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1장. 먹고 먹히는. -04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사혈천교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공력만으로는 반호진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리 막대한 내공이 있어도 상대를 맞힐 수 없다면,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한다면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으나 사사혈천교주는 이내 잊고 진기를 조종했다.
슈우우욱!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강기가 발밑에서 흘러나와 지면을 타고 순식간에 반호진에게 접근했다.
그러더니 이내 끝이 손처럼 변해서 반호진의 하반신을 노렸다.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붙잡는 게 목표였다.
실패한다면 최소한 반호진이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도록 방해할 작정이었다.
“소용없다니까.”
하지만 그 계획은 반호진에게 훤히 읽혔다.
경지는 높지만 경험이 부족하다는 게 바로 여기에서 드러났다.
물론 눈치채지 못했다고 해도 반호진이 당할 리는 없었다.
뻐어어엉!
반호진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다리를 노리고서 쇄도하는 강기들을 분쇄했다.
그러고는 그 움직임을 그대로 살려 사사혈천교주의 허리를 노렸다.
아래에서부터 사선으로 검격을 뿌렸다.
으득!
그런데 그 공격을 사사혈천교주는 피하지 않았다.
자신 역시 반호진과 똑같이 흘려 내겠다는 듯이 이를 악물고서 움직였다.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방식을 유지했던 그가 처음으로 다른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근데 그게 패착이었다.
푹!
다리에서부터 파고드는 검을 왼손의 손등으로 밀어내서 검로를 비틀려고 했던 사사혈천교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갑자기 반호진의 검이 뱀처럼 미끄러지며 겨드랑이로 방향을 틀어서였다.
물론 그 역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재차 왼손을 움직여 반호진의 검을 밀어내려고 했는데 검극이 다시 한번 방향을 틀더니 손등을 꿰뚫었다.
“크윽!”
지금껏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던 수강이 두부처럼 으깨지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지만 사사혈천교주는 의외로 빠르게 헤어 나왔다.
왼손이 꿰뚫렸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반호진의 검을 붙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검객이 검을 움직일 수 없다면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기에 사사혈천교주는 고통을 참으며 오른손을 찔러 넣었다.
정확히 반호진의 목을 노리고서 말이다.
쌔애액!
섬뜩한 파공성과 함께 사사혈천교주의 손이 번개같이 뻗어 갔다.
한데 그걸 보면서도 반호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검이 붙잡힌 상태라고 하나 그렇다고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반호진은 사사혈천교주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터어엉!
“호신강기는 너만 있는 게 아니지.”
“이깟 호신강기쯤은……!”
“그 전에 네 손이 날아가지.”
스그극!
소름 끼치는 파육음과 함께 허공에 피가 솟구쳤다.
반호진이 거칠게 팔을 휘둘러 사사혈천교주의 손에 박혀 있던 검을 강제로 뽑았다.
동시에 왼손에 수강을 일으키고서 쇄도하는 사사혈천교주의 오른손을 낚아챘다.
꾸욱!
그러고는 그대로 사사혈천교주를 들어 올린 후 바닥에 메다꽂았다.
검을 회수함과 동시에 오른손을 잡고서 그대로 찍어 버린 것이다.
“끄아아악!”
등에서부터 떨어진 사사혈천교주가 비명을 질렀다.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신음이 절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지독한 고통에 잠시 빈사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큭!”
“커헉!”
그러나 반호진은 완벽한 기회가 왔음에도 검을 찔러 넣지 못했다.
귓가로 익숙한 이의 신음 소리가 들려서였다.
함께 적진으로 파고든 남궁호와 일우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에 반호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러자 마도련주를 상대로 조금씩 밀리는 남궁호와 언제 날아왔는지 백마문주와 겨루고 있는 일우가 보였다.
근데 일우의 상대는 한 명이 아니었다.
백마문주와 백마문(百魔門)의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열 명의 제자들이 일우를 협공하고 있었다.
