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8장. 일진일퇴(一進一退). -02
그때 반호진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웬만해서는 듣기 힘든 신음 소리에 반호진은 물론이고 일행들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어?!”
“팽가주님?”
비명의 주인은 바로 팽만철이었다.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이자 도왕이라 불리는 팽만철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런데 상황은 하북팽가의 무인들도 비슷했다.
용맹하기로는 오대세가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하북팽가의 거한들이 사사혈천교도들의 공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크흑!”
“흡!”
“지금이다!”
“몰아붙여라! 본교에 굴복하지 않는 것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라!”
수장인 팽만철이 사사혈천교주와의 대결에서 밀리자 하북팽가의 기세 역시 꺾였다.
하지만 하북팽가의 위기는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팽만철을 날려 버린 사사혈천교주는 이대로 끝장을 내겠다는 듯이 무시무시한 기파를 흩뿌리며 쇄도했다.
웅웅웅웅!
묵직한 소성과 함께 핏빛 강기에 휩싸인 사사혈천교주가 날아오자 이제 막 몸을 일으키던 팽만철이 어금니를 드러냈다.
꼴사납게 튕겨 날아갔으나 아직 패배를 승복한 건 아니었다.
승부라는 게 마지막까지 모르는 것이었기에 팽만철은 거패도를 움켜잡고서 기합을 터트렸다.
“크헝헝헝!”
마치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한 포효와 함께 팽만철이 혼원벽력도를 극성으로 펼쳤다.
그러자 사방에 뇌성이 쩌렁쩌렁 울리며 거대한 도강이 사사혈천교주에게 작렬했다.
도환마저 갈라 버리는 혼신의 일격이었다.
“가소롭구나.”
커다란 뇌성과 함께 거대한 도강이 일도양단의 초식으로 펼쳐졌음에도 사사혈천교주는 멀쩡했다.
망토처럼 펄럭이는 호신강기가 팽만철의 참격을 너무나 가볍게 막아 냈다.
겉보기에는 더없이 얇은 호신강기였는데 그럼에도 팽만철의 일격을 완벽하게 받아 냈다.
“이익!”
그 광경에 팽만철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전심전력을 다한 참격을 호신강기만으로 가볍게 막아 내자 자존심이 상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팽만철은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흥!”
그러나 흉포한 기세로 달려드는 팽만철을 사사혈천교주는 손쉽게 상대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상대하듯 뇌성벽력과 함께 쏟아지는 혼원벽력도를 가볍게 받아 냈다.
쾅! 쾅! 쾅! 쾅!
정교하기보다는 투박한 도격이었으나 하나하나에 서린 힘은 가공했다.
한데 그 강맹한 참격들을 사사혈천교주는 강기에 휩싸인 손으로 받아쳤다.
“크으윽!”
가히 박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사람의 공수전환은 빠르고 강력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팽만철의 입가는 피로 흥건해졌다.
충돌할수록 내상이 깊어져서였다.
점점 더 누적되는 충격에 팽만철의 얼굴은 물론이고 입술이 시퍼래졌다.
“크아아앙!”
그럼에도 팽만철은 물러나지 않았다.
자리를 피한다는 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팽만철은 죽으면 죽었지 물러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니, 버티고 버티면 언젠가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힘든 만큼 사사혈천교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이다.
“어리석은 아이로구나.”
그런 팽만철의 모습에 사사혈천교주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에게는 팽만철이 속내가 훤히 보여서였다.
동시에 생긴 대로 미련하다고 생각했다.
정면대결에서 밀린다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정상인데 팽만철은 쓸데없이 자존심을 세우고 있었다.
“닥쳐라!”
“그래도 아직은 힘이 남아 있구나. 목청이 좋은 걸 보면. 그러니 이걸 받아 보거라.”
쑤아아앙!
팽만철의 파상공세를 일일이 받아 내던 사사혈천교주가 히죽 웃었다.
