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8장. 일진일퇴(一進一退). -03
언제 적 별호를 외치는 잔살방주의 모습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다른 일행들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도 잠시 일행들은 하나같이 노기 어린 표정으로 잔살방주를 노려봤다.
어째서 저런 얼토당토않는 말을 지껄이는지 잘 알아서였다.
“저 새끼가……!”
그중 서조운이 가장 크게 흥분했다.
반호진을 부모님 못지않게 생각했기에 서조운은 두 눈 가득 살기를 담고서 잔살방주를 노려봤다.
“흥분할 것 없다. 너는 네가 할 일만 하면 돼. 어떻게 보면 이 또한 기회이니까.”
“잔살방을 싹 쓸어버릴 기회 말이지?”
“맞아. 알아서 와 주잖아? 번거롭지 않게.”
“하하하!”
남궁세가의 무인들조차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음에도 반호진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그러나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조금 떨어져 있는 제갈세가의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였다면 모를까 반호진은 충분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잔챙이들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형님께 방해가 되지 않게 제가 정리할게요.”
“너 혼자서 가능하겠어? 내가 좀 보태 줘야지.”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뭐야?”
반호진의 자신감이 번지기라도 한 것처럼 서조운과 모용척이 티격태격했다.
그런 둘의 모습에 잠시 실소를 흘린 반호진은 사마의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 있지?”
“네. 저도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거든요. 혼자도 아니고요.”
반호진의 시선에 사마의성이 다부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사마의성을 호위하듯 서 있던 다섯 명의 무인들이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가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눈빛에 반호진이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록 무공은 다른 이들에 비해 부족할지 모르나 각오만큼은 그 누구보다 단단했다.
그리고 때론 이런 각오가 기적을 만들기도 했다.
간절한 마음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반호진은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게 만들 자신도 있었다.
“좋아. 그럼 사냥을 시작해 볼까.”
반호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소천검의 손잡이를 잡아 갔다.
잔살방주는 자신이 사냥을 하러 온다고 생각하겠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사냥은 포식자가 하는 것이지 피식자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스윽.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잔살방을 응시하며 반호진이 느릿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런데 가벼운 검놀림으로 인해 벌어진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콰콰콰쾅!
소천검의 검극에서 뿜어져 나간 예리한 무형지기는 삽시간에 잔살방도들을 덮쳤다.
중간에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끼치지 않은 채 오직 잔살방도들만 갈랐다.
“꺼억!”
“케에엑!”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검기에 잔살방주와 함께 달려들던 잔살방도들이 피를 쏟아 내며 쓰러졌다.
재수 없게 목이 베인 이들은 즉사했고,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중상을 입었다.
팔이나 다리가 잘린 이들도 수두룩했다.
반응이 늦었기에 검강도 아니고 검기였음에도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감히!”
“당한 놈이 병신이지. 전장에서 방심이라니.”
순식간에 수십 명이 죽거나 나자빠지자 잔살방주가 노성을 터트렸다.
하지만 살의 가득한 잔살방주의 포효에도 반호진은 이죽거렸다.
충분히 막을 수 있음에도 당했다면 그건 본인의 잘못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곳은 전장인 만큼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데 그에 따른 대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잘못이었다.
“갈가리 찢어 죽여 주마!”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근데, 할 수 있을까?”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반호진의 모습에 잔살방주의 신형이 사라졌다.
극성에 다다른 이형환위였다.
게다가 초월경의 고수라는 걸 증명하듯 잔살방주는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에 가까운 놀라운 경신술까지 보여 주며 창졸간에 반호진의 앞에 나타났다.
중간에 껴 있던 제갈세가의 무인들을 단숨에 건너뛰고 반호진의 코앞에 도달한 것이었다.
쌔애액!
동시에 그의 양손에 들려 있던 두 자루의 낫이 매서운 파공성을 터트리며 반호진의 두 다리를 노렸다.
이미 많은 이들을 베어 넘겼다는 듯이 시뻘건 피를 잔뜩 머금고 있었는데 그 의도가 명백했다.
