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1장. 먹고 먹히는. -02
물론 모두가 지켜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최절정고수나 초절정고수들은 충분히 반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섯 명을 향해 강기를 뿌렸으나 아쉽게도 닿기는커녕 스치는 것도 없었다.
“너희들 상대는 우리다!”
“나와 어울려 보자꾸나!”
훤히 보이는 속셈에 사도육주와 마도십문이 황급히 쫓아가려고 했으나 당우혁을 비롯해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끈질기게 붙잡았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해를 목적으로 매달렸기에 제아무리 마도십문과 사도육주라도 쉽사리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반응이 늦기도 했고.
“교주님을 지켜라!”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
다섯 명의 목적은 너무나 명백했기에 사사혈천교주를 호위하고 있던 장로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한두 명도 아니고 천하십대고수급 무인이 무려 다섯 명이나 쇄도하고 있었기에 장로들과 사사혈천교도들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그들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한 다섯 명의 행동에 당황한 것이었다.
동시에 마도련주가 움직였다.
“역시 이렇게 나오는군.”
“놀라기는. 예상했던 것들 중 하나이지 않나.”
“오기 전에 정리부터 해 두자고.”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며 마도련주가 허공을 가르면서 날아오고 있었으나 남궁호는 물론이고 일우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올 거라 예측했었기에 두 사람 다 자연스럽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와 동시에 각자 한 방향을 맡고서 검을 휘둘렀다.
염왕과 투왕의 힘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었다.
투두두둑.
사사혈천교의 진영 한복판이었음에도 둘의 일검을 받아 내는 이는 없었다.
심지어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장로들조차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말 그대로 천하십대고수다운 무용을 보여 준 것이었다.
어째서 자신들이 염왕과 투왕이라 불리는지 그 이유를 두 사람은 증명했다.
“고, 공격해!”
“기회다! 여기서 저 다섯 명을 죽이면 우리가 승리한다! 천사맹이 승리하는 것이다!”
“우아아아!”
말도 안 되는 위용에 잠시 주춤거렸던 사사혈천교도들이 남궁호와 일우에게 달려들었다.
광신도답게 몇 마디 말에 두려움을 순식간에 떨쳐 내고서 저돌적으로 쇄도했다.
눈이 돌아간 채로 말이다.
그 모습에 웬만해서는 기가 죽지 않는 일우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하나만 생각하자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네.”
관계가 썩 가깝지는 않아도 두 사람의 합은 괜찮았다.
둘 다 일대검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검객들이었기에 의외로 합이 잘 맞았다.
많은 세월 지지고 볶아서 그런지 서로에 대해서 잘 알기도 했고.
뻐어엉! 뻐엉!
더욱이 이번 작전은 시간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두 사람 다 힘을 아끼지 않았다.
돌아갈 힘만 남기고 모든 걸 쏟아부을 생각이었기에 남궁호와 일우의 검에서는 가공할 검강이 줄기줄기 솟구치며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염왕! 투왕!”
“조금 늦었군.”
단 일검에 사사혈천교도들 수백 명을 도륙한 남궁호가 비릿하게 웃었다.
어느새 그의 앞에 착지하는 마도련주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기다리다 지칠 뻔했어.”
웃는 남궁호와 달리 일우는 텅 빈 왼쪽 소매를 펄럭이며 마도련주에게 달려들었다.
호흡을 뺏을 작정으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움직인 것이었다.
이윽고 자색의 검강이 솟구치며 마도련주에게 작렬했다.
“나를 잡으러 온 모양이군.”
“맞아.”
“상관적인가?”
굉음과 폭발이 난무하는 북쪽과 달리 사사혈천교주의 주변은 조용했다.
반호진과 담현, 운상을 공격하려던 장로들과 교도들을 사사혈천교주가 직접 저지해서였다.
말도 아니고 그의 손짓에 미치광이처럼 광기를 드러내던 사사혈천교도들이 거짓말처럼 물러났다.
“어떻게 알았지?”
“그 녀석이 제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의외로 안목이 있네.”
“의외로?”
사사혈천교주이자 천사맹주인 그가 실소를 흘렸다.
의외라는 두 글자가 그의 심기를 건드려서였다.
그러나 이내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이였다면 당장에 멱을 따겠지만 반호진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했다.
“별로 신경 안 쓸 줄 알았거든. 애초에 다 쓰고 버렸잖아? 살방, 잔살방, 귀령문. 그것도 천사맹주가 말이지.”
“버렸다기보다는 스스로 선택한 일이지.”
“보통은 그렇게 하면 지지기반이 흔들리기 마련인데 광신도가 이럴 때는 참 좋아. 무슨 짓을 해도 굳건히 지지를 보내 주니.”
반호진의 시선이 사사혈천교주를 호위하듯 서 있는 교도들을 훑었다.
그런데 그의 이죽거림에도 사사혈천교주의 표정은 평온했다.
고작 이 정도의 비아냥거림에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되레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본좌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무림공적이 되는 게 두렵지 않은 모양이야.”
“후후! 무림공적이 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나? 여기까지 온 마당에. 반대로 너희가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지.”
“흡정기공을 너무 맹신하는 것 같은데.”
“글쎄. 과연 맹신일까. 흡정기공의 힘을 직접 겪어 봤을 텐데?”
사사혈천교주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느껴 보고도 이런 말을 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눈빛과 표정이었다.
“대개는 혼자만 익히는데 여기저기 다 푼 것을 보면 조금 특이하기는 하지만, 글쎄. 그렇게 자신만만해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설마 상관세가에 전부 다 퍼 주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흐음?”
“졸(卒)은 결국 졸일 뿐이지. 장기짝에서 졸과 마가 같은 걸 봤나?”
“역시 그런가.”
