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330화 (330/468)

제 109장. 반전에 반전. -02

사사혈천교주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에는 십대마문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천사맹에서 자중지란이 벌어지더라도 마도련 입장에서는 아쉬울 게 없었다.

정천맹이라는 공공의 적이 사라지면 중원무림의 패권을 놓고 싸워야 하는 게 바로 천사맹과 마도련이었다.

그렇기에 마도련의 입장에서는 천사맹의 힘이 약해지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없었다.

물론 너무 약해지면 안 되었기에 심각한 상황이 되면 나서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지켜보기만 할 터였다.

‘교활한 것들.’

사파인보다 더 사파인 같은 행동에 사사혈천교주의 눈빛이 창졸간에 번뜩였다.

그러나 그걸 알아차린 이는 없었다.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말이지.’

사사혈천교주의 눈매가 살짝 꿈틀거렸다.

상대적으로 천사맹에 비해 마도련의 피해가 미비한 만큼 균형을 맞출 필요성이 있었다.

가능하다면 마도련이 큰 피해를 입으면 더더욱 좋았고.

‘아마 마도련주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사사혈천교주의 시선이 마도련주에게로 향했다.

대외적으로 천사맹주와 마도련주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미 힘으로 결정이 난 상태였다.

‘그러니 더더욱 마도련의 힘을 약화시켜야 해.’

현재 천사맹과 마도련의 동맹은 오월동주나 마찬가지였다.

정천맹이 무너지는 순간 동맹은 끝날 것이고 천사맹과 마도련은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눌 것이었다.

그걸 사사혈천교주도 알고 마도련주도 알았다.

“이제 그만 싸우세요. 그 정도 싸웠으면 충분하지 않아요?”

“환요궁주!”

“큰소리치지 말아요. 나는 목소리 낼 줄 몰라서 이렇게 점잖게 말하는 줄 알아요?”

환요궁주의 뾰족한 음성이 회의장을 갈랐다.

여자 특유의 날카로운 고음이 천막을 찢어 버릴 듯이 뿜어져 나오자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던 구룡문주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자신이 가만히 있던 환요궁주에게 짜증을 냈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크흠! 흠!”

“우리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 보자고요. 그러자고 이 자리를 만든 거 아니에요?”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구룡문주를 일별한 환요궁주가 십대마문을 제외하고서 네 명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비어 있는 잔살방주의 자리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잔살방주가 그렇게 허무하게 당할 줄이야.”

“그 사람의 패착이었어요. 아무리 과대평가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된 이유가 있는 것인데 너무 무식하게 행동했어요.”

“자업자득이다?”

“자업자득에 더해 우리에게 피해까지 주었죠. 죽어도 싸요.”

“아직 안 죽었다고 하던데.”

“죽는 게 우리를 도와주는 건데.”

환요궁주의 중얼거림에 무영각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티를 내지 않았을 뿐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다.

“살방주에 이어 잔살방주까지 사로잡히다니. 이것 참.”

백귀전(百龜殿)의 전주가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어서였다.

평범한 사도문파라면 모를까 살방과 잔살방은 사도육주 중 두 곳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새파랗게 어린 반호진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이 백귀전주는 거슬렸다.

“복수도 복수지만 그 녀석, 위험해요. 약관에 이 정도면 이립에는 얼마나 커 있을지.”

“그러니까 확실하게 죽여야지. 더 크지 못하도록.”

“구룡문주께서는 자신 있으세요? 살방주와 잔살방주가 당했는데?”

“살방주는 살수이지 않나. 살수는 무인과 달리 엄연히 한계가 있지.”

명백히 자신보다 아래라고 말하는 구룡문주의 모습에 환요궁주가 무영각주를 힐끔거렸다.

무너진 살방을 대신해서 사도육주의 빈자리를 차지한 게 바로 무영각주였기 때문이다.

또한 살방과 마찬가지로 무영각(無影閣) 역시 살수문파였기에 환요궁주는 유일하게 드러난 무영각주의 두 눈을 살폈는데 딱히 변화가 없었다.

구룡문주의 발언에도 살수답게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잔살방주는 살수가 아니었는데요?”

“미치광이가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있나. 주변을 보지 못하고 생각이 짧으니 그 모양 그 꼴이 된 게지.”

“그럼 자신 있다는 뜻이시네요?”

“당연하지 않나. 나는 살방주나 잔살방주와는 달라.”

“그러다가 사로잡히면요?”

구룡문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분 나쁜 기색을 온 얼굴로 드러냈다.

그러나 구룡문주의 표정에도 환요궁주는 생글거렸다.

“장담컨대 그런 일은 없다.”

“살방주도, 잔살방주도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결과가 어떻던가요?”

“크흠!”

구룡문주가 불편한 기색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누구도 그의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구룡문주님의 심기를 건드리려는 게 아니에요. 현실을 보자는 거죠. 우리의 평가와 달리 소림검신은 애송이가 아니에요. 한 번은 운이 따를 수도 있지만 그게 두 번이 된다면 운이 아니라 실력이죠. 즉, 소림검신의 실력이 알려진 대로라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힘을 합쳐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어요?”

환요궁주의 시선이 구룡문주를 지나 백귀전주, 무영각주, 마지막으로 사사혈천교주에게 닿았다.

특히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홀로 차만 들이켜고 있는 사사혈천교주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말은 다 같이 대책을 강구하자고 했지만 실제로는 사사혈천교주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천사맹주라면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하라고 말이다.

“후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인물이기는 하지.”

“문제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맹주님.”

“찾아봐야지. 방법은 언제나 있으나 문제는 그걸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 아니겠나. 그리고 혼자서는 힘들지만 이렇게 모두가 머리를 맞댄다면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사사혈천교주의 시선이 마도련 쪽으로 움직였다.

