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9장. 반전에 반전. -03
“응? 아는 게 있어?”
“그건 아니고요. 백오십 살일 수도 있다는 거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난 또 뭐라고.”
팽만철이 입맛을 다셨다.
살방주와 잔살방주를 생포했기에 혹 알아낸 게 있나 싶어서였다.
“그럼 납득이 얼추 되지 않습니까? 수명이야 각기 다르기도 하고.”
“뭐, 백오십 년을 못 산다고 장담하기도 힘드니까. 아주 아주 드물기도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고. 다만 좀 께름칙한 게 있어서 그렇지.”
팽만철의 미간이 좁혀졌다.
분명 사사혈천교주는 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건 아니었다.
공력은 분명히 무지막지 했지만 묘하게 절대적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직 밝혀진 게 거의 없지 않습니까. 사사혈천교라는 세력을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암약하고 있는 세력이 한둘이겠느냐. 지금 이 순간에도 정체를 숨기고 힘을 키우고 있는 이들이 제법 많을 게다. 당장 천사맹과 마도련만 봐도 그렇고.”
“그렇죠. 근데 당분간 걱정은 내려놓고 요양에 집중하세요. 아직 돌아가시기에는 이릅니다.”
“내가 언제 죽는다고 했느냐!”
팽만철이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중상자 취급은 그쪽에서 거절이었다.
부상을 당한 건 사실이나 싸우지 못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제가 죽을 거라고 했습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한 거죠.”
“그게 그거지!”
“엄연히 다릅니다. 그리고 소가주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차기 가주가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할 기회요.”
“흐음.”
이번 말은 솔깃한 모양인지 팽만철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세 속에서 영웅이 태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내가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건 무리야. 네가 너무 많이 컸어. 따라잡는 것도 차이가 어느 정도여야지. 너도 나쁜 놈이야. 네 말이 현실성이 있다고 하는 거야?”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했는데 다른 이라고 못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말은 진짜 얄밉게 잘해.”
팽만철이 콧김을 내뿜었다.
따지고 싶은데 당사자가 일례이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불만을 표시하는 것밖에는.
“저는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는데요. 정상은 고독하지 않습니까.”
“퍽이나 네가 외로움을 느끼겠다.”
“티가 많이 났습니까?”
“어. 아주 팍팍. 그리고 넌 막상 호적수가 나타나도 딱히 신경 안 쓸 거잖아. 난 나의 길을 갈 테니 넌 너의 길이나 가라고 말할 위인이 너야.”
“이거 저를 너무 잘 아시는 것 같은데요.”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아는 듯해서였다.
“아마 호적수가 나타나면 모든 걸 떠넘기고 혼자 유유자적하게 살겠지.”
“오호.”
“아니야?”
“모르지요. 그건 그때 가 봐야 아는 거니까요. 근데 상상만 해도 즐겁기는 하는군요.”
반호진이 보기 드물게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말한 대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졌기 때문이다.
“쯧쯧! 중원무림을 위해 큰일을 해야 하는 녀석이.”
“이미 충분히 한 것 같습니다만.”
“꼭 그렇게 말해야 속이 편해?”
“사실이니까요.”
“에잉!”
이번에도 완패를 한 팽만철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하지는 않았다.
“팽가주님이 보시기에는 어떠셨습니까?”
“뭐가?”
“사사혈천교주요.”
“조금 수상하기는 했지. 나를 죽일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니까. 물론 내가 순순히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지만 분명한 건 사사혈천교주에게 몇 번의 기회가 있었어.”
팽만철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안 그래도 그 역시 그 부분에 대해서 찝찝함을 느끼고 있어서였다.
뒷간을 다녀왔는데 이상하게 엉덩이를 덜 닦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역시 팽가주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너도 봤구만?”
“예. 다행히 여유가 조금 있어서요.”
“조금은 무슨. 잔살방주를 아주 두들겨 팼던데. 들리는 말로는 가지고 놀았다던데?”
