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322화 (322/468)

제 107장. 변수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 -01

“대답하지 않아도 아시지 않습니까.”

“하하하. 죄송합니다. 저는 떠보려고 한 게 아닌데…….”

오중건이 어색하게 웃으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개방의 방주 대리이고 곧 개방주가 될 몸이지만 반호진 앞에서는 작아졌다.

그러나 오중건은 그게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막말로 그가 아니라 어느 누구를 반호진 앞에 데려다 놓아도 똑같을 것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주님!”

“그런 분이셨다면 이렇게 대화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공개는 하지 않으실 건가요?”

“공개해도 믿을까요?”

오중건의 눈썹이 모아졌다.

지금 발언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어찌 보면 반호진이 얻은 건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본방이 조사한 것들이 있습니다. 천사맹에 투신한 하오문의 잔당들보다 정확하지는 않겠으나 교차확인을 할 정도는 됩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미 공공의 적이 있는데.”

“으음!”

오중건의 동공이 커졌다.

생각해 보니 반호진의 말이 맞아서였다.

다들 궁금하기는 하겠으나 공개할 경우 겨우 잠재운 분란이 다시 커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저 멀리 보이는 천사맹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일이 커질 경우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싸움만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의심이 가는 이들을 예의주시는 하되 미리 죄인 취급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쁜 마음이야 누구나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 중요한 건 실행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지요. 또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이기도 하고요.”

“그렇긴 하지요.”

오중건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감탄과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다.

한참 어린 반호진의 시야가 저렇게 넓은데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게 오중건은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기회가 왔다면 최대한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보가 어디서 흘러나왔는지 모를 수가 없는 만큼 살방이 움직일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사도육주들의 입장에서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문주님을 어떻게든 죽이려고 할 겁니다.”

오중건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천사맹을 뒤흔드는 것만 생각했지 그로 인한 후폭풍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오중건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문주님.”

“근데 조금 다릅니다. 살방주가 저를 노리는 게 아니라 제가 살방주를 불러내는 겁니다.”

“……!”

오중건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상상도 못한 말에 경악한 것이었다.

더불어 그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살방은 사면초가에 빠졌습니다.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지요. 물론 사도육주 중 한 명으로 불리는 만큼 실력은 뛰어날 겁니다. 그런데 그 대단한 사도육주 중 하나가 죽으면 타격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분명 혼자 오지도 않을 테고요.”

“……그러니 더욱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살방보다 대단하다는 암월교도 괴멸시켰습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오중건이 말끝을 흐렸다.

다른 사람이 이러면 욕을 한 사발 쏟아 내겠으나 말한 이가 반호진이었다.

결코 오만하거나 자만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반호진이 지금까지 보여 준 게 있었으니까.

다만 오중건이 염려하는 건 딱 하나였다.

바로 반호진이 크게 다치거나 죽는 것.

백도무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반호진은 절대 죽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잊으신 것 같은데 철혈성주를 잡은 게 접니다. 살수들의 방식이 무인들의 방식과 다르다고 하나 결국 끝에 가서는 비슷한 법입니다.”

“그렇지요.”

오중건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해서 그렇지 반호진의 계획이 나쁜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계책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말이다.

“판은 이미 벌어졌습니다. 제가 만든 판이 말이지요. 더구나 살방주는 평정심이 흐트러진 상황일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문주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문주님이 백도무림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요. 그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첨언하자면 저는 방장을 못 말립니다. 말릴 자신도 없고요.”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지는 승부는 하지 않습니다. 무모하게 싸우지도 않고요.”

“믿겠습니다.”

“저도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개방이 주시해 주었으면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믿고 의지할 곳이 소림 말고는 개방밖에 없어서요.”

스윽.

반호진의 품속에서 나오는 제목 없는 서책에 오중건의 두 눈이 커졌다.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음에도 본능적으로 어떤 물건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건……!”

“오 대협께서 짐작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이런 귀한 걸 저에게 주셔도 괜찮으십니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소림을 제외하면 가장 믿을 수 있는 곳이 개방이라고요.”

오중건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똑같은 말이라도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데 반호진이 이렇게 말하니 그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자신을, 그리고 개방을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였다.

그것도 불신이 팽배한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해 주었기에 오중건의 두 눈이 촉촉해졌다.

“기필코 문주님의 믿음에 보답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조심하십시오. 문주님의 몸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장가가기 전에는 저도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장가도 가고, 자식도 꼭 낳을 생각입니다. 사부님께서 은근히 바라고 계시기도 하고요.”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오중건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담이 꽤나 많이 섞여 있음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또 담현이 반호진의 자식을 기다리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물론 당장 장가갈 생각은 없습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지 않습니까. 신중해서 나쁠 건 없지요.”

“문주님께서는 골라서 가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전부 다 거두실 수도 있고요.”

“제가 그런 쪽에는 꿈이 그리 크지 않아서 한 명이어도 충분합니다. 조운이야 삼처사첩이 목표라지만 저는 한 명만 있어도 감지덕지입니다.”