그 순간 사사혈천교주의 손을 휘감고 있던 핏빛 강기가 엿가락처럼 쭈욱 늘어났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너무나 생동감 있게 움직였는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혈광을 흩뿌리는 강기가 길어질수록 점점 더 커졌다.
꽈아아앙!
부지불식간에 거대해져서 덮쳐 오는 강기를 튕겨 내기 위해 팽만철이 전력으로 거패도를 휘둘렀다.
그러나 결과는 팽만철의 참패였다.
굉음과 함께 팽만철은 입에서 다시 한번 피분수를 내뿜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근데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보였다.
덜덜덜……!
아까 전과 달리 팽만철은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충돌로 인한 충격이 상당한지 다리가 풀린 팽만철이 일어섰다가 넘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이제 그만 끝내자꾸나.”
그 모습에 사사혈천교주가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왕 따위는 언제라도 잡을 수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으드득!
그런 사사혈천교주의 모습에 팽만철이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입가에 흥건한 피와 핏발이 잔뜩 선 눈으로 인해 악귀와도 같은 모습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기세는 전과 같지 않았다.
심각한 내외상만큼이나 기세가 한풀 꺾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팽만철은 포기하지 않았다.
“죽더라도 같이 죽을 것이다!”
“그건 네 생각이고.”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서 팽만철이 달려들었다.
말한 대로 혼자만 쓰러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는 방어를 도외시하고 모든 힘을 공격에 쏟아부었다.
동귀어진도 불사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뻐어어엉!
그러나 결과는 아쉽게도 팽만철의 패배였다.
굉음과 함께 팽만철은 칠공에서 피를 쏟아 내며 바닥으로 무기력하게 떨어졌다.
“팽가주!”
그 모습에 잔살방(殘殺幇)을 상대하던 남궁호가 몸을 날렸다.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팽만철의 모습에 황급히 그에게 달려간 것이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있지만 아직 죽은 게 아님을 알기에 남궁호는 다급히 제왕검형을 펼쳐 사사혈천교주를 공격했다.
다행히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에 남궁호는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
“도왕 다음에는 염왕인가.”
“이 몸이 상대해 주겠다!”
“웃기는구나. 후배가 본좌한테 이 몸이라니. 법왕이나 검왕이면 또 모를까 고작 염왕 주제에 그런 말이라니.”
“차합!”
사사혈천교주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으나 남궁호는 반응하지 않았다.
굳이 사사혈천교주의 도발에 응할 필요는 없어서였다.
중요한 건 결국 결과였다.
승자가 되면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었기에 남궁호는 제왕검형을 극성으로 펼쳤다.
웅웅웅웅!
남궁호를 중심으로 무지막지한 기파가 뿜어져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우윳빛 검강을 머금은 그의 검 창천이 허공을 날았다.
강기를 머금은 채로 이기어검을 펼친 것이었다.
딱 봐도 어마어마한 공력을 가진 것처럼 보였기에 남궁호는 일단 거리를 벌릴 생각이었다.
‘우선은 팽가주를 빼내야 해.’
사도육주 중 살방이 무너졌다고 하나 정천맹이 싸워야 하는 상대는 천사맹만이 아니었다.
마도련도 있었기에 팽만철을 절대 잃어서는 안 되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았고.
그래서 남궁호는 단전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서 창천에 실었다.
쌔애애액!
주인의 의지를 머금은 창천이 맹렬한 기세로 사사혈천교주에게 날아갔다.
단숨에 꿰뚫어 버리겠다는 듯이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흩뿌리면서 말이다.
뻐어엉!
이윽고 남궁호의 창천이 사사혈천교주의 가슴에 작렬했다.
동시에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초월경 고수들끼리의 충돌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어서 가주님을 모셔!”
“얼른!”
그사이 하북팽가의 장로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몸을 날렸다.
