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1장. 먹고 먹히는. -01
반호진의 한마디에 제갈문곡이 빙긋 웃었다.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단박에 알아들어서였다.
반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대표로 팽만철이 입을 열었다.
“똑같은 방법이라니?”
“소수정예로 공격하는 겁니다. 귀령문과 흑랑문처럼 목표물을 미리 정해 놓고서요. 상관세가처럼 포섭해 놓은 곳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으나 거기까지는 무리일 테니 집중공격에 중점을 두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사사혈천교주만 잡고 빠지자?”
“치고 빠지는 전술도 괜찮지만 첫 번째 목표를 이루었다면 그다음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두 번째 목표라는 건…….”
팽만철이 말끝을 흐렸다.
고뇌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답게 반호진의 저의를 눈곱만큼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겠어? 사도육주나 천사맹이지.”
“호오.”
“물론 자네는 참전하지 못하겠지만.”
“끄응!”
명치를 때리는 듯한 당우혁의 발언에 팽만철이 앓는 소리를 냈다.
회의에 참석하기는 했으나 아직 전투는 무리였다.
억지로 싸울 수는 있으나 본 실력을 발휘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도 잘 알았기에 팽만철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아,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해 볼 가치는 있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묵묵히 듣는 쪽이던 아미파의 연정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 모습에 제갈문곡은 천천히 설명했다.
“첫 번째는 전력의 배치입니다. 모두 아시겠지만 순수하게 규모만 따지면 저희가 불리합니다. 수적으로 불리한데 돌파까지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돌파에 전력을 집중한다면 상대적으로 다른 전선에 무리가 갈 겁니다.”
“아무래도 그럴 테지.”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상식적인 부분이라 팽만철도 단박에 이해했다.
그리고 그가 이해했다는 말은 장내에 있는 모두가 알아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분명 피해가 상당할 겁니다. 이번에 귀령문주와 흑랑문주가 죽으면서 천사맹과 마도련의 피해가 상당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할 겁니다. 두 번째는 돌파에 성공해도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사혈천교주를 처치하지 못한다면 계획이 실패하는 건 물론이고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을 겁니다. 어쩌면 전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어조도 어조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몇몇은 입에 달린 말이라도 듣고 싶어 하겠지만 제갈문곡의 생각은 달랐다.
최상의 결과가 나온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최악도 상정해 두어야 했다.
“모든 걸 얻거나 아니면 모든 걸 잃거나 둘 중 하나구려.”
“예.”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냉정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담현에게 대답하며 제갈문곡이 반호진을 힐끔 쳐다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기색이었으나 그렇다고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저 무언가 아쉬운 눈빛으로 반호진을 힐끔거렸다.
“제갈가주께서 맹주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도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단순히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까요.”
자칫 잘못하면 전멸할 수도 있는 작전이었기에 제아무리 제갈문곡이라고 하더라도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정권이 없을뿐더러 목숨을 걸고 가려는 이들도 적을 터였다.
단순히 백도무림을 위해서 나서기에는 여기 있는 이들의 어깨에 놓인 게 많았다.
“제가 말을 꺼냈으니 책임도 지겠습니다.”
“반 문주님.”
제갈문곡의 얼굴이 밝아졌다.
불감청 고소원이어서였다.
부탁하고 싶었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었는데 반호진이 먼저 나서 주자 제갈문곡은 반색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아무리 무상문주가 대단하다지만 엄연히 강호의 후배인데.”
“그러기에는 위상이 저와 비교불가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너무 티를 내면 안 되지.”
팽만철도 알고 있었다.
이번 작전에 반호진의 유무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반호진이 중원무림에 해 준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에 또 부탁을 하기에는 염치가 없었다.
“제가 먼저 부탁을 한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그렇지.”
“사실 팽가주님도 저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끄응!”
차마 부정할 수 없었기에 팽만철은 앓는 소리만 냈다.
그러면서 그는 은근슬쩍 반호진의 눈치를 살폈다.
천하의 도왕이 고작 약관에 불과한 반호진의 눈치를 보는 모습에 장내에 있던 몇몇 이들이 놀랐다.
이번에 반호진을 처음 본 이들이 크게 놀란 것이었다.
“반 문주가 간다면 나도 가겠네.”
“나 역시.”
모두가 좌중의 눈치를 볼 때 남궁호가 입을 열었다.
강호의 후배가 백도무림을 위해 나서겠다는데 가만히 있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거기에 일우도 가세했다.
남궁세가에 이어 화산파도 참여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제자가 가겠다는데 빈승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빈도도 가겠소이다.”
담현과 운상까지 합류 의사를 밝히자 제갈문곡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천하십대고수급만 무려 다섯 명이었다.
그것도 최상위권의 고수들로만 이루어진 다섯 명이기에 제갈문곡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작전은 간단합니다. 속전속결입니다. 최우선적으로 사사혈천교주를 노리고, 무사히 본진으로 복귀하는 게 작전의 골자입니다. 다른 사도육주들을 잡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고요. 그게 무리라 판단된다면 그냥 복귀하셔도 됩니다.”
“가장 좋은 건 천사맹의 핵심 전력을 와해시키는 거겠지. 사도육주 전원을 날려 버릴 수 있으면 더없이 좋을 테고.”
“맞습니다.”
남궁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와 반호진, 투왕 셋이라면 솔직히 조금 부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담현과 운상까지 합류한다면 얘기가 달라졌다.
성공할 가능성이 확 높아졌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중요하겠군.”