꼽추인 자신에 비해 헌칠한 반호진의 키를 자신과 비슷하게 만들겠다는 듯이 정확히 두 무릎을 노리고서 파고들었다.
단숨에 양쪽 다리를 잘라 내겠다는 뜻이었다.
부웅!
그러나 두 자루의 낫은 안타깝게도 허공을 갈랐다.
잔살방주의 의도를 한눈에 알아차린 반호진이 가볍게 몸을 띄우는 것으로 피해 낸 것이다.
“걸렸다!”
한데 애병인 쌍겸(雙鎌)이 허공을 갈랐음에도 잔살방주는 히죽 웃었다.
공격에는 실패했으나 반호진이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서였다.
“걸리긴.”
반호진의 움직임을 예상했다는 듯이 쌍겸이 다시 한번 맹렬한 기세로 쇄도했다.
그뿐만 아니라 피를 닮은 새빨간 겸강이 길게 솟구치며 반호진을 난자할 기세로 뿜어졌다.
하지만 거대한 겸강에도 반호진은 여유로웠다.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기에 피하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그는 달랐다.
스스슥!
허공이라고 해서 움직임에 제한받지 않기에 반호진은 유유히 허공답보를 펼치며 잔살방주의 겸강을 피해 냈다.
굳이 받아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검은 휘두르지도 않았다.
“이놈이!”
그걸 잔살방주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가뜩이나 주름 많은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쌍겸을 휘둘렀다.
츠츠츠츠!
어깨에서 시작된 흔들림이 손끝으로 이어지며 두 줄기의 거대한 겸강이 찢어졌다.
마치 거미줄처럼 순식간에 사방을 잠식하더니 그대로 반호진을 덮쳤다.
아예 경신술을 펼칠 공간 자체를 장악한 것이었다.
“잔술수는 말 그대로 잔술수일 뿐이지.”
“갈가리 찢어발겨 주마!”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반호진의 표정을 보며 잔살방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저 여유가 얼마 가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일견에는 강기로 이루어진 평범한 겸강처럼 보이겠으나 실상은 달랐다.
절정고수가 펼치는 강기와 초월경에 이른 무인이 뿌리는 강기는 엄연히 달랐다.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위력이 비슷할 리 만무했다.
지금 그가 뿌린 겸강은 강기가 극도로 압축된 강환조차도 찢어 버릴 정도로 강력했기에 얕잡아 본다면 큰코다칠 터였다.
스윽.
빠져나갈 구석은 전혀 없다는 듯이 촘촘하게 이루어진 강기망이 빠르게 공간을 좁혀 왔다.
설상가상으로 좁혀질수록 강기망의 구멍들이 더욱더 작아졌다.
강기망이 조여 올수록 틈 역시 덩달아 좁아지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반호진은 허공에 두둥실 떠 있는 채로 소천검을 느릿하게 찍어 눌렀다.
퉁.
이윽고 검기 하나 실리지 않은 소천검의 검극이 잔살방주가 펼친 강기망에 닿았다.
한데 놀랍게도 소천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강환조차 우습게 갈라 버리는 잔살방주의 강기망에 닿고도 멀쩡했다.
아니, 놀랍게도 조여 오는 강기망을 막았다.
“이 정도로?”
“무, 무슨!”
여전히 왼팔은 뒷짐을 진 채로 검극만 뻗어서 강기망을 막아 낸 반호진의 모습에 잔살방주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아직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르나 봐? 아니면 믿고 싶지 않은 건가?”
“이익!”
너무나 편안한 얼굴로 입을 여는 반호진의 모습에 잔살방주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그와 동시에 단전의 공력을 모조리 끌어올렸다.
힘이 부족해서 막힌다면 더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반호진이 대단한 무인이라고 하나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인 만큼 오랜 세월 동안 공력을 쌓아 온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밀어붙인다! 단숨에 갈기갈기 조각내는 거야!’
어금니를 악문 잔살방주가 강기망에 전력을 쏟아부었다.
