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5장. 의심의 싹. -03
소림사 방장의 막내제자지만 하오문과 꽤나 가까운 사이인 걸 많은 이들이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하오문의 소문주가 여인인 것도 알려졌기에 반호진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억측하는 이들도 수두룩했다.
때문에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가 반호진을 탐탁지 않게 봤다.
반호진을 통해 정천맹의 정보가 천사맹 쪽으로 유출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이를 미워하는 게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명분까지 있으니 더더욱 씹고, 뜯기에 좋겠지요. 가뜩이나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정확하게는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이지. 그리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알고 있습니다. 근데 저는 모든 이의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없고요. 그저 제 자신과 주변만 행복하고 안전하면 됩니다.”
“욕심이라.”
담현의 눈빛이 깊어졌다.
제자의 말에서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어서였다.
동시에 반호진의 생각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래서 반호진이 진산제자가 아닌 속가제자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저에게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하긴. 불같은 성격의 팽가주조차 너에게는 약한 모습이니까.”
“불같기보다는 그냥 흉포하죠.”
“허허허.”
담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단어를 순화해서 말하긴 했으나 그 역시 반호진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보다 대사형은 어떻습니까? 제가 전해 듣기로는 위중하다고 들었습니다.”
“정신은 차렸어. 몸 상태는 안 좋지만. 이러지 말고 직접 보거라.”
“알겠습니다. 방이랑 척이는 어떻게 할래?”
“우리는 방장께 인사드렸으니 아버지께 가야지.”
“저도요.”
조용히 사제 간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선우방과 모용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림사만큼은 아니라지만 갑작스러운 충돌로 선우세가와 모용세가 역시 어느 정도 피해를 입었을 것이기에 둘 다 걱정이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대사형과 만나고 인사드리러 갈게.”
“알았어.”
“꼭 오셔야 합니다?”
선우방과 모용척의 얼굴이 밝아졌다.
반호진이 직접 찾아온다고 하자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래.”
“이륭이랑 너희 둘은 형님 보필 잘하고.”
“네 걱정이나 해라.”
자기 앞가림도 벅차 하는 모용척이 짐짓 형이라도 된 것처럼 말을 하자 조용히 앉아 있던 정이륭이 코웃음을 쳤다.
선우방이라면 모를까 모용척이 이런 말을 하니 어이가 없어서였다.
그건 서조운과 사마의성도 같은 생각인지 대놓고 헛웃음을 흘렸다.
“형이나 사고 치지 마세요.”
“뭐야?”
“형님은 저희들이 알아서 잘 챙길 테니까.”
“흥!”
퉁명스럽기는 해도 서조운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알았기에 모용척은 콧방귀를 뀌며 반호진과 담현을 따라 천막을 나섰다.
그런데 뭔가 자꾸 아쉬운지 근처의 다른 천막으로 향하는 반호진을 모용척이 계속 뒤돌아봤다.
“오셨습니까, 방장.”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법무가 머무는 개인 천막으로 들어가자 간호 겸 호위를 하고 있던 일대제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황이 안 좋아서 그런지 극도로 긴장해 있는 게 반호진의 눈에는 보였다.
“좀 쉬고 있거라. 법무는 내가 볼 터이니.”
“알겠습니다.”
그걸 담현도 느꼈는지 휴식을 명했다.
소림사의 숙영지가 정천맹의 진영 중앙에 위치해 있다고 하나 상황이 안심할 수 없었기에 일대제자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바짝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담현은 지금이라도 쉬라고 지시하고는 법무에게 다가갔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은데요.”
천막을 나서는 일대제자와 눈인사를 한 반호진이 법무에게 다가갔다.
승복을 입고 있기는 했으나 거의 걸친 상태라 몸통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새하얀 붕대가 훤히 보였다.
“정신은 차렸단다. 근데 약 때문인지 깨어 있는 시간보다 잠들어 있는 시간이 더 많더구나.”
“단전은 어떻습니까?”
“가까스로 몸을 비튼 덕분에 단전은 지켜 냈는데 상처가 깊어서 몇 달은 요양해야 한다고 하더구나.”
“다행입니다.”
반호진이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가 흘러나온 부위가 배였기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한 듯했다.
“정말 다행이지. 만약 단전이 찢어졌다면…….”
담현이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였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지 않습니까. 너무 떠올리지 마세요. 그보다 본사로 옮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곳의 상황도 썩 좋지 않은데.”
“아무래도 그게 낫겠지. 상황이 어찌 변할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아. 안정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고 만약에 배신자가 섞여 있다면 큰일이니까. 그렇다고 장로들과 함께 보낼 수도 없고.”
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뜩이나 이번 전투로 큰 피해를 입은 정천맹이었다.
고수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이었기에 소림사의 장로들을 단순히 호위로 보내는 건 전력 낭비였다.
“대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음?”
“장로님들보다 나이도 어리고, 체력도 뛰어나죠.”
장난기 섞인 반호진의 한마디에 담현의 동공이 서서히 커졌다.
눈앞에 두고도 반호진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맞아. 네가 있었지.”
“대사형 대신 제가 사부님을 보필하겠습니다.”
“허허허허.”
어둡기만 하던 담현의 표정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반호진의 말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서였다.
“형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희도 있습니다. 본가 대신에 제가 왔다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방장.”
“저는 방천문 대표입니다.”
“사마세가도 참전하겠습니다.”
