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0장. 악연의 끝. -03
두 개의 의견이 팽팽하게 충돌했다.
서로 조금의 양보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두 의견 다 일리가 있었다.
또한 최종 조치에 대해서는 양측 다 같았다.
“소림사 방장께서 오셨소이다. 호진이도 왔고.”
격렬하게 대립하는 양쪽을 지켜보던 팽만철이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상자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힘 있는 목소리에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우던 이들이 빠르게 표정을 관리했다.
소림사 방장이라는 위치는 충분히 그럴 만해서였다.
더욱이 반호진도 함께하고 있다는 말에 모두가 살짝 긴장했다.
“환자가 와 있어도 되는 겁니까?”
“환자이기 전에 하북팽가의 수장이니까. 아들놈이 못미덥기도 하고.”
“소가주가 섭섭해하겠는데요.”
“어쩔 수 없지. 그게 사실이고. 그리고 이 자리에 있으면 한마디라도 제대로 하겠어?”
팽만철이 콧김을 내뿜었다.
후기지수들 사이에서나 목소리에 힘을 주지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있는 게 장남이었기에 팽만철은 아들만 믿고 침상에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 경험도 쌓게 해 주어야 성장하죠.”
“지금은 무공부터 단단하게 쌓는 게 먼저야. 적어도 염룡이나 은룡 정도는 되어야 자격이 있지.”
“그 말을 들으면 더 서운하겠는데요.”
“어쩔 거야? 그게 사실인데.”
팽만철은 당당했다.
아들의 앞에서도 똑같이 말해 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자 민망한 건 다른 이들이었다.
팽만철에게야 못난 장남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하북팽가의 소가주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분위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뜨겁네요.”
“당연하지. 다른 곳도 아니고 명문세가가 배신했는데.”
팽만철의 퉁방울만 한 두 눈이 상관보에게 향했다.
진득한 살의 때문인지 상관보는 눈을 감은 채로 몸을 떨었다.
살의 가득한 시선이 바늘처럼 전신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상관적은 아예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냉정을 유지하는 이가 소수이긴 하지.”
“장로들도 다 데려왔네요.”
상관세가의 일반 무사들은 반호진의 손에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었다.
그렇기에 지금 생포된 이들은 대부분 장로들이었다.
그마저도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상태도 썩 좋지 않았고.
“주둥이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제갈가주가 그걸 원하기도 했고.”
팽만철을 따라 반호진의 시선이 제갈문곡에게로 향했다.
늘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가 지금은 냉기가 풀풀 날리는 표정으로 상관보를 노려보고 있었다.
반호진과 일행을 공격하면서 제갈세가도 함께 노렸기에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살심이 큰 이가 바로 제갈문곡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갈아 마시고 싶을 지경이었으나 논의가 먼저였기에 참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상관보와 상관적을 제갈가주님께 양보하겠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대신 상관세가의 장로 다섯 명은 동생들 몫으로 주셨으면 합니다.”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갈문곡이 반호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반호진이 얼마나 큰 양보를 한 건지 잘 알아서였다.
두 부자에 비하면 장로 다섯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은 반호진의 일행들도 마찬가지였고.
“얼추 정리된 것 같으니 바로 심문에 들어갑시다. 알아낼 것이 많으니.”
지금껏 조용히 있던 당우혁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느릿한 발걸음으로 뻥 뚫려 있는 중앙으로 걸어갔다.
바로 상관보에게 다가가는 것이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후개라면 믿을 수 있지. 보기 불편하신 분들은 잠시 나가 계시구려.”
오중건이 조심스럽게 다가오자 당우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말이 심문이지 고문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에 미리 경고했다.
그러나 천막을 나가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스윽.
반호진도 팔짱을 끼고서 지켜봤다.
안 그래도 그 역시 궁금한 게 있어서였다.
당우혁도 마찬가지인 듯 몸을 낮춰서 무릎 꿇고 있는 상관보와 눈높이를 맞췄다.
“어이.”
“…….”
“아혈이 풀렸는데도 입을 안 열겠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스스로에게 좋지 않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을 텐데.”
“…….”
고저 없는 당우혁의 말에도 상관보는 묵묵부답이었다.
심지어 두 눈도 뜨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모습에 당우혁은 눈살을 찌푸리기는커녕 오히려 히죽 웃었다.
“아니면 내가 강하게 나오기를 내심 바라는 건가?”
스윽.
친구를 대하듯 친근한 목소리로 당우혁이 품속에서 자그마한 병을 꺼냈다.
옥으로 만든 듯한 병이었는데 그걸 꺼내는 순간 모두가 짐작했다.
저 옥병에 독이 들어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것도 아니면 이미 모든 걸 포기한 건가? 어차피 가문은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으니까?”
“…….”
이어지는 당우혁의 말에도 상관보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상관적의 두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말하고 싶어도 그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 아혈이 풀리지 않아서였다.
“체념이라. 나쁘지 않지. 단전도 전폐되었으니 무인으로서의 생명도 끝났고.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런데 본가에 남아 있는 가솔들은 생각하지 않나 봐?”
“……편안히, 보내 주시오.”
처음으로 상관보의 입이 열렸다.
바짝 마른 입술처럼 탁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그러나 그 말에 당우혁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지금의 말이 얼마나 과한 부탁인지 알고 있지?”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그건 모르지. 몇몇은 알고 있을 수도 있고, 모른 척을 할 수도 있고.”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만이라도 부탁하오.”
“염치가 없네. 끝까지 욕심을 부리는 걸 보면.”
당우혁은 헛웃음을 흘렸다.
당당해도 이렇게 당당할 수가 없어서였다.
