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6장. 눈에는 눈 이에는 이. -01
모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반호진이 이런 선택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리고 그건 판을 깔았던 음여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소림검신이라 불리는 반호진이 물러나겠다고 하자 음여창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게 가장 깔끔한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의심되는 이가 아예 참전을 하지 않는 게.”
“그렇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따질 것도 없고.”
“아, 아니…….”
꼴좋다는 듯이 히죽 웃으며 맞장구를 치는 팽만철의 말에 은근슬쩍 반호진을 끌어들이려던 이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반호진이 돌아가겠다는 선택지를 꺼낼 줄은 몰랐기에 얼빠진 얼굴로 서로를 돌아봤다.
“안 그렇습니까, 음 장문인.”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하는데.”
“극단적이라뇨? 아주 깔끔하지 않습니까? 이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아직 젊어서 그런가. 결정이 너무 성급하군.”
“젊어서가 아니라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서 말한 겁니다.”
이번에도 어린아이의 치기로 몰아가는 음여창의 말에 반호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음여창은 섬뜩하게 다가왔다.
마치 그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이걸 원하신 거 아닙니까?”
“원하다니. 그건 곡해일세.”
음여창이 누가 봐도 억울하다는 듯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달랐다.
판을 뒤집어엎은 반호진의 모습에 이를 갈았다.
“곡해라. 저 혼자만 그렇게 생각했다면 오해겠지만 다른 사람도 똑같이 생각했다면 오해가 아니지 않을까요?”
“나는 절대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네.”
“그래도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모두가 저를 못 믿게 되었지 않습니까? 어설픈 신뢰 관계를 유지하느니 한쪽이 아예 물러나는 게 깔끔하지요. 더구나 이곳에는 쟁쟁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 않습니까. 당장 제 눈앞에만 하더라도 음 장문인이 있고요. 대공동파의 장문인이시지 않습니까.”
으득!
음여창이 소리 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표정은 평온했다.
자신이 썼던 방법을 그대로 돌려받았기에 그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더더욱 의심을 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나.”
“글쎄요. 제 생각은 다릅니다만. 제가 노력한다고 의심이 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반호진의 심유한 눈동자가 음여창에게 닿았다.
그러고는 그에게 동조한 이들과 한 명 한 명 시선을 마주했다.
꿀꺽.
별다른 기세가 담기지 않은 평범한 눈빛이었으나 막상 시선이 마주치자 다들 고개를 돌렸다.
찔리는 게 있기에 오래 마주 보지 못한 것이었다.
“반 소협.”
“이제부터는 무상문주라고 불러 주시죠. 제가 장문인의 아랫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순간적으로 음여창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찰나지만 평정심이 흔들린 것이었다.
“그리……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어어?!”
반호진의 말에 모든 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어떤 성격인지 알고 있었기에 지금의 발언이 빈말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가뜩이나 전황이 좋지 않은데 반호진씩이나 되는 고수가 돌아가겠다고 하자 몇몇 수장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 문주님. 갈 때 가시더라도 이번 회의까지는 끝내고 가 주시지 않겠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가 어쩔 줄을 몰라 할 때 유일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제갈문곡이 입을 열었다.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분위기가 또 한 번 달라졌다.
많은 이들이 이 사태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음여창을 흘겨보기 시작했다.
“으음!”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음여창은 느낄 수 있었다.
그를 탓하는 마음들이 말이다.
그래서 음여창은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반호진 역시 두 눈을 질끈 감은 음여창을 바라봤다.
개인적으로 반호진은 협잡꾼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약자의 처세술이라고도 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지켜야 하는 선이 있는데 음여창은 그러지 못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음여창의 술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겠으나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음여창이 어떤 인물인지 반호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참 신기하단 말이지. 미래가 많이 바뀌었음에도 이런 건 그대로 흘러가는 걸 보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반호진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생과 많은 게 달라졌음에도 이런 걸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감사합니다.”
반호진이 다시 착석하는 것을 확인한 제갈문곡이 장내를 살폈다.
상황이 일단락되면서 분위기 역시 정리가 된 게 체감이 되었다.
그러면서 제갈문곡은 지그시 음여창을 바라봤다.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게 음여창임을 그 역시 알고 있어서였다.
‘공동파는 꽤 오랫동안 침체기를 겪겠어.’
전대 장문인인 방만춘 역시 공동파의 수장이라고 하기에는 능력도, 자격도 부족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새로이 장문인이 된 음여창 역시 방만춘과 딱히 다르지 않아 보였다.
구대문파 중 한 곳을 이끌기에는 역량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어쩌면 이번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고.’
제갈문곡은 음여창을 일별했다.
더는 그에게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서였다.
당면한 문제가 더 심각하기도 했고.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따로 직책이 정해진 건 아니었으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제갈문곡을 총군사라고 생각했다.
제갈문곡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이 없기도 했고.
때문에 제갈문곡이 회의를 주도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
“회의도 회의지만 일단 반 문주님의 마음부터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갈문곡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느 쪽에도 동조하지 않았던 장년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장 회의장을 박차지 않았을 뿐이지 반호진은 떠나겠다는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장년인은 바로 그 점을 짚었다.
