이 같았다.
정신적 지주이기도 했고.
“빈승은 얘기를 들어 봐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빈도도 같은 생각입니다.”
제갈문곡의 시선을 받은 담현은 운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의견도 궁금해서였다.
“저도 방장과 같은 생각입니다. 어떤 개소리를 지껄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죠.”
“팽가주.”
남궁호가 근엄한 얼굴로 팽만철을 불렀다.
의견을 제시하는 건 좋았으나 단어 사용이 적절치 않아서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런지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저도 궁금합니다.”
“저 역시.”
일우와 당우혁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갑작스러운 만큼 궁금한 것 또한 사실이어서였다.
하지만 모두의 의견을 들은 건 아니었기에 제갈문곡은 표국주들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봤다.
“저희도 들어 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를 통해 천사맹과 마도련이 어떤 상황인지 유추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모두 비슷한 의견이군요.”
제갈문곡은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그 역시 대동소이해서였다.
마지막으로 제갈문곡은 참석한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 반호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스윽.
근데 제갈문곡을 따라 많은 이들이 반호진을 쳐다봤다.
나이는 이 자리에서 가장 어리지만 영향력은 천하십대고수 못지않은 게 반호진이었다.
그렇다 보니 다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반호진을 주시했다.
“반 문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자를 만나서 손해를 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저쪽 역시 우리가 궁금해서 사자를 보냈을 테니까요. 혹은 원하는 게 있거나.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은 대화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정론에 가까운 대답에 제갈문곡이 옅게 웃었다.
반호진의 말대로 가치가 있는 건 물론이고 정천맹으로서는 이득이었다.
천사맹과 마도련 역시 얻어 가는 게 있겠으나 그게 손해는 아니었다.
어찌 보면 서로 이득이었다.
“그럼 부릅시다.”
“사자를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팽만철의 닦달 아닌 닦달을 들으며 제갈문곡이 대기하고 있던 무사에게 지시했다.
잠시 후 무장이 완전해제된 사자가 천막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배짱은 있네.”
혼자 찾아왔음에도 긴장한 기색이 전혀 없는 노인의 모습에 팽만철이 히죽 웃었다.
별다른 뜻 없이 평소대로 웃는 것이었으나 사자로 찾아온 노인에게는 위협적으로 다가온 모양인지 순간적으로 안면이 경직되었다.
다른 이들은 잘 몰라도 도왕의 성격이 포악하다는 건 너무나 유명해서였다.
부상자의 몸이지만 패도적인 기세는 여전했기에 노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겁박하는 것이오?”
“진짜로 겁박하면 넌 그렇게 서 있지도 못해.”
팽만철이 씨익 웃었다.
조금 전과 살짝 다른 느낌의 미소였는데 그래서인지 노인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왠지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저, 정천맹은 사자를 이렇게 대우하는 것이오!”
“내가 뭘?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막말로 압박하려고 했으면 넌 이렇게 대화도 못 해. 무릎을 꿇은 채로 입만 겨우 우물거렸을걸.”
“예의를 지켜 주시오!”
약하게 나가면 잡아먹힐 것 같았기에 노인은 도리어 강하게 소리쳤다.
애초에 무위로는 여기 있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게 그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명분이 있었기에 일부러 강하게 나갔다.
“허이구. 노견(老犬)이 목청은 좋네.”
부르르르!
적나라한 무시에 노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몸을 떨 뿐 더는 따지지 않았다.
자신 역시 지켜야 할 선이 있음을 잘 알아서였다.
더구나 팽만철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도 통제하지 못하는 인물인 만큼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몰랐다.
“그래도 꼴에 머리는 있구나. 짖기만 하는 것보다는 나아.”
“……예의를 지켜 주시오.”
“이 정도면 충분히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 갈면서 말하는 노인을 보며 팽만철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누가 봐도 건성으로 듣는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이런 팽만철의 행동이 사자의 기를 죽이는 데 효과적임을 잘 알아서였다.
“계속 무례하게 나온다면, 돌아가겠소.”
“가, 그럼.”
“…….”
가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팽만철이 말하자 노인이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좋은 대접을 받기 힘들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노인은 남몰래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주위의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눈알은 그만 굴리고 해야 할 말이 있으면 해. 아니면 나가든지.”
“여기서부터는 제가 맡겠습니다, 팽가주님.”
“알겠소이다.”
공석인 데다가 외부인도 있었기에 팽만철은 어깨를 으쓱이며 반존대를 했다.
그러고는 빠지겠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부터는 저와 대화하시죠.”
“……알겠소.”
“불편하시다면 그냥 가셔도 됩니다.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자를 죽일 정도로 저희는 몰상식하지 않으니까요.”
“사자로 온 만큼 대화를 나누겠소.”
부드럽지만 만만치 않은 느낌의 제갈문곡을 마주 보며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었으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서는 안 되었다.
“앉으시겠습니까?”
“괜찮소이다.”
“차는?”
“괜찮소.”
노인이 당우혁을 힐끔거렸다.
중원에서 제일 독을 잘 다루는 인물인 당우혁이 있기에 차나 음식은 부담스러웠다.
사자의 자격으로 온 만큼 비열한 수작질은 하지 않겠으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안 잡아먹는다니까.”
말은 하지 않았으나 노인의 눈빛에서 무엇을 저어하는지 모를 수가 없기에 당우혁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묘하게 팽만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인상도, 체구도, 분위기도 닮은 구석이 전혀 없는데 말이다.
꿀꺽!
평이한 어조인데도 이상하게 솜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에 노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절대 기죽은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고,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러시다면야. 그럼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요.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아 보이시니.”
“꼭 그런 건 아니오.”
“그렇습니까?”
제갈문곡이 반문했다.
진심으로 그러냐고 말이다.
“무엇을 묻고 싶은 것이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자리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귀하께서 솔직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좋소.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천사맹 소속입니까, 아니면 마도련 소속입니까?”
“둘 다의 자격으로 왔소.”
제갈문곡의 물음에 노인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전권을 가지고 왔기에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보아하니 천사맹 소속인데.”
“마도련의 뜻도 같이 가지고 왔소이다.”
“저희야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한 명과 나누는 게 편하긴 합니다. 일단 귀하가 왔다는 건 천사맹과 마도련의 뜻이 같다는 것일 테니.”
“맞소이다.”
“그럼 얘기해 보시죠. 이곳까지 직접 방문한 이유를.”
제갈문곡은 느릿하게 말하며 찻잔을 들었다.
방문 목적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태도였다.
그런 제갈문곡의 모습에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딱 봐도 주도권을 잡으려는 속셈이 보여서였다.
“궁금하지 않소?”
“딱히.”
왠지 모르게 점점 짧아지는 듯한 제갈문곡의 말투에 노인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서렸다.
아무리 적이라지만 그래도 자신이 연장자인데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그는 일개 무인이 아니라 천사맹과 마도련의 사자 자격으로 이곳에 온 이였다.
그렇다 보니 노인은 심기가 불편했다.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어 보이오.”
“어폐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자리는 본맹이 원해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닙니다. 무작정 귀하가 찾아왔고, 본맹은 아무리 적이라지만 문전박대는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이 자리를 허락한 겁니다. 그런데 대화할 마음이 없다고 따지다니.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끄응!”
노인이 앓는 소리를 냈다.
자신이 찾아왔다는 것에서 주도권이 정천맹에 넘어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무기력하게 당할 줄은 몰랐기에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태도가 싫으시다면 언제라도 돌아가시면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사맹주님과 마도련주님의 전언을 말하겠소.”
“하시죠.”
“휴전을 제안하는 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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