그래서인지 막혀서 꼼짝도 하지 않던 강기망이 꿈틀거렸다.
가일층 끌어올린 공력에 힘을 받은 것이었다.
“어림없어.”
웅웅웅.
저항하듯 전체적으로 꿈틀거리는 강기망을 응시하며 반호진이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소천검의 검신에 은은한 금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무상대능력을 개량해서 새로이 만든 무상신공의 기운이 소천검에 집중된 것이었다.
쩌저저적!
미약한 검명과 달리 소천검에서 흘러나온 금광의 힘은 잔혹했다.
잔살방주의 강기망을 단숨에 조각조각 찢어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일부러 보여 주겠다는 듯이 소천검에서 흘러나온 금광은 천천히 핏빛 강기망을 물들였다.
그러고는 그대로 갈가리 찢어 버렸다.
순수하게 힘으로 강기망을 박살 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잔살방주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안 되긴. 이미 다 됐는데.”
가볍게 강기망을 파괴한 반호진이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 단순한 움직임에 잔살방주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흔하디흔한 검기 하나 서리지 않았음에도 왠지 모르게 전신의 솜털이 전부 다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뒈져라!”
그러나 잔살방주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반호진보다 약하다는 걸 뜻했기에 잔살방주는 모든 힘을 끌어올리고서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쌔애애액!
쌍겸에서 솟구친 두 줄기의 겸강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반호진의 목과 허리를 노렸다.
둘 중 하나라도 절단 내겠다는 의지가 잔뜩 서린 일격이었다.
그것도 양쪽에서 파고들었기에 피하기가 상당히 난감했다.
“슬슬 느낄 때도 된 것 같은데. 아니면 애써 부정하는 건가?”
“닥치고 죽어!”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허공답보를 펼치며 내달리던 잔살방주가 소리쳤다.
진득한 살기가 가득 서린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직접 느끼게 해 줄 수밖에.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을.”
“흥!”
여유만만한 반호진의 중얼거림에 잔살방주는 콧김으로 응수했다.
그사이 잔살방주의 겸강은 어느새 반호진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끝났다!’
겸강이 흑의무복에 닿기 직전임에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반호진의 모습에 잔살방주의 눈이 희번덕였다.
방심 어쩌구 저쩌구 했던 반호진이 정작 방심으로 당할 게 뻔해서였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광경에 잔살방주는 확신했다.
이번 공격으로 반호진의 몸뚱이가 삼등분 되리라고 말이다.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지.”
끄그그극!
환희에 찼던 잔살방주의 얼굴이 멍해졌다.
두꺼운 강철조차 종잇장처럼 벨 수 있는 그의 겸강이 반호진의 흑의무복에 닿을락 말락 한 상태에서 꼼짝도 하지 않아서였다.
부르르!
그 모습에 잔살방주가 팔에 더욱더 힘을 주었으나 근육이 꿈틀거리기만 할 뿐 바라는 대로 반호진의 몸이 갈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점점 더 밀려났다.
“이이익!”
점차 밀려나는 겸강의 모습에 잔살방주가 안간힘을 썼다.
놀라고 있을 시간도 없기에 악을 쓰며 전신의 힘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쩌저저적!
오히려 반호진의 일검에 겸강들이 유리처럼 부서졌다.
그의 정수가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겸강들이 말이다.
“두 번을 받아 주었으니 당신도 받아 봐.”
스윽.
선명한 금광이 서린 소천검이 느릿하게 잔살방주에게 뻗어 갔다.
달마삼검의 첫 번째 초식인 출검이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찌르기였으나 잔살방주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막대한 압박감이 그의 전신을 짓눌러서였다.
터어어엉!
그럼에도 잔살방주는 반사적으로 반호진의 일검을 막아 냈다.
쌍겸을 교차해서 소천검의 검 끝을 받아 냈던 것이다.
“크으윽!”
그러나 충격까지 완벽하게 해소하지는 못했다.
충돌과 동시에 잔살방주의 두 다리는 바닥에 깊은 고랑을 만들며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자, 그럼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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