“솔직히 저도 이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중건이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안건들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반호진에 대한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법무의 존재도 정천맹의 입장에서는 컸지만 그래도 반호진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사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제갈문곡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티를 안 내서 그렇지 그 역시 오중건과 같은 생각이었다.
아니, 많은 이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 역시.”
“나도.”
“다들 똑같지 않겠어?”
오중건과 제갈문곡뿐만 아니라 팽만철, 남궁호, 당우혁도 같은 마음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반호진은 무조건 붙잡아야 했다.
바짓가랑이에 매달려서라도 말이다.
“참고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와 하북팽가는 널 믿는다.”
“개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본방은 보증도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받은 건 하오문이니까요. 심지어 살방의 본거지를 박살 내기까지 하셨잖습니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아직 살방의 본거지를 박살 낸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다들 놀란 것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두 눈을 감고 조용히 있던 음여창도 있었다.
이런 소식은 금시초문이었기에 음여창은 미약하게 몸을 움찔거렸다.
“제갈세가 역시 무상문주님을 믿습니다.”
개방보다는 살짝 느렸지만 제갈세가 역시 살방의 소식을 들었었다.
그렇기에 슬그머니 한 손을 보탰다.
“소림사의 입장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입니다.”
“사천당가 역시 반 문주를 믿었습니다.”
지금껏 한마디도 안 하고 입을 다물고 있던 담현이 드디어 입을 열자 남궁호와 당우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거기에 모용궁과 선우청도 합세했다.
음여창을 비롯해서 몇몇 이들이 반호진을 반신반의한 것과 달리 선우청과 모용궁은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다.
“살방에 입힌 피해를 생각하면 증명은 충분히 한 셈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에 반해 호진이를 의심한 이들은 뭔가 보여 준 게 있나? 내가 보기에는 없는 것 같은데.”
음여창에게 동조했던 이들이 하나같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차마 제갈문곡과 팽만철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서였다.
“쯧쯧!”
반호진을 몰아붙일 때와는 달리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남궁호는 혀를 찼다.
지금의 모습이 승냥이처럼 보여서였다.
대의나 희생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사문의 이득만 챙기려는 모습에 남궁호의 눈빛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
“결정은 반 문주님께서 하시는 것이지만 그래도 처음의 뜻대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장내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오중건이 조심스럽게 반호진에게 말했다.
반호진의 고집에 대해서 알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볼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담현을 비롯해서 선우청과 모용궁처럼 그에게 호의적인 이들이 있기에 오중건은 거기에 기대했다.
“저도 사람인지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암요. 당연하지요. 저였어도 반 문주님과 같았을 겁니다. 오히려 저는 개망나니처럼……. 흠흠!”
오중건이 헛기침을 했다.
쓸데없이 너무 감정이입을 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반호진의 성격이 조금 죽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반 문주가 마음먹고 날뛰면 이 자리에서 멀쩡한 사람이 없을걸?”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일우의 목소리였다.
화산파 장문인이자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인 투왕의 한마디에 많은 이들이 침을 삼켰다.
투왕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도 무게지만 반호진과는 악연 아닌 악연이 있는 그가 두둔하듯 말하자 놀란 것이었다.
“호진이의 일검을 받아 낼 수 있는 이가 몇 없기는 하지. 적어도 천하십대고수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받아 낼걸?”
“맞아.”
“그런데도 주제도 모르고 주둥이를 놀리니.”
발언의 강도가 많이 셌으나 감히 팽만철에게 따지는 이는 없었다.
눈을 부라리기도 했지만 워낙에 성격이 다혈질이라 알아서 참는 것이었다.
“전면적으로 나설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대신 다른 걸 준비했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묵묵히 자리에만 앉아 있던 반호진이 입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특히 제갈문곡이 눈을 빛냈다.
반호진이 따로 준비한 게 있다고 하자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우선 제갈가주님께서 봐 주시죠.”
“무형지기로 건네주셔도 됩니다.”
백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모여 있었기에 반호진과 제갈문곡 사이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그래서 반호진이 직접 건네주기 위해 몸을 일으켰는데 제갈문곡이 웃으며 말했다.
예의를 차리려는 것은 알겠으나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다른 이라면 모를까 반호진이라면 이래도 될 자격이 있었다.
“정 부담스러우면 내가 도와주고.”
“저도 있습니다.”
“저 역시 가능합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좀 거슬릴 수 있기에 팽만철과 모용궁, 선우청이 나섰다.
반호진이 무형지기로 건네주는 것보다는 세 사람이 하는 게 보기에 훨씬 나아서였다.
“빈승이 하겠습니다.”
“방장께서 하신다면야.”
그러나 세 사람이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담현이 하겠다고 나서서였다.
잠시 후 반호진의 품속에서 나온 제법 두꺼운 서책이 허공을 두둥실 날아 제갈문곡의 앞에 착지했다.
샤라락.
부드럽게 착지한 서책을 제갈문곡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겉장을 넘겼다.
제목도 없는 서책이었는데 겉장을 넘기기 무섭게 제갈문곡의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이,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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