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7장. 변수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 -02
살방주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일제히 움직였다.
반호진이 머무는 천막을 향해 포위하듯 달려들었던 것이다.
한데 지근거리까지 다다랐음에도 근처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살수들의 은신술이 대단하다고 하나 정천맹의 진영이었음에도 사람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펄럭!
그 순간 천막의 입구가 활짝 열렸다.
극성으로 은신술을 펼친 살수들이 천막에 닿기 직전에 말이다.
“안 그래도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쉬이익!
초승달이 흩뿌리는 희미한 월광 아래에서 수십 명의 살수들이 반호진에게 쇄도했다.
반사광을 없애기 위해 검은색으로 특수처리한 단검과 단도 수십 개가 맹렬한 기세로 파고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살수들의 공격이 반호진에게 닿기 직전 천막이 찢어지며 네 줄기의 강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퍼퍼퍼펑!
무지막지한 기세로 뻗어 나간 검강과 권강들이 달려들던 살수들을 덮쳤다.
기습하는 살수들을 도리어 기습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살수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투둑. 투두두둑.
느닷없이 뻗어 나온 강기들에 속절없이 당한 살수들의 팔다리가 야공을 비산하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수 없는 이들은 아예 직격으로 맞아 즉사했고.
그러나 비명 소리는 없었다.
괜히 정예가 아니라는 듯이 조금의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다.
“어이어이. 잡것들은 우리하고 놀아야지. 감히 어디서 급도 안 맞는 것들이 형님과 어울리려고 해?”
“오랜만에 척이 형이 맞는 말을 하네요.”
“무슨 소리. 나는 늘 옳고 맞는 말만 했어. 헛소리는 네가 많이 했지.”
“저야말로 늘 맞는 말을 했는데요?”
찢어진 천막 사이로 모용척과 서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로 선우방과 정이륭, 사마의성과 수하들이 걸어 나왔다.
바로 방금 전 뿌려 댄 강기들의 주인들이었다.
“죽여라.”
참혹한 주변 풍경과는 달리 한껏 여유를 부리는 그들의 모습에 살방의 부방주가 이를 가는 듯한 음성으로 지시를 내렸다.
전음으로 명령을 내릴 수 있었음에도 부방주는 일부러 육성을 냈다.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목소리를 내어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지만 은신술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부방주는 망설이지 않았다.
“저놈 병신인데? 스스로 위치를 알려 주네.”
“그만큼 은신술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죠.”
“호진이 앞에서?”
모용척과 서조운의 말을 듣던 선우방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령을 내리는 걸 보면 살방에서 지위가 상당히 높은 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방이 아무리 살수문파 중에서 두 번째로 커다란 세력이라고 하나 그래 봤자 천하십대고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육성을 내자 선우방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죽으려면 뭔 짓을 못 하겠어요.”
“컥!”
사마의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허공에서 신음과 함께 피분수가 솟구쳤다.
바로 부방주의 신음 소리였다.
제 딴에는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숨어 있는 것이니 은신에 자신이 있었겠지만 상대가 나빴다.
살방에서는 방주 다음가는 실력자였겠으나 반호진에게는 거기서 거기였다.
부르르르!
아무것도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지는 부방주의 모습에 사방 곳곳에 은신해 있던 살수들이 몸을 떨었다.
부방주가 당한 것도 놀라웠으나 그들을 더욱 두렵게 만드는 건 어떻게 당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부방주 혼자서 피를 토하고 엎어지자 이번 암습에 동원된 일급살수들은 물론이고 특급살수들조차 두려움에 휩싸였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죽여라!
그런 살수들의 귓가로 살방주의 노성이 꽂혔다.
극도로 흥분한 전음이 살수들의 귓전을 때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굳어 있던 살수들이 다시 움직였다.
갑작스러운 기습과 등장에 얼어 있다가 다시 은밀하게 접근했던 것이다.
“언제까지 부하들 뒤에 숨어 있을 생각이지, 살방주?”
살방주의 지시에 살수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으나 반호진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명에게 향해 있었다.
뒷짐을 지고서 정확히 살방주를 주시했던 것이다.
우연이라는 생각에 살방주가 은신술을 극성으로 펼치며 이동했지만 반호진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 있던, 어디로 가던 곧장 따라왔다.
‘……내 은신술을 꿰뚫어 본다고?’
반호진의 시선에 살방주의 동공이 흔들렸다.
천하제일살수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자신의 은신술을 꿰뚫어 보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반호진의 실력이 사도육주와 비슷하다는 뜻이었다.
‘그럴 리가 없어. 운일 뿐이야.’
반호진의 위명에 대해서는 살방주 역시 귀가 닳도록 들었다.
어느 정도는 인정하기도 했고.
고평가도 기본 실력은 있어야 가능했기에 살방주는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름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좋지 않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여기를 뜬다.’
살방주는 상념을 털어 냈다.
지금 중요한 것만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도, 살방을 위해서도 반호진은 반드시 이 자리에서 죽여야 했다.
그러나 정천맹과 싸워서는 안 되었다.
-전부 달려들어!
오늘 살행의 표적은 반호진이었다.
정천맹이 아니라.
그렇기에 살방주는 다시 한번 명령을 내렸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도록 아예 사방을 흔들 작정이었다.
쌔애애액!
그 어떤 곳보다 상명하복이 확실한 게 살수문파였기에 살방주의 지시에 모든 살수들이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다른 일행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오로지 반호진만을 노렸다.
“부나방 같은 것들.”