밝아진 담현의 표정에 서조운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눈치껏 대화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가 물꼬를 트자 정이륭과 사마의성도 조심스레 대화에 참여했다.
“고맙구나. 사실 연락을 하고 싶어도 염치가 없어서 그러지 못했거든.”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서 은근히 막아 주셨다는 것을요.”
“염치가 있는 이들도 있지만, 전혀 없는 이들도 있더구나. 네가 한 고생이 얼마인데. 그렇다고 전공을 가지고 네가 요구한 것도 없는데.”
잊고 있던 걸 꺼내자 내심 열불이 치솟는 모양인지 담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어조에 노기도 살짝 서렸다.
몰염치해도 그렇게 몰염치할 수가 없어서였다.
“원래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듣고 싶은 것만 믿는 게 인간이니까요. 너무 그런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게 저는 정신건강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별것도 아닌 인간들에게 신경 쓰느니 제 자신과 주변 사람을 챙기겠습니다.”
“이럴 때 보면 확실히 불가의 제자같단 말이지.”
담현이 흐뭇한 얼굴로 반호진을 지그시 바라봤다.
누구 제자인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잘 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그때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대화 소리에 법무가 깬 것이었다.
바짝 마른 입술이 벌어지며 창백한 안색의 법무가 눈꺼풀을 꿈틀거렸다.
“대사형.”
“……사제?”
힘겹게 눈을 뜨려고 노력하던 법무가 놀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눈동자를 움직였다.
“예. 접니다.”
“사제가 어떻게?”
“대사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제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못난 모습을 보였어.”
법무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것과 달리 반호진은 딱히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
보통의 무인이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자신의 무명에 취해 거들먹거리기 마련인데 반호진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모든 게 귀찮다는 듯이 은거하듯 무상문에서만 생활했는데 그런 반호진의 평화를 자신이 깬 듯하자 미안했다.
“못난 모습은 배신자가 했죠. 대사형 탓이 아닙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제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내가 못나서니까.”
“저는 물론이고 사부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맞아.”
반호진의 옆에 있던 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제자의 말에 십분 공감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법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었다.
만약 법무를 찔렀던 손가락이 한 치만 아래였어도 죽거나 폐인이 되었을 것이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괜찮아.”
반호진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굳이 무거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어서였다.
법무가 자책하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기도 했고.
“이곳은 저에게 맡기시죠.”
“으음.”
“설마 못 미더우신 건 아니죠?”
“그럴 리가. 나보다 사제가 훨씬 낫지. 모두가 알고 있기도 하고. 다만 미안해서 그렇지.”
“미안하시면 얼른 쾌차하시죠. 그래서 최대한 빨리 전장으로 돌아오세요.”
반호진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벼운 말투로 부담감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였다.
“내가 돌아오기 전에 끝날 것 같은데.”
“아무리 저라도 그건 힘듭니다. 새외무림과는 상황이 다르니까요.”
“최대한 빨리 돌아오마.”
담현이 실소를 흘렸다.
그조차도 쉽게 꺼내지 못한 말을 자연스럽게 꺼낸 걸 넘어 목적을 이루어 내서였다.
“약속하신 겁니다.”
“물론이야.”
“지금 바로 출발하시죠.”
“응?”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법무는 물론이고 담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법무가 허락했다지만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반호진은 절대 아무 생각 없이 진행시키는 게 아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부님께서도 걱정하시는 게 습격이지 않습니까. 아예 정보가 새어 나가기 전에 움직이는 겁니다. 장로님께서 업고 이동하면 정보가 전달되는 속도보다 따르니까요.”
“확실히 그렇긴 하지.”
담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서였다.
“일종의 속도전입니다. 가장 안전한 방법이고요.”
“그리 하겠습니다.”
법무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자신이 있어 봤자 짐밖에 안 되었기에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찍 떠나는 게 사문과 사부를 위해 더 나았다.
“괜찮겠느냐?”
“제가 직접 움직이는 건 무리지만 업혀 가는 것이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게 최선입니다.”
“그래.”
담현은 결정을 내렸다.
여러모로 따져 봐도 이게 최선이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속담도 있었고.
그래서 담현은 곧장 준비했다.
여전히 무거운 분위기가 감도는 회의장의 시선이 한곳에 쏠렸다.
담현과 함께 들어오는 청년에게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특히 팽만철을 비롯해서 남궁호, 당우혁의 반응이 격렬했다.
이곳에서 볼 줄 몰랐던 이의 등장에 크게 놀란 것이었다.
“네가 어떻게?”
“제가 못 올 곳에 왔습니까?”
“그건 아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자격이 충분하지.”
팽만철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호에서의 위상은 물론이거니와 이제는 일문의 수장이 된 게 반호진이었다.
그러니 회의에 참여할 자격은 충분했다.
“이제는 일문의 주인이 되었으니까.”
“아마 모르는 이들이 없을걸?”
팽만철과 달리 빠르게 신색을 회복한 남궁호와 당우혁이 입을 열었다.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을 띄고서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반호진의 등장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어이가 없군. 어린놈에게 체통도 잊고.’
북해빙궁주의 손에 방만춘이 죽어 새로이 공동파의 장문인이 된 음여창이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에게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물론 그도 반호진의 업적을 폄하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었다.
‘잠깐만. 저 애송이에게 꼼짝 못 한다는 건 반대로 저 핏덩이만 쥐락펴락할 수 있으면 다른 이들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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