마혈을 점혈당했기에 납작 엎드리지는 못하더라도 태도만은 달라야 했다.
한데 상관보는 죄인답지 않게 너무나 당당하게 요구했다.
“나에게 원하는 게 있지 않소이까?”
“맞아. 정확하게는 네놈을 지켜보는 모두가. 크게 두 가지 정도 있지.”
“협조하는 대가로 부탁드리겠소.”
“이거 감을 잃은 모양이야. 하긴 천하의 상관세가주가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봤을까.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 근데 말이지, 처지가 달라졌으면 생각도 달라져야지. 안 그래?”
꾸욱!
당우혁의 가죽신이 상관보의 허벅지를 눌렀다.
진기를 싣지는 않았다고 해도 절대고수의 몸은 범인들과 완전히 달랐다.
더구나 상관보는 무공을 잃은 상태였기에 얼굴이 고통으로 벌겋게 변하며 일그러졌다.
“크흑!”
“한낱 죄인 주제에 어디서 거래를 하려고 그래? 네놈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딱 한 가지뿐이야. 고분고분하게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고 편히 죽든지, 아니면 온갖 고통을 다 겪은 후 정신이 망가져서 죽든지. 아, 물론 너의 선택에 따라 아들과 장로들의 미래도 달라질 거야.”
“가, 가솔들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넌 거래를 할 자격이 없다니까.”
뿌드득!
당우혁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허벅지뼈가 부러졌다.
동시에 상관보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우혁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상관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 아량을……!”
“배신한 가문의 말로를 아는 사람이 왜 이러실까.”
“약속해 준다면, 다 말하겠소이다.”
“글쎄. 굳이 거래하지 않아도 나는 알아낼 자신이 있는데.”
뿅!
꺼내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았던 옥병의 뚜껑을 당우혁이 열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상관보의 어깨에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치이이익!
“끄으읍!”
물처럼 투명한 한 방울이 어깨에 닿는 순간 상관보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고통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치이익!
그리고 그 고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새하얀 연기와 함께 피부와 근육은 물론이고 뼈까지 녹여 버렸다.
그러나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상관보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혈을 점혈당했기에 몸부림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독은 아니니까. 다만 조금 많이 고통스러울 뿐이지. 참고로 양은 넉넉해. 내가 일부러 많이 챙겨 왔거든.”
당우혁이 친절하게 말했으나 아쉽게도 그의 말은 상관보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고통으로 인해 들리지 않아서였다.
대신 처절한 신음 소리만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덜덜덜!
그 소리에 바로 옆에 무릎 꿇고 있던 상관적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친의 신음 소리에서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지 느낄 수 있어서였다.
다음 차례는 자신이 분명했기에 상관적은 공포에 휩싸인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으으으……!”
“벌써 기절하면 실망인데. 배신자의 각오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당우혁이 진심으로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는 것도 아닌데 너무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아서였다.
그것도 당대의 십대세가 중 한 곳인 상관세가의 수장이 말이다.
“배신은 했어도 명문세가 출신다운 면모를 보여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소가주?”
움찔!
실눈을 떴던 상관적이 화들짝 놀랐다.
서늘한 당우혁의 눈빛이 자신에게 향해서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상관적은 담현과 운상, 연정을 바라봤다.
소림사와 무당파, 아미파라면 최소한의 인정을 베풀어 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미타불.”
“원시천존.”
하지만 상관적의 간절한 눈빛을 세 사람은 외면했다.
배신자에게 베풀 인정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특히 담현의 경우 반호진을 노렸었기에 더더욱 냉정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가 보여 주지 못한 모습을 자네가 보여 주었으면 하는데 말이지.”
“으읍!”
“아,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가겠다고? 상관세가의 후계자로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상관적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당우혁이 꺼내서였다.
하나 말하고 싶어도 아혈을 점혈당했기에 상관적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치이이익!
상관적의 두 눈에 옥병에서 흘러나와 유유히 떨어져 내리는 한 방울이 잡혔다.
이윽고 허공을 가르며 떨어진 한 방울은 그의 무릎에 닿았다.
“우으읍!”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드는 어마어마한 고통에 상관적의 눈이 돌아갔다.
흰자위만 드러내며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그러나 고통은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자, 어디 한번 말해 봐.”
“무엇을,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적아!”
고통에 몸부림치던 상관적이 잠시 후 정신을 차리자 당우혁은 아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조금 먼저 정신을 차린 상관보가 입을 열었다.
지금 원하는 대로 해 주면 단물만 쏙 빼 먹히고 버림을 받을 게 분명하기에 상관보는 어떻게든 상관적을 말리려 했다.
“거참 시끄럽네. 아들이 할 말이 있다는데. 아빠로서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제가 알고 있는 걸 다 말하면, 편하게 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와 부친은 힘들어.”
“으음!”
상관적이 침음을 흘렸다.
어째서 자신이 힘들다고 하는지 이유를 알아서였다.
당우혁이 친절히 제갈문곡을 슬쩍 쳐다봤기에 상관적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게 죄를 짓지 말지 그랬어. 아니면 성공해서 도주라도 하던가.”
약 올리는 듯한 당우혁의 말에 상관적은 두 눈을 감았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그는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른 분들은, 그리고 가솔들은 편히 보내 준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자네가 얼마나 협조적으로 나오는지에 따라 다르겠지?”
“그만해라! 넘어가지 마……!”
상관보가 입을 벌린 채로 굳어졌다.
다시 아혈을 짚은 것이었다.
“자, 그럼 다시 대화를 이어 가 볼까?”
“무엇을 알고 싶으십니까?”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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