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5장. 의심의 싹. -04
음여창의 두 눈이 번뜩였다.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고작 스물두 살의 나이에 천하십대고수에 비견되는 위치까지 올라간 게 배알이 꼴렸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애송이인 만큼 어르고 달래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게 상당히 많았다.
‘소림사만 너무 잘나가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원래부터 무림의 태산북두라 불리며 구대문파의 수좌에서 단 한 번도 밀려나지 않은 곳이 소림사였다.
당장 정천맹의 맹주로 가장 유력한 이 또한 소림사의 방장인 담현이었고.
음여창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소림사가 독주하는 것 같아서였다.
‘소림제일검을 내 손바닥 위에 놓는다면…….’
음여창이 남몰래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상상만 해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흥분이 되어서였다.
물론 반호진이 만만치 않다는 소문을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지만 음여창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이제 스물둘인 애송이였고, 산전수전 다 겪은 그는 반호진을 마음대로 주무를 자신이 있었다.
“혹시 소문을 낸 게 세 분이십니까?”
“그럴 리가.”
“난 아니네.”
“나 역시.”
음여창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할 때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팽만철, 남궁호, 당우혁을 차례대로 바라봤다.
“그렇단 말이죠.”
“소문이 안 나는 게 이상하지 않나? 소림검신이 개파한 곳인데.”
팽만철이 대답하며 슬그머니 오중건을 바라봤다.
그러자 오중건이 펄쩍 뛰었다.
팽만철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저는 절대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말 했나.”
“혹시라도 다른 분들께서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자연스럽게 소문이 난 모양이네.”
오중건이 수다스럽기는 해도 거짓말을 하는 위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팽만철은 물론이고 반호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제자 대신에 반 문주가 온 모양입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일관성 있게 반호진을 대하는 팽만철과 달리 남궁호는 일문의 수장으로서 예우를 해 주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제는 일문의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무림에서의 위상은 무림십왕과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기에 남궁호는 그에 맞게 대우했다.
그걸 담현 역시 느꼈기에 빙그레 웃었다.
“반 문주가 와서 정말 든든합니다.”
“허허허.”
거기에 제갈문곡이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었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침체되어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는데 반호진이 오자 그는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었다.
법무도 대단한 무인이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반호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들 너무 기뻐만 하는 것 같소이다. 반 소협이 온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한 가지 있지 않소이까.”
새외무림과의 전쟁에서 반호진과 함께 싸운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때 냉정한 목소리가 장내를 갈랐다.
바로 음여창의 목소리였다.
“하오문에 관한 것입니까?”
“흐음. 우리는 분명 초면인 걸로 알고 있는데, 자신을 소개하는 게 먼저 아닌가?”
피하기는커녕 정면 돌파하는 반호진의 대답에 음여창이 짐짓 얼굴을 굳혔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나가는 것이었다.
반호진은 분명 대단한 고수이지만 배분은 그가 높았다.
그래서 음여창은 짐짓 엄한 눈빛으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제가 누군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나?”
“공동파의 새 장문인이신 음 대협 아닙니까?”
“역시 하오문과 깊은 관계라는 게 여기서 드러나는군.”
담현은 물론이고 선우청과 모용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일부러 하오문과 엮으려는 게 눈에 보여서였다.
“꼭 하오문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죠.”
“예를 들면 금가장?”
“저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시군요.”
반호진이 여유롭게 웃었다.
대놓고 자신과 하오문을 엮으려고 하는 게 보였으나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음여창은 반호진을 처음 보는 것이지만 그는 달랐다.
지난 삶에서 만났었기에 반호진은 음여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자네에 대해서 모를 수가 있나? 웬만한 무인은 다 알고 있을 텐데.”
“이상하군요. 저에 대해 잘 알고 있으신 분이 저를 의심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더구나 상황이 좀 그렇지 않나. 제자가, 사형제가 등 뒤에서 칼을 꽂는데 자네라고 의심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나?”
“그렇긴 하지요.”
“그러니 증명해 주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자네를 믿을 수 있게.”
음여창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자신은 결코 반호진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그 가식적인 모습에 몇몇 수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증명이라.”
“듣자 하니 지금도 하오문의 소문주가 무상문에서 머물고 있다고 하던데.”
“거기까지 알고 계시면 하오문과 천사맹의 관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시겠네요.”
“모르는 사람이 있나? 자네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네.”
“그런데도 절 의심하는 겁니까?”
반호진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무심한 눈빛으로 음여창을 응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늘한 반호진의 시선에도 음여창은 얄미운 미소를 머금었다.
“허어. 돌다리도 두드려 본 후 건너라고 하지 않나. 이런 사안은 몇 번이고 두드려도 부족함이 없지. 더구나 상황이 상황이지 않나. 자네야 방장의 제자이니 믿을 수 있지만 하오문은 다르지.”
“맞소이다.”
여기저기에서 맞장구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음여창과 친분이 있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의 말대로 반호진은 믿을 수 있지만 하오문은 달랐다.