비릿한 사사혈천교주의 표정에도 반호진은 딱히 놀라거나 발끈하지 않았다.
특이하기는 하나 딱 그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니 너에게는 기회를 주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 될 기회를. 고작해야 소림사의 속가제자 따위가 아닌, 작디작은 무관의 주인이 아니라 천하를 호령할 자리를 주겠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또한 어설프게 흉내만 낸 흡정기공이 아니라 내가 익힌 것과 동일한 흡정신공을 하사하겠다.”
“이게 목적이었구만.”
사사혈천교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자신이 내민 손을 잡는다면,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모든 걸 주겠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잠자코 있던 담현을 건드렸다.
드드드드!
자신을 앞에 두고서 뻔뻔하게 반호진을 회유하려는 사사혈천교주의 모습에 담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흘러나왔다.
분노와 함께 갈무리해 두었던 공력을 일제히 끌어 올린 것이었다.
그런 담현의 모습에 사사혈천교주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법왕도 흥분할 줄 아는 모양이군. 지난번에는 하도 표정변화가 없어서 감정이 메마른 줄 알았는데.”
“망발을 아주 길게 지껄이는 재주가 있소이다.”
“어허. 망발이라니. 엄청난 기회를 하사하는 건데. 정확하게는 특혜지.”
담현의 매서운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넘기며 사사혈천교주가 히죽 웃었다.
사람 성질을 건드리는 아주 얄미운 미소였다.
그러나 사사혈천교주의 도발 아닌 도발에도 담현은 평정심을 유지했다.
한데 다른 이들이 사사혈천교주의 말에 반응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고작해야 땡중 따위가!”
“교주님께 머리를 조아려라!”
담현의 태도와 말투가 거슬린 모양인지 사사혈천교도들이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이 동시에 괴성을 터트리며 포효하자 주변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싸우기도 전에 귀청이 나갈 것 같은 소음에 운상이 눈살을 슬며시 찌푸렸다.
“닥쳐라.”
후우우웅!
욕설은 기본이고 온갖 패륜적 발언들이 쏟아지자 반호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동시에 그에게서 압도적인 존재감이 뿜어져 나왔다.
갈무리하고 있던 기도를 개방한 것이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핏대를 세우며 나불거리던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크으윽!”
“가, 감히……!”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나마 무위가 높은 몇몇이 저항하듯 이를 악물고서 입을 열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말을 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반호진의 존재감에 짓눌려 입술만 오물거렸다.
“역시 검신이로고. 그래서 더욱 탐이 나.”
기도를 개방하는 것만으로 주변을 침묵시킨 반호진의 모습에 사사혈천교주가 입맛을 다셨다.
보면 볼수록 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단순히 반호진을 죽이면 정천맹의 힘이 약화되지만 손에 넣는다면 전력을 약화시키는 건 물론이고 사사혈천교의 힘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사혈천교주는 진심으로 반호진이 갖고 싶었다.
‘후계자로서 나쁘지 않고. 배신할 기미가 보인다면 잡아먹어도 되고.’
사사혈천교주가 사이한 눈빛을 번뜩이며 혀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지금 보이는 기도를 보면 잡아먹을 경우 어마어마한 힘을 얻게 될 게 분명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정순한 정기를 말이다.
꿀꺽!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사사혈천교주는 정말 오랜만에 몸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적지 않은 나이였기에 웬만한 일에는 도통 감흥이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나도 탐이 나. 네 목이 말이지. 얌전히 목을 내밀어 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크하하하!”
“어차피 얼마 안 가 죽을 목숨, 중원무림을 위해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앙천광소를 터트리는 사사혈천교주를 보며 반호진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기쁘다는 듯이 말이다.
“목숨을 바쳐라?”
“그동안 잡아먹은 이들에게 참회하며 죽는 거지. 그러면 지금까지 쌓은 업보가 조금이나마 풀어지지 않겠어?”
“재미있군. 내 앞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일 줄이야.”
“나는 재미없었어. 감히 거머리 따위가 나더러 복종하라니.”
“아쉽군. 나는 진심이었는데.”
콰우우우!
안타까운 표정과 달리 사사혈천교주에게서 서서히 흘러나오는 기운은 사나웠다.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본격적으로 공력을 끌어올리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땅이 미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공력에 지면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었다.
키이이잉! 키이잉!
“큭!”
“흐읍!”
이윽고 반호진에게서 흘러나온 기세와 사사혈천교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세가 중간 지점에서 충돌했다.
그러자 소름 끼치는 소성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차합!”
스르릉!
그와 동시에 담현과 운상이 땅을 박찼다.
목적이 사사혈천교주를 죽이는 것이기에 둘은 망설이지 않았다.
쑤아아앙!
두 사람이 제대로 기운을 일으키자 사사혈천교주의 영역이 순간적으로 밀렸다.
무지막지한 힘에 일시적으로 찌그러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서른 명 정도가 둘에게 달려들었다.
장로들과 지부장들이 잡아먹을 기세로 쇄도했는데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땡중과 말코도사를 죽여라!”
“이곳이 네놈들의 묏자리니라!”
살벌한 광기가 사방을 잠식해 갔다.
하지만 담현과 운상은 광신도다운 모습이 아닌 다른 점에 놀랐다.
서른 명 전원이 초절정 말엽에 다다라 있어서였다.
초월경에 비해 많은 것이지 초절정 끝자락의 고수는 무림에서 결코 쉽게 볼 수 없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는 무인이 초절정 말엽에 이른 고수였다.
계기만 있다면 언제라도 벽을 넘을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이런 이들이었는데 그 숫자가 무려 서른 명이 넘자 담현과 운상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경악스러웠다.
“사부와 제자가 한날한시에 함께 뒈지겠구나!”
“그건 네 생각이고.”
슈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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