거대한 폭발로 인해 일어난 무시무시한 후폭풍을 가르며 쓰러진 팽만철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그런데 남궁호의 움직임으로 인해 전황이 크게 변했다.
남궁호가 빠짐으로서 생긴 빈 공간을 잔살방주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마, 막아!”
“못 가게 해!”
그 광경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잔살방주와 그를 따르는 잔살방도들의 움직임은 기민했다.
장애를 가진 이들의 움직임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잔살방의 이동속도는 전광석화와 같았다.
게다가 잔인하고 강했다.
괜히 사도육주 중 한 곳으로 꼽힌 게 아니라는 듯이 파죽지세로 남궁세가의 진영을 가르며 정천맹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어?! 어!?”
“막으란 말이다! 절대 뚫려서는 안 된다!”
살벌한 기세로 진영을 가르며 달려가는 잔살방의 모습에 몇몇 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잔살방주가 향하는 곳이 너무나 분명해서였다.
정천맹의 진영을 총지휘하는 제갈문곡을 향해 달려가는 광경에 몇몇 무인들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특히 제갈문곡을 호위하고 있던 제갈세가의 무인들이 대경하며 고함을 질렀으나 이미 기세를 탄 잔살방을 막아 내는 건 불가능했다.
“뚫어라!”
“가로막는 녀석들은 모조리 밀어 버려!”
“굳이 죽일 필요 없다! 길을 여는 데 집중해라!”
평소였다면 특유의 흉악한 성질을 사방팔방에 드러내며 살육을 자행했겠으나 지금은 달랐다.
목표가 분명했기에 죽이기보다는 길을 뚫는 데 집중했다.
“크아아악!”
“내 팔! 내 파알……!”
그로 인해 곳곳에서 비명 소리가 속출했다.
순식간에 팔다리가 잘려 나가며 바닥을 나뒹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살육의 파도는 순식간에 제갈세가와 그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반호진에게까지 이어졌다.
“이거 날 노리는 모양이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아니면 어쩌다 보니 엮인 것 같기도 하고.”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흉흉한 기세를 사방팔방에 흩뿌리며 달려오는 잔살방주의 시선 끝에는 자신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겸사겸사 제갈가주님도 노리는 것 같고요.”
“같이 처리하겠다?”
“정천맹을 전체적으로 지휘하는 건 제갈가주님이시니까.”
“덤 취급을 받을 분은 아니신데.”
“형님과 비교하면 어쩔 수 없지.”
선우방도 그렇고 사마의성과 서조운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살기충천한 기세로 돌진해 오는 잔살방을 보면서도 말이다.
“저는 이해가 갑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살방주와 막역한 사이라거나, 혹은 무인으로서 형님과 제대로 한번 붙어 보고 싶다거나.”
“둘 다 가능성은 있네.”
모용척의 의견에 정이륭이 동조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어차피 싸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까. 근데 다들 자신 있어?”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잔살방을 일별한 반호진이 일행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숫자가 대충 세어 봐도 오백 명은 훌쩍 넘었다.
물론 제갈문곡을 호위하기 위해 제갈세가의 무력부대가 함께 있다고 하나 다른 오대세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무력이 부족했기에 큰 도움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우리도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고.”
“저의 운명에는 언제나 싸움이 함께했지요.”
“경험으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습니다.”
“각오도 없이 전장에 오지는 않았습니다.”
선우방,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이 너무나 닮은 미소를 지었다.
누구 하나 겁먹지 않은 모습에 반호진은 피식 웃었다.
“방심하지는 말고.”
“우리야말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말했지만 난 손주까지 보고 죽을 거야. 이곳에 내 묏자리는 없어.”
선우방에게 대답해 준 반호진이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꼽추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잔살방주가 있었다.
“천하의 신룡이 도망치려는 것은 아니겠지?!”
“신룡이라니. 검신으로 바뀐 지가 언제인데.”
“나와라, 소림신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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