쩌어어억!
어둠에 몸을 숨긴 채 달려들던 살수들의 몸이 일제히 양분되었다.
예리한 무언가에 잘린 듯 쇄도하던 자세 그대로 동강 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살수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시체로 화한 동료들조차 이용해서 반호진에게 접근했다.
퍼퍼펑!
그뿐만 아니라 연막탄, 독탄 등등 쓸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동원했다.
살수는 무인이 아니었기에 비겁한 방법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오로지 반호진을 죽이기 위해서 모든 술수를 다 동원한 것이었다.
스르륵.
그리고 그사이 살방주가 움직였다.
반호진의 말대로 부나방처럼 수하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부하들의 죽음은 아까웠으나 처음부터 이 정도는 각오했었다.
모든 부하를 잃어도 반호진을 죽일 수 있다면 성공이었다.
‘아주 잠깐의 틈이면 된다.’
반호진의 시선이 떨어진 걸 느낀 살방주가 살금살금 움직였다.
살기를 최대한 감추고서 접근했다.
그사이 두 번째 파상공세가 반호진을 덮쳤다.
계속해서 반호진의 시선을 붙들기 위해 살수들이 끊임없이 공격하는 것이었다.
촤하하하!
땅 밑에 숨어 있던 살수들이 일제히 솟구쳤다.
반호진의 발밑까지 접근해서는 그대로 살초를 뿌렸다.
쌔애액!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다섯 자루의 단검이 반호진의 사혈을 노렸다.
동료들이 죽어 가며 시선을 끌어 준 걸 알기에 살수들의 공격에는 집념이 담겨 있었다.
반드시 반호진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터어어엉!
부지불식간에 파고든 공격이었으나 반호진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대신 호신강기가 다섯 명의 공격을 막아 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반탄강기로 날려 버렸다.
쩌저적!
그런데 그 순간 예리한 소성과 함께 등 쪽의 호신강기가 갈라졌다.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한 살방주의 검강이 호신강기를 가른 것이었다.
부하들이 시선을 끌어 주는 사이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살방주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지금까지 꾹꾹 눌러 두었던 살기와 광기를 온몸으로 폭발시키면서 말이다.
“죽어! 죽어!”
반호진의 호신강기가 갈라지는 걸 보며 살방주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제아무리 괴물이라 불리는 반호진이라도 똑같이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신이 아닌 이상 내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노리고서 수하들을 갈아 넣은 것이었기에 살방주는 스산한 눈빛으로 반호진의 등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슈우욱!
하지만 그가 원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 반호진의 등을 향해서 검을 찔렀음에도 손에서는 아무런 반동이 없었다.
흔히 말하는 감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살방주는 전신의 모든 솜털이 곧추섰다.
휘이이익!
그뿐만 아니라 살방주는 땅을 박찼다.
본능이 알려 주는 위기신호에 순응해 몸을 날렸다.
한데 그보다 반호진이 조금 더 빨랐다.
“어딜 가시나.”
“흐읍!”
고저 없는 음성보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에 살방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등 뒤를 잡혀서였다.
“방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갔지? 날 죽이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크윽!”
반호진의 이죽거림에 살방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렇지만 몸을 돌리지는 않았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음을 이제는 잘 알아서였다.
‘저놈이 이 정도일 줄이야.’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면서 살방주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반호진에 대해서 조사할 때 강하기는 했으나 절대 천하십대고수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백도무림이 영웅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반호진의 전공을 부풀렸다고 생각했다.
내심 천하십대고수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작정하고 나서면 암살에 성공할 자신도 있었고.
살수가 아닌 무인의 길을 택한 암월교주와 달리 그는 전형적인 살수였기에 반호진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직접 겪어 본 반호진은 상상 이상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해. 일단 본진에만 가면 살 수 있다.’
도망치면서 살방주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조금이라도 반호진을 붙잡아 줄 수하를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할 경우 전멸을 면치 못하겠지만 그만 살아 있다면 부하들은 얼마든지 다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 살방도 끝이었기에 살방주는 다급한 눈빛으로 수하들을 찾았다.
“눈알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모두 모여라! 이곳으로……! 큭!”
아까보다 더욱 가까워진 듯한 반호진의 목소리에 살방주가 결국 도움을 청했다.
일단은 살고 봐야 했기에 치욕스럽지만 수하들을 불렀다.
이렇게라도 해서 벗어나려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이걸 어쩌나. 수하들은 다 죽었는데.”
“아미타불.”
등 뒤에서 날아오는 무시무시한 기운을 가까스로 피한 살방주의 두 눈이 더는 커지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천사맹의 진영으로 가는 길목에 두 사람이 나타나서였다.
“더 이상은 못 간다.”
스스슥!
두 명은 시작이라는 듯이 막아서는 무인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개방도들과 소림사의 무승들이 점점 불어나는 광경에 살방주는 방향을 틀었다.
이대로 계속 가 봤자 섶을 지고 불길에 달려드는 꼴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살방주는 망설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사도육주 중 한 명이라고 하나 법왕과 오중건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지! 이리로 와! 안 그래도 네놈 면상을 꼭 보고 싶었거든.”
“허어억!”
반호진과 담현에게 포위당하는 걸 피하기 위해 직각으로 방향을 튼 살방주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의 정면에 거한이 거패도를 들고 서 있어서였다.
사람이지만 한 마리 호랑이 같은 기세를 풍기는 중년인의 모습에 살방주는 기겁하며 재차 방향을 틀었다.
“흐음. 그쪽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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