‘사부님과 운상 도장도 상황이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아.’
남궁호와 일우를 일별한 반호진이 담현과 운상의 모습도 살폈다.
둘의 상황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들어서 그런지 담현과 운상도 결코 여유롭다고 보기 어려웠다.
일우나 남궁호처럼 위급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꽈아아앙!
“교주님을 구해라!”
“저 악마를 처단하자!”
“순교하라!”
반호진이 잠시 한눈을 판 틈을 사사혈천교주는 놓치지 않았다.
이대로 계속 싸우다가는 자신 역시 살방주와 귀령문주, 잔살방주와 같은 말로를 걸을 게 분명했기에 사사혈천교주는 결단을 내렸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우선은 이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말이다.
살아 있어야 복수도 가능한 것이기에 사사혈천교주는 주변의 교도들에게 지시를 내림과 동시에 붙잡혀 있는 오른손을 거칠게 흔들어 반호진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아직도 충만한 공력을 모조리 쏟아부어 공격했다.
반호진의 시야를 가림과 동시에 반발력을 이용해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였다.
“어딜!”
모든 것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공격이었으나 반호진도 만만치 않았다.
창졸간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기민하게 반응했던 것이다.
잽싸게 빠져나가려는 사사혈천교주에게 손을 뻗어 다시 잡아채려 했다.
“이놈을 막아라! 어떻게든 물고 늘어져!”
수십, 수백 개의 강기들이 쏟아지는데도 검을 휘두르고 손을 뻗는 반호진의 모습에 사사혈천교주가 기겁했다.
굳은살로 가득한 반호진의 왼손을 보자 방금 전의 고통이 되살아나서였다.
그래서 그는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며 표독스럽게 지시를 내렸다.
“교주님의 명이다!”
“검신을 잡아라!”
“모두 달려들어!”
사사혈천교도들에게 있어 교주는 신과 동일했다.
그렇기에 사사혈천교도들은 자신들이 죽을 거란 걸 알면서도 달려들었다.
자신의 몸을 바쳐 사사혈천교주를 살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사혈천교도들의 모습에 반호진이 이를 악물었다.
‘잡았을 때 끝냈어야 했는데.’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사사혈천교도들을 베어 넘기며 반호진이 입맛을 다셨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회를 놓친 게 아까워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호진은 물러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여유가 있는 그와 달리 일우와 남궁호의 상황은 점점 악화일로로 향해 가고 있어서였다.
‘결정을 내렸다면 움직여야지.’
욕심을 부린다면 사사혈천교주를 추격해서 잡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대가로 남궁호와 일우를 잃을 가능성이 컸다.
때문에 반호진으로서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사혈천교주는 다음에도 잡을 기회가 있지만 죽은 이는 다시 되살릴 수 없어서였다.
“물론 그냥 떠나 주지는 못하지.”
웅웅웅웅!
지금까지 반호진은 사사혈천교주와 수없이 많은 공방을 주고받으면서도 절대 내공을 낭비하지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만 효율적으로 사용했기에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지금 이 순간 아끼지 않고 마음껏 사용했다.
꽈과과광!
반호진의 주변에 생성된 강환 열 개가 주위를 쓸어버렸다.
사사혈천교주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사사혈천교도들을 말 그대로 밀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영역을 넓혀 담현과 운상에게 날아갔다.
“커흑!”
“끄르륵!”
어떻게든 두 사람을 붙잡고서 끈질기게 매달리던 장로들과 간부들이 갑작스러운 공격에 쓸려나갔다.
반항도 못 하고 전부 다 도륙당했던 것이다.
“사부님!”
“나도 알고 있다!”
“갑시다!”
긴말을 하지 않았으나 담현과 운상은 반호진의 생각을 귀신같이 파악했다.
두 사람 다 싸우면서도 남궁호와 일우의 상황을 틈틈이 살피고 있었기에 반호진이 움직이자 곧바로 박자를 맞췄다.
