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7장. 변수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 -04
사마의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천맹과 마찬가지로 천사맹 역시 아직 맹주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한데 지금 보이는 광경은 알려진 것과 많이 달랐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사사혈천교주가 천사맹주처럼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정말?”
“어. 내가 보기에는.”
“임시 맹주인 거 아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사사혈천교주가 천사맹주직에 가장 가깝다고들 하잖아?”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까 느낌이 좀 달라.”
심상치 않은 사마의성의 대답에 서조운의 미간도 좁혀졌다.
무공은 일행들 중에서 가장 떨어질지 모르나 통찰력 하나만큼은 반호진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게 사마의성이었다.
막말로 무공을 제외하고 모든 부분에서 뛰어났기에 서조운은 친구의 말을 흘려듣기 힘들었다.
“그렇단 말이지.”
“숫자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아.”
“대신 우리는 일당백들이잖아. 이런 대규모 전투가 처음인 천사맹, 마도련과는 다르게 말이지. 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야. 경험에서 비교불가지.”
“그 부분에서는 확실히 차이가 나.”
사마의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새외무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긴 했으나 그로 인해 백도무림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일이 년 안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대신 서조운의 말대로 정천맹의 무인들은 한 명 한 명이 일당백의 모습을 보이며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임에도 꿋꿋하게 전선을 유지했다.
콰아아앙!
“거기다 우리에게는 천하십대고수가 존재하지. 반대로 사도육주는 사도오주가 되었고.”
굉음과 함께 수십 명이 허공으로 비산하는 모습을 보며 서조운이 씨익 웃었다.
수적으로는 열세일지 모르나 대신 질적으로는 천사맹을 압도했다.
그렇기에 천사맹이 마도련과 동맹을 맺었음에도 밀리지 않고 싸울 수 있었다.
“사실상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봐야지. 마도련이 합류하기 전에 결판을 내야 해.”
사마의성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정천맹이 자존심을 버리고 기습공격을 강행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큰 피해를 입히는 게 결과적으로는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것이었기에 모두가 순순히 기습하는 걸 받아들였다.
콰콰콰쾅!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수장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전황이 달라졌다.
압도적인 무력에 전선 곳곳이 크게 뒤흔들렸던 것이다.
그 모습을 반호진은 조용히 지켜봤다.
‘천사맹이라.’
반호진은 피 튀기는 격전을 뒷짐 진 채로 지그시 바라봤다.
새삼 미래가 많이 바뀌었다는 게 느껴져서였다.
지난 생에서는 마주치지 못했던 곳들이 천사맹과 마도련이었기에 반호진은 내심 지금의 상황이 신기했다.
그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미래가 비틀렸다지만 그 결과가 천사맹과 마도련이라는 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놀라웠다.
‘내가 죽은 후에도 있었으려나?’
반호진이 아는 건 죽기 직전까지의 상황이었다.
그다음은 반호진도 몰랐다.
북해빙궁주와 동귀어진을 했다고 하나 천하사패 중 세 곳의 수장이 멀쩡했었던 만큼 백도무림이 승리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오히려 지지부진한 전쟁이 이어졌을 것이었기에 반호진은 그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워낙에 변수가 많아서였다.
하오문처럼 현재 천사맹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도육주 전부가 천하사패의 아래로 들어갔을 수도 있었고, 반대로 백도무림이 무너지고 사도무림이 궐기해서 전쟁을 일으켰을 수도 있었다.
‘뭐, 이제는 말 그대로 가정일 뿐이니까.’
반호진은 이내 상념을 털어 냈다.
어차피 모든 게 상상이고 가정일 뿐이었다.
중요한 건 늘 그렇듯 현재였다.
‘변수는 변수일 뿐이지. 결국 본신의 힘에 따라 결과가 나오는 법.’
전생과는 이미 많은 게 변했다.
알고 있는 미래가 크게 소용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앞으로에 대해 모른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뻐어어엉!
결국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의 힘이었다.
무인은 힘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이였기에 꿋꿋하게 수련해서 제 갈 길을 가면 되었다.
다른 무인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담현을 비롯해서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살벌한 기세로 천사맹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아직도 사도육주가 나서지 않고 있어요.”
“마도련의 지원을 기다리는 건가?”
“그럴 수도 있고요.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으니까.”
사마의성의 목소리에 의문이 짙게 서렸다.
아무리 봐도 정면대결을 피하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그리고 그 말에 선우방 역시 미간을 좁혔다.
마도련이 합류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는 게 이번 기습공격의 핵심인데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것 같아서였다.
많은 적들이 쓰러지고 있었지만 정작 알맹이가 없었다.
천사맹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사도육주들을 쓰러뜨려야 하는데 정천맹의 계획을 눈치라도 챈 것처럼 여섯 명은 절대 전방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거 좋지 않은데.”
“숫자만 줄여서는 의미가 없는데.”
선우방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모용척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의심이 점차 확신으로 변해 가서였다.
반면에 반호진의 표정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늘 그렇듯이 담담한 신색으로 사사혈천교가 맡고 있는 전선을 응시했다.
“저곳이 제일 특이하죠?”
“응. 진짜 광신도들이네.”
반호진의 표정을 본 서조운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가 보기에도 가장 기괴하고 섬뜩한 곳이 바로 사사혈천교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모두 경배하라!”
“새로운 세상이 곧 오리니!”
“죽음으로 우리는 다시 태어난다!”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교주님을 숭배해라!”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는 듯이 사사혈천교의 교도들이 방어를 도외시하고서 달려들었다.
처음 기습했을 때 고기방패를 자처하며 시간을 번 것도 바로 사사혈천교도들이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광경에 고수들조차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로 사사혈천교도들에게서 흘러나오는 광기는 엄청났다.