“그 정도는 아닙니다.”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설사 맞다고 해도 인정할 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부정했다.
“아니기는. 그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던데. 그보다 사사혈천교주라는 놈, 아주 수상해. 관상만 봐도 속에 구렁이가 수십 마리는 있을 법한 얼굴이야. 강한 놈이 음흉하기까지 하니 아주 큰 위협이 될 거야.”
“천사맹주에 가장 근접해 있는 인물이니까요. 어쨌든 세 사람의 의견이 같네요.”
“남궁가주도 느꼈을 테지.”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사혈천교주는 강했다.
그가 전력으로 달려들었음에도 여유가 있을 정도로 말이다.
팽만철은 그때를 떠올리며 붕대가 잔뜩 감겨 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더라고요.”
“너도 조심해라. 살방주에 이어 잔살방주까지 사로잡았으니 아마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을 거다.”
“살방주와 잔살방주가 아니었어도 요주의 인물이었겠죠.”
“뭐, 그건 맞지. 근데 이번 일로 더더욱 예의주시할 거다. 아마 분명히 너를 제거하려고 할 거야. 사도무림과 마도무림을 위해서 말이지. 싹수가 보이는 건 무조건 짓밟으려 하는 게 악독한 놈들의 심성이니까.”
“그건 모두 똑같지 않습니까.”
반호진이 담담히 말했다.
악의는 사파인과 마도인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백도무림 역시 똑같았다.
이미 반호진 역시 겪어 보기도 했고.
“……그렇지.”
그리고 그 사실을 팽만철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팽만철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미안해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북팽가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으니까요.”
“그럼 호감만 있다고 생각해도 되냐?”
“그건 아니죠.”
“매정한 놈.”
“푹 쉬세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반호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자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고 있는 건 좋지 않아서였다.
멀쩡해 보인다고 해서 진짜 괜찮은 게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용건을 다 보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좀 더 있어도 되는데?”
“얼른 회복하셔야 또 싸우실 거 아닙니까. 다 정천맹을 위해서입니다.”
“말을 해도 참 매정하게 한단 말이지.”
“사실이니까요. 그럼 쉬십시오.”
“그래.”
여지를 두지 않겠다는 듯이 반호진이 말하자 팽만철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조금 힘든 상태이기도 했고.
강골이라고 해서 고통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팽만철은 반호진이 나가자 침상에 편히 누웠다.
하지만 두 아들들을 떠올리자 좀처럼 잠이 들 수가 없었다.
***
초겨울이라는 걸 알려 주듯 뺨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그러나 반호진은 한기를 느낄 새가 없었다.
오후가 되기 무섭게 천사맹과 마도련이 다시 달려들어서였다.
“형님도 조금 이상하시죠?”
“응. 아무리 사파인이라고 하나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오히려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교활하다고 보는 게 맞지. 근데 이런 선택이라니.”
“상식적이지 않기는 해요.”
사마의성이 크게 동조했다.
아무리 봐도 천사맹의 행보가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살방의 자리를 무영각으로 채웠다고 하나 여섯 개의 자리 중 한 자리가 여전히 공석이었다.
반면에 마도련의 피해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한데도 천사맹은 적극적으로 전쟁에 임했다.
보통은 어떻게 해서든 마도련의 힘을 깎으려고 노력할 텐데 천사맹은 달랐다.
그렇다고 살방이나 잔살방의 복수를 위해 달려드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명분을 위해서인가.”
“그게 현실적으로는 가장 유력한 것 같아요.”
“아니면 자신이 있거나.”
반호진의 시선이 하북팽가가 담당하는 전선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가주인 팽만철이 없는 만큼 걱정이 되어서였다.
팽만철을 대신해서 장로들이 고군분투하고 있기는 하나 가주의 빈자리를 채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팽만철의 공백은 다른 곳에서도 느껴졌다.