쌔애애액!
순식간에 담현과 운상의 주변을 정리한 반호진은 허공답보를 펼치면서 주위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여러 검과 도를 들어 올렸다.
강환에 이어 이기어검까지 펼친 것이었다.
거기에 담현과 운상까지 본격적으로 합류하니 제아무리 마도련주와 백마문주라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후욱! 훅!”
“괜찮으십니까?”
“딱, 좋을 때 왔어.”
옆에 내려서며 반호진이 묻자 남궁호가 땀이 흥건한 얼굴로 억지 미소를 지었다.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것이었다.
“장문인은요?”
“나도 버틸 만하네.”
“그럼 이동하죠.”
강환과 이기어검을 이용해 마도련주와 백마문의 마인들을 밀어낸 반호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의 물러남이 일시적이란 걸 잘 알아서였다.
더욱이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였기에 작전이 실패한 이상 빠르게 복귀해야 했다.
내공과 체력, 심력은 무한하지 않기에 반호진은 남궁호와 일우가 먼저 자리를 뜨는 걸 확인한 후 담현, 운상과 함께 정천맹의 진영으로 향했다.
“공격해라!”
“싹 다 죽여!”
“그동안 당한 울분을 이번 기회에 푸는 거다!”
한데 그때 정천맹의 후미에서 짙은 먼지구름이 일었다.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후미를 노리고서 돌격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광경은 하늘을 나는 반호진의 눈에도 보였다.
“누구지?”
“더 나올 병력이 있나? 천사맹과 마도련에 합류할 이들은 이제 얼마 없을 텐데?”
반호진보다 앞서 날아가던 남궁호와 일우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정천맹의 후미로 달려오는 병력의 규모가 상당히 커서였다.
대략적으로 세어 봐도 천 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 인원에 남궁호와 일우는 물론이고 운상과 담현의 얼굴도 굳어졌다.
가뜩이나 가까스로 버티는 중인데 천사맹과 마도련의 지원군으로 보이는 병력이 가세한다면 포위당해 큰 피해를 입을 게 분명해서였다.
두두두두!
그런데 그 순간 또 다른 무리가 나타났다.
다른 방향에서 짙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일단의 무리가 달려왔던 것이다.
“저들은!”
“우리들의 지원군입니다!”
커다란 깃발을 펄럭이며 달려오는 무리를 본 담현과 운상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과 달리 새로이 나타난 이들은 아는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산하의 표국들, 그러니까 방계의 제자들이 병력을 이끌고 달려오자 남궁호와 일우도 반색했다.
“이러면 상황이 달라지지.”
“아직 좀 더 싸울 수도 있고.”
일우와 남궁호가 두 눈을 빛냈다.
둘 다 지친 데다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나 그렇다고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피해를 입은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천사맹과 마도련도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기에 정천맹이 꼭 불리하지만은 않았다.
“수적들인 것 같습니다.”
“장강과 황하, 동정호의 수로채들이겠구나.”
“그럴 겁니다.”
반호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안 그래도 천사맹에 합류했다고 들었는데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였다.
말만 무성하기에 소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이때를 노린 듯싶었다.
“먼저 가거라. 나는 최대한 뒤따라가마.”
“수적들도 저희 쪽 지원군을 본 모양입니다.”
담현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를 비롯해서 운상과 남궁호, 일우를 챙기느라 반호진이 전력으로 이동하지 않음을 알아서였다.
더구나 수적들이 돌격하는 방향에는 선우방과 동생들이 있기에 담현은 먼저 가길 권했다.
“천사맹과 마도련도 물러납니다.”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남궁호와 일우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지원군을 본 수적들이 방향을 트는 건 물론이고 마도련과 천사맹이 퇴각하는 게 보여서였다.
싸울 수는 있었으나 부담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기에 두 사람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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