퍼퍼퍼펑!
그러나 줄기줄기 흩뿌리는 광기에 비해 사사혈천교도들의 실력은 평범했다.
무인이라고 하기에 애매할 정도로 대부분이 삼류무사들이었는데 그럼에도 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어마어마한 숫자 덕분이었다.
다른 사도육주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사혈천교의 교도들은 많았다.
또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놈들!”
“비키지 못하겠느냐!”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들이 팔다리가 잘리는 걸 두려워할 리 없었다.
게다가 숫자가 워낙에 많았기에 사사혈천교주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도육주들에게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공력과 체력이 빠르게 소모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사도육주들과 싸우기도 전에 힘이 빠질 게 분명했다.
“……인해전술로 나온단 말이지.”
“이대로는 실패다.”
“마도련이 도착했어.”
모용척, 정이륭, 선우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최대한 서둘렀음에도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서였다.
숫자를 많이 줄이기는 했으나 사도육주를 잡지 못한다면 결과적으로는 실패였다.
기습공격을 한 의미가 없었기에 세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스스슥!
일행들이 본 걸 최전선에 있던 이들이 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마도련이 도착한 걸 확인한 제갈문곡은 빠르게 전선을 뒤로 물렸다.
전열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좀 더 밀어붙이면 사도육주를 잡을 수도 있지만 제갈문곡은 무리하지 않았다.
“어딜 가느냐!”
“이제는 우리가 복수할 시간이다!”
“족쳐!”
“단 한 명도 놓치지 마라!”
기세를 살리기 위해 대놓고 함성을 지르며 마도련의 마인들이 달려왔기에 천사맹의 사파인들 역시 지원군이 도착했음을 알았다.
그러자 곧바로 자세를 바꾸었다.
언제 소극적으로 버티기만 했냐는 듯이 일제히 공격적으로 달려들었다.
“지금부터 제대로 놀아 보자꾸나!”
“설마 천하십대고수라는 것들이 꽁무니를 빼지는 않겠지!”
거기에 사도육주도 가세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태도를 돌변해서는 구대문파와 오대세가의 수장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건방진 것들!”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그 모습에 성격이 폭급한 팽만철이 참지 않았다.
달려드는 상대를 마다하지 않는 성격답게 노성을 터트리며 웬만한 성인 장정만 한 거패도를 거침없이 휘둘렀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당우혁이 살벌한 살광을 번뜩이며 독수를 뿌렸다.
“팽가주! 당가주!”
쇄도하는 족족 짓뭉개거나 녹여 버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제갈문곡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굳이 상대측이 원하는 대로 싸울 필요는 없어서였다.
더욱이 천사맹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데 맞서 싸우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오히려 역으로 도발을 하면 모를까.
“알았어! 간다고!”
“운 좋은 줄 알도록.”
마지막까지 도강과 독강으로 적들을 쓸어버린 후 두 사람은 이동했다.
그러나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추격하는 이는 없었다.
사도육주의 수장이 아닌 이상 자신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였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일꼬.’
한편 소림사의 제자들을 이끌고 천천히 물러나던 담현이 미간을 좁혔다.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려드는 사사혈천교도들의 모습이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땡중을 잡아라!”
“노괴를 잡아야 한다!”
“허허허.”
성승이라고도 불리는 자신을 땡중이라 말하는 사사혈천교도들의 모습에 담현이 헛웃음을 흘렸다.
소림사의 방장이 된 후로 이런 말을 들은 게 처음이었기에 담현은 놀랍기도 했지만 신기했다.
대체 어떤 교리로 사람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퍼퍼퍼펑!
하지만 호기심과 별개로 담현의 쌍장은 매서웠다.
덮쳐오는 사사혈천교도들을 사정없이 밀어 버렸던 것이다.
찬란한 금광이 번쩍일 때마다 열댓 명의 사사혈천교도들이 피를 토하며 허공을 날았다.
“역시 법왕이라는 건가.”
“노괴가 힘이 좋군. 관짝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에 이렇게나 정정하다니.”
“아미타불.”
담현의 앞으로 네 명의 장년인이 다가왔다.
그러자 저돌적으로 달려들던 사사혈천교도들이 거짓말처럼 물러났다.
딱히 지시를 내린 것도 아닌데 알아서 멀리 떨어지는 모습에 담현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그러나 법왕의 이름도 오늘까지다.”
“죽어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다.”
순식간에 담현을 포위한 네 명이 비릿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다 잡은 것처럼 말이다.
하나 그런 넷의 표정과 말투에도 담현의 얼굴은 담담했다.
“사사혈천교의 장로들인가?”
“제법 눈썰미가 있군.”
“맞아. 장로님들이지. 그러니 영광으로 알도록. 우리가 직접 포교하러 와 준 걸 말이야. 지금이라도 부처 대신 교주님을 섬기겠다고 맹세하면 목숨은 살려 주마.”
장로들이 대놓고 이죽거렸다.
벌써부터 다 이긴 듯이 말하는 모습에 담현은 기가 찼다.
동시에 묘하게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마주하면 할수록 묘한 거부감이 드는 느낌이었다.
‘사공을 익혀서 그런 건가.’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도육주 중 한 곳인 사사혈천교의 장로들인 만큼 익힌 사공의 수준이 보통은 아닐 터이고, 그렇다면 이런 기분이 드는 것도 이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기회를 줄 때 잡는 게 좋을 거야.”
“우리가 좋은 말로 해 줄 때 말이지.”
“교주님의 힘을 직접 느껴 보고 싶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고.”
“잘됐구려. 안 그래도 사사혈천교주를 만나 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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