‘완연한 겨울이 되기 전에 끝내려는 건가.’
천하사패와 달리 사도육주나 마도십문에 대해서는 반호진도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알지 못하기에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길을 열어라!”
“저곳이다!”
그때 두 방향에서 갑작스러운 병력 이동이 있었다.
다른 곳에 자리 잡고 있던 병력이 일제히 정천맹의 중앙 쪽으로 달려들었던 것이다.
물론 중앙을 공략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공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두 세력 다 정중앙이 아니라 살짝 치우친 곳을 향해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반호진이 있는 곳을 향해서.
“으음!”
그 광경에 근처에 있던 제갈문곡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순히 병력 이동만 보고서 두 세력이 무엇을 노리는지 그는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역시나 이렇게 나오는 건가.’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어제 된통 당했으니 이렇게 나오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아서였다.
단지 예상했던 것보다 결단이 빨랐기에 제갈문곡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천사맹과 마도련이 저렇게 나온다면 정천맹 역시 그에 맞추어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우리는 최대한 길을 만들어 준다!”
“다른 녀석들이 끼어들지 않게 만들어!”
하지만 천사맹과 마도련은 그런 제갈문곡의 대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더욱 격렬하게 날뛰었다.
제갈문곡이 여유 병력을 끌어모으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것이다.
수적으로 유리한 이점을 마도련과 천사맹은 십분 활용했다.
“거기 가만히 있어라!”
“오늘은 반드시 네 목을 따 주마!”
아군이 만들어 준 길을 귀령문(鬼靈門)과 흑랑문(黑狼門)이 무서운 속도로 가로질렀다.
혹시라도 반호진이 도주할까 싶어 전력질주하는 것이었다.
그중 귀령문의 속도가 무시무시했다.
천사맹의 무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경신술을 지닌 문파답게 귀령문의 진격 속도는 흑랑문보다 배는 빨랐다.
“적들을 막아라!”
마치 유령처럼 날 듯이 달려오는 귀령문의 모습에 소림사의 장로 중 한 명인 담공이 사자후를 터트리듯 소리쳤다.
귀령문의 목표가 너무나 명확하기에 진격을 막기 위해 소리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소림사의 무승들은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천사맹의 무인들이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기세로 끈질기게 매달려서였다.
“이, 이런……!”
그 모습에 담공은 물론이고 장로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끈덕지게 매달리는 적들을 좀처럼 떨쳐 낼 수가 없어서였다.
게다가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사사혈천교가 소림사를 깊게 끌어들였기에 돌아가야 하는 거리가 상당해져 있었다.
그렇다고 일대제자들을 보내 봤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담공은 진퇴양난에 빠졌다.
“포기해. 신룡은 오늘 이곳에서 죽을 테니까.”
“입 다물거라!”
“싫은데?”
이죽거리는 사사혈천교의 장로를 향해 담공이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비릿한 미소는 더욱더 짙어져 갔다.
담공이 초조해할수록 그에게는 이득이어서였다.
두두두두!
“조금만 기다리시오!”
“음?”
한 명도 아니고 네댓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기에 강제로 붙들려 있던 담공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더불어 후방에서 반호진을 향해 달려가는 꽤 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상관세가?”
어떻게든 적들을 떨쳐 내고 반호진에게 가려던 담공의 두 눈에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바로 상관세가의 병력이었다.
가주인 상관보가 부하들을 이끌고 반호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데 담공의 표정이 께름칙했다.
반기는 제갈세가의 무인들과 달리 담공은 딱히 반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불안한 눈으로 상관보와 상관적을 바라봤다.
“한눈을 팔 때가 아닐 텐데!”
“신룡과 같이 죽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언제 적 별호를 말하는 것이냐! 신룡이 아니라 소림검신이다!”
양쪽에서 파고드는 공격에 담공이 버럭 소리쳤다.
계속 신룡이라고 부르자 짜증이 치솟은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담공은 반호진을 힐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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