“판단은 전적으로 다섯 분께 맡기겠습니다.”
“우리가 빠져도 가능하겠는가?”
“어떻게든 버텨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궁호가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아차린 제갈문곡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다섯 명이었기에 이들의 전력 이탈은 정천맹에 있어 타격이 컸다.
그러나 큰 걸 얻기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모험을 해야 하는 법이었다.
때문에 제갈문곡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섯 명이 작전을 완수하고 본진으로 복귀할 때까지 버틸 수밖에.
그러기 위해서 군사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본진은 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원시천존. 빈도도 있소이다.”
당우혁과 함께 곤륜파 장문인인 운왕도 입을 열었다.
피해가 크겠지만 지금은 그 피해를 감수해야 때임을 잘 알아서였다.
만약 때를 놓쳐 흡정기공이 중원 전역으로 퍼진다면 제이, 제삼의 사사혈천교가 발발할 게 분명했다.
“뒤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돌아오실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버티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꼭 성공하고 복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담을 너무 주는 것 같은데.”
남궁호가 그답지 않게 볼멘소리를 냈다.
너무 부담을 주는 것 같아서였다.
“그만큼 기대가 되어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팽가주님?”
“나도 갔어야 했는데…….”
무거운 부담감에 얼굴을 굳히는 남궁호와 달리 팽만철은 입맛을 다셨다.
부상만 아니었으면 그도 참여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였다.
더구나 사사혈천교주에게는 갚아야 할 빚까지 있기에 팽만철은 더더욱 아쉬웠다.
“팽가주님의 빚은 겸사겸사 제가 갚아 드리겠습니다.”
“이자까지 쳐서 갚아 줘.”
“예.”
“무리하지는 말고. 실패해도 살아서 돌아와야 해. 우리 막내딸 운다. 나는 그 꼴 못 본다.”
“…….”
분위기가 일변했다.
반호진은 물론이고 모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팽만철은 뻔뻔했다.
수많은 시선에도 민망해하기는커녕 도리어 당당했다.
“왜?”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것 같아서요.”
“내가 좀 대단하기는 하지.”
“좋게 받아들이신다면야.”
“욕한 게냐?”
팽만철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반호진을 쳐다봤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오금이 저렸을 테지만 반호진은 달랐다.
노려보는 게 아니라 원래 눈빛이 이렇다는 걸 알았기에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좋은 의미일 수도 있고, 나쁜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뭐야? 그 애매모호한 대답은.”
“팽가주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당연히 좋은 의미겠지. 호진이 네가 날 욕할 리는 없으니까.”
반호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대신 어깨를 으쓱거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제갈가주님.”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팽만철과 달리 제갈문곡은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얼굴이었다.
가히 건곤일척의 승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제갈문곡은 반드시 이번 계획을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
아침 안개가 채 걷히기도 전에 거대한 평원에 전운이 감돌았다.
해가 밝아오기 무섭게 정천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였다.
그로 인해 천사맹과 마도련의 진영도 덩달아 소란스러워졌다.
스스슥!
상황을 보고서 대응하려는 마도련, 천사맹과 달리 이미 진즉에 진군 준비를 마친 정천맹은 움직였다.
대놓고 붙어 보자는 기세로 천사맹과 마도련의 진영을 향해 천천히 진격했다.
그 모습에 두 세력 역시 부랴부랴 병력을 집결시켰다.
무슨 속셈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생각은 없기에 마도련과 천사맹은 마도십문과 사도육주를 중심으로 진영을 구축했다.
“아미타불.”
그런 천사맹과 마도련의 모습을 담현은 담담한 신색으로 지켜봤다.
아직은 나설 때가 아니었기에 차분히 기다렸다.
“낌새가 어째 반 문주를 찾는 것 같습니다.”
담현의 근처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전장을 주시하던 남궁호가 눈을 번뜩였다.
천사맹과 마도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누군가를 찾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게 그의 시야에 잡혀서였다.
“사사혈천교주가 먼저 움직여 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지요.”
“천사맹주이니까. 엉덩이가 엄청 무거울 것이네.”
남궁호도 반호진과 같은 생각이었다.
어제의 귀령문주나 흑랑문주처럼 움직이기에는 사사혈천교주의 존재감이 너무 컸다.
아마 반호진의 위치를 발견한다면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남아 있는 사도육주 중 몇 명을 보낼 터였다.
아니면 마도십문 중에서 몇 명을 차출하거나.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자!”
“더러운 위선자들을 죽여라!”
콰콰콰쾅!
그사이 서로를 향해 돌진한 세 진영이 격돌했다.
이미 피를 흘릴 대로 흘린 상태였기에 세 곳 다 손속에 사정은 없었다.
오히려 진득한 살의를 드러내며 공격했다.
“움직이지요.”
“곧 눈치챌 겁니다.”
충돌과 동시에 담현과 운상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다섯 명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천사맹과 마도련에서 곧 알아챌 게 분명해서였다.
그 전에 사사혈천교주에게 접근해야 했기에 담현은 망설이지 않고 땅을 박찼다.
휘이이익!
“버, 법왕이다!”
“검왕도 있다!”
“미친! 염왕과 투왕, 검신까지……!”
담현을 위시로 네 명이 허공을 날자 천사맹과 마도련의 무인들이 대경실색했다.
다섯 명이 한 방향을 향해 날아가자 깜짝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방해할 수가 없었다.
하늘 높이 날기도 했거니와 속도가 워낙에 빨랐기에 대부분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 막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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