더욱이 반호진의 나이가 어린 만큼 하오문에 휘둘릴 가능성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주 좋아.’
곳곳에서 동조하는 모습에 음여창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모든 게 그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어서였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아직 경험이 일천한 애송이지.’
무공만큼이나 중요한 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처세술이었다.
지금까지는 담현의 제자이고 무경이 높다 보니 반호진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겠으나 그는 달랐다.
이런 쪽의 일은 전문가였기에 음여창은 자신이 있었다.
반호진이라는 패를 아주 유용하게 쓸 자신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같은 생각인 모양인데, 증명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모양이군요.”
“내게 아주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자네에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좋고.”
완벽하게 만들어진 판에 음여창이 씨익 웃었다.
이제 화룡점정처럼 한마디만 하면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아서였다.
“그게 무엇입니까?”
아무 대답이 없는 반호진을 대신해 위지세가주가 물었다.
음여창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모르고 얼굴 가득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에 반 소협이 적극적으로 임하는 것이오. 그것보다 더한 증명이 있겠소이까? 게다가 소림검신이 앞장선다면 후기지수들에게도 큰 힘이 되지 않겠소.”
무상문의 주인인 것을 알면서도 음여창은 일부러 소협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자신과 동급이 아닌, 일개 후기지수로 대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필요할 때는 별호를 사용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세력으로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개인으로서는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확실히 반 공자가 나선다면 분위기가 달라지기는 하겠군.”
“든든하기도 할 테고.”
“암! 반 문주의 실력은 확실하니까!”
반호진과 함께 새외무림과 싸웠던 수장들도 은근슬쩍 동조했다.
전쟁 때 반호진의 실력을 직접 봤기에 내심 그때처럼 나서 주었으면 싶어서였다.
얼마나 고생했는지도 알고, 앞장서서 싸우는 걸 그리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지만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반호진이 나서 주길 원했다.
그래야 승리할 가능성도 높고 정천맹의 피해도 줄일 수 있어서였다.
‘가식적인 것들.’
그런 수장들의 모습에 음여창이 마음속으로 조소했다.
그의 눈에는 수장들의 시커먼 속내가 훤히 보여서였다.
더불어 그들의 질시도.
소림사와 반호진이 잘나갈수록 시기와 질투 역시 커졌기에 많은 이들이 은연중에 고꾸라지길 바랐다.
“허!”
“다들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장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음여창의 의견에 사람들이 점점 더 동조해 갈 때 대성일갈과도 같은 혀 차는 소리가 장내를 갈랐다.
뒤이어 오중건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음여창을 시작으로 동조하던 이들과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했다.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나 그래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듣자듣자 하니까 점점 가관이네?”
특히 팽만철의 분노가 대단했다.
물에서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행태에 그는 어이가 없었다.
특히 팽만철은 이런 분위기를 조장한 음여창을 노려봤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그라지만 이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흠흠! 팽가주님. 말씀이 심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도 엄연히 일파의 수장인데…….”
“말 잘했네. 나이도 있고 강호의 선배라는 작자들이 새파랗게 어린 후기지수를 후려치려고 해?!”
팽만철의 고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진기를 담은 것도 아닌데 천막이 크게 펄럭일 정도의 노성에 몇몇 이들이 귀를 부여잡았다.
음공에 당한 것과도 같은 고통이 느껴져서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염치가 없어서야.”
거기에 당우혁이 싸늘한 눈빛으로 음여창에게 동조한 이들을 노려봤다.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선을 넘어도 과하게 넘어서였다.
더구나 이 자리에는 반호진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데 은혜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원수로 갚고 있었다.
“이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장내에 오중건이 피를 토할 듯이 소리쳤다.
반호진의 무명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그래도 아직 후기지수였다.
그런 반호진을 이끌어 주기는커녕 오히려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오중건이 경멸 어린 시선을 보냈다.
“오 대협. 우리는 그런 뜻이 아니라…….”
“우리는 그저 함께 싸우자는 뜻으로 말을 한 것이외다.”
발끈하는 팽만철과 오중건의 모습에 몇몇 이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여창이 공동파의 새로운 장문인이라지만 팽만철과 당우혁, 오중건과 비교하면 무게감이 떨어졌다.
더욱이 반호진의 스승이 소림사의 방장인 담현이었기에 다들 그를 힐끔거렸다.
“막말로 우리가 반 공자더러 선봉장이 되어 달라고 한 건 아니지 않소이까.”
“우리들이 바라는 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전했으면 좋겠다, 정도입니다.”
개방과 하북팽가, 사천당가가 흩뿌리는 기세가 심상치 않아서인지 다들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런데 신기한 건 정작 이 판을 만든 음여창은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다는 점이었다.
어느 순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스윽.
“싸우실 것 없습니다. 제가 결정하면 깔끔하게 정리되는 일이니까요.”
모두가 음여창에 대해서 깜빡했지만 단 한 명만은 달랐다.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반호진은 처음부터 음여창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럼 우리와 같이…….”
“아니요. 증명할 방법은 제가 싸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제가 다시 남창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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