더는 침묵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회의에 참여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확실히 거슬리기는 해.”

“아주 큰 장애물이지.”

사사혈천교주의 압박에 입을 다물고 있던 십대마문의 수장들이 하나둘 입을 열었다.

하지만 딱히 다른 내용은 없었다.

사도육주의 의견과 살짝 다를 뿐 거의 비슷했다.

‘소림검신이라.’

무의미한 대화만 반복하는 회의를 지켜보며 사사혈천교주가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칼이라고 해서 꼭 위험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자신에게 이롭게 사용할 수 있기에 사사혈천교주는 묘한 눈빛으로 사도육주와 마도십문의 수장들을 은밀히 바라봤다.

***

저벅저벅.

거침없이 걸어가던 반호진이 이내 한 천막 앞에 멈춰 섰다.

우람한 체격을 지닌 거한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반호진이 다가오는 걸 보자마자 고개를 꾸벅 숙인 후 옆으로 비켜섰다.

반호진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들어가시지요. 가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직접 천막까지 열어 주는 거한에게 반호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그대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반호진의 눈에 거대한 침상에 누워 있는 팽만철의 모습이 들어왔다.

“왔느냐?”

“꼴이 말이 아니네요.”

“놀리려고 온 거냐?”

팽만철이 코를 찡그렸다.

말투만 보면 절대 병문안을 온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럴 리가요. 엄연히 병문안을 온 겁니다만.”

“그런 놈이 빈손으로 와?”

“그렇다고 꽃을 가져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끄응!”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팽만철은 앓는 소리를 냈다.

만약 반호진이 꽃을 가져왔으면 그는 진심으로 노발대발했을 터였다.

남자끼리 무슨 꽃이냐고 말이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멀쩡해.”

“……진심으로 하시는 말입니까?”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알아. 조금 긁히기는 했는데 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나아. 근데 애들이 쓸데없이 심각하게 반응한 거야. 금창약을 발랐으니 더 빨리 낫겠지.”

반호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허세가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조금 긁혔다고 하기에는 출혈이 상당해 보이는데요.”

“긁혔으니까 피가 나는 건 당연하지. 나는 뭐 사람 아니더냐?”

“사람인 건 맞습니다만.”

“팔다리가 잘린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양호하지. 전쟁을 치르면서 다치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느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묘하게 신빙성이 있는 말에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면서 새삼스러운 눈으로 팽만철을 바라봤다.

이렇게 조리 있게 말하는 게 처음이었기에 신기해서였다.

“그 눈빛 뭐야? 아주 불쾌한데?”

“걱정 어린 눈빛입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런 사람이 아닌데 말이지.”

“뭐라고?!”

팽만철의 목소리가 천막 안에서 쩌렁쩌렁 울렸다.

부상을 당했음에도 여전한 목청에 반호진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목청은 여전하시네요.”

“말했잖아. 나 멀쩡하다고!”

“그래서 계속 싸우시겠다고요?”

“당연하지! 사내대장부는 다쳤다고 물러나지 않는다! 또한 하북팽가의 가주는 죽으면 죽었지 전장을 피하지 않지!”

“그러다가 진짜 죽어요.”

반호진이 냉정하게 말했다.

분명 팽만철은 절대고수였다.

무림십왕 중 한 명이며 도왕이 그였다.

그러나 세상은 넓었고 팽만철보다 강한 무인은 있었다.

“전장에서 죽는다면 그게 내 운명이겠지. 오대세가의 한 곳인 하북팽가의 수장으로서 피하면 안 되는 의무라는 게 있거든.”

“미련한 선택보다는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건 나 말고 할 사람이 있잖아. 근데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거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랬고, 조상님들이 그러셨지. 그러니까 이제는 내 차례다.”

팽만철이 단호하게 말했다.

사지라고 해서 피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듯이.

그런 의지가 가득 담긴 팽만철의 눈빛에 반호진이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게 하북팽가의 의지군요.”

“맞아. 앞으로 내 자식이 이어 갈 의지이기도 하고. 후대도 있으니 걱정도 없지. 내가 괜히 자식을 많이 낳은 게 아니거든.”

“말이 왜 또 그렇게 갑니까? 그리고 그게 사람의 의지대로 되는 게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일단 노력하면 다 되게 되어 있어. 해 보지도 않은 것들이 꼭 약한 소리를 하지. 에잉!”

“노력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반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일정 부분은 동의하지만 전부 다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서였다.

당장 무공만 하더라도 노력과 결과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능성을 최대한 높여야지. 명문세가들이 괜히 부인을 여러 명 두는 게 아니거든.”

팽만철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명백하게 의도를 가지고 말이다.

그리고 그 의도를 반호진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혹시나 반호진이 한 명하고만 혼인할까 싶어 밑밥을 까는 것이었다.

“쌍둥이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확률적으로 힘들잖아.”

“말씀 잘하셨네요. 노력해도 쌍둥이를 만드는 건 힘들지 않습니까.”

“흥! 진짜 한마디도 안 진다니까.”

팽만철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만의 방식으로 패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사사혈천교주는 어땠습니까?”

“……인정하기 싫지만, 강해. 더러울 정도로. 늙은이가 특히 공력이 엄청나게 심후해.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래 보이기는 하더라고요.”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막대한 공력이요?”

반호진의 말에 팽만철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아서였다.

아마 이건 그를 구하러 왔다가 사사혈천교주와 싸운 남궁호도 같은 생각일 터였다.

“한 백오십 년 정도 묵은 노괴라면 모를까.”

“그럴 수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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