“아, 형님!”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던 서조운이 민망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절대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직 서조운은 꿈을 포기하지 않아서였다.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는 삼처사첩이라는 원대한 꿈이 담겨 있었다.

“부정은 안 하지 않습니까.”

“허허허허. 영웅은 호색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본인이 호색하지 않더라도 능력 있는 남자에게는 여인이 자연스레 꼬이는 법이니까요.”

서조운이 부끄러워했지만 오중건은 절대 그걸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조운 정도면 엄청나게 얌전한 편이었다.

능력도 없는 주제에 집안만 좋아서 이 여자 저 여자 후려치고 다니는 파락호가 수두룩한데 서조운은 반호진의 곁에서 수련에 매진했다.

말과 달리 여자는 만나지도 않고서 말이다.

“능력이 있기는 하죠.”

“흐흐흐!”

웬만해서는 듣기 힘든 반호진의 칭찬에 서조운이 헤벌쭉 웃었다.

여자도 좋지만 서조운은 아직 반호진이 더 좋았다.

약속한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도 했고.

“오 대협.”

“말씀하시지요, 문주님.”

“위기와 기회는 함께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도육주 중 한 곳이 흔들리면 천사맹이 흔들릴 겁니다.”

“분명 그럴 겁니다.”

착 가라앉은 반호진의 목소리에 오중건도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 했다.

지금부터의 대화가 중요하다는 걸 잘 알아서였다.

“오 대협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천사맹과 마도련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벅차다는 사실을요.”

“새외무림과의 전쟁이 컸습니다. 만약 새외무림과 싸우지 않았다면 천사맹과 마도련이 동맹을 맺었어도 저희가 압도했을 겁니다.”

“그걸 알기에 지금까지 몸을 낮추고 힘을 축적한 거겠죠. 기회가 왔으니 일어난 것이고요. 그러니 이번 기회를 잘 살려야 합니다.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건 버겁지만 하나씩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으니까요.”

“그 시작이 살방주라는 말씀이시군요.”

“예.”

반호진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바로 알아들어서였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반호진의 미소가 짙어졌다.

개방이 아니라 자신을 말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아서였다.

“괜찮습니다. 친구도 있고, 동생들도 있고, 또 저에게는 소림사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꼭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마음 편히 술 한잔하시죠.”

“약속하신 겁니까?”

오중건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서였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입으로 두말한 적 없습니다.”

“알지요. 잘 알지요. 저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반호진이 건네준 책자를 품에 꼭 품고서 오중건이 히죽 웃었다.

그날을 고대하겠다는 듯이.

사위에 어둠이 짙게 내린 야심한 밤에 일단의 무리가 야산을 가로질렀다.

미세한 소리도 없이 수십 명이 이동했던 것이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소리 없이 움직이는 흑의인들의 선두에서 달리던 살방주가 형형한 안광을 토해 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솟았기에 살방주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반드시, 반드시 찢어 죽인다.’

살방주의 안광에 살기가 가득했다.

본거지가 괴멸당한 건 물론이고 반호진이 한 짓거리로 인해 천사맹에서 그의 입지는 말이 아니었다.

거의 공공의 적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배척을 당하고 있었기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반호진의 죽음이 필수였다.

‘감히 이딴 짓을 해?’

살기 가득한 살방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극도의 분노로 안면이 터질 듯이 달아오른 것이었다.

그 정도로 살방주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갈가리 찢어 죽여 산짐승의 밥으로 만들어 주마.’

다른 사도육주에게 당했던 수모들을 떠올리며 살방주는 두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흥분한 것과 달리 그의 눈빛은 예리했다.

주변 상황을 꼼꼼하게 파악했던 것이다.

-보초는 없습니다.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하기 무섭게 부방주의 전음이 들렸다.

도착하자마자 그와 마찬가지로 주위를 확인한 것이었다.

그 전음에 살방주가 복면 안에서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제아무리 깨끗한 척을 해도 사람의 본성은 달라지지 않았다.

‘욕심 없는 인간은 없으니까.’

겉으로는 대의와 협의, 평화를 부르짖지만 결국 원하는 건 똑같았다.

단지 솔직하느냐, 솔직하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가식덩어리들.’

살방주의 시선이 정천맹의 진영으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외곽 쪽이었는데 저곳에 바로 그의 목표물이 있었다.

‘대비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살방주가 싸늘한 안광을 번뜩였다.

지금까지 반호진이 보여 준 교활한 행보를 감안하면 분명 만반의 준비를 해 놓았을 터였다.

그러나 살방주 역시 복수심에 눈이 멀어 무작정 달려온 건 아니었다.

‘제일 무서운 건 등 뒤에서 파고드는 칼이 아니라 옆구리로 스며드는 살수(殺手)지.’

지금과 같은 전시상황에서는 모두가 등 뒤를 조심했다.

언제라도 암습이 있을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옆이 비어 있었다.

이미 한 차례 크게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살방주는 바로 그 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멍청하게 아군을 믿는 그 마음을 이용해서.

-시작해라.

스스스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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