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5장. 의심의 싹. -01
“감사합니다.”
우송덕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였다.
자신을 믿고 전적으로 지원한다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우송덕은 반드시 보답하고 싶었다.
“고마우면 결과로 보여 줘. 그 전까지는 의원으로서 제 몫을 다해 주고.”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중요한 이야기는 끝났으니 이제는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을 가져 보자고. 참, 식구들과는 다 인사를 나눴나?”
“반 정도는 한 것 같습니다.”
식구라는 말이 우송덕은 참 정겹게 들렸다.
살아 있는 생명임에도 도구처럼 다루었던 살방과는 너무나 다른 표현이고 분위기였다.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사실 우송덕은 이틀째 되는 날에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었다.
“각자 하는 일이 있어서 한자리에 모이기가 힘들어서 그럴 거야. 인사야 뭐, 차차 나누면 되니까. 다들 개성은 있지만 나쁜 성격은 없어서 친해지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소인도, 아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 지금 막 떠올랐는데 여자아이도 괜찮을까요?”
“여자는 사람 아닌가? 여자라고 해서 꼭 의녀만 할 필요는 없잖아? 의술을 익히다가 의원이 되고 싶으면 의원이 되는 거고, 의녀가 되고 싶다면 의녀를 하면 되지. 난 여자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아. 말했다시피 내가 바라는 건 딱 두 가지야.”
“인성과 실력.”
“그래. 그 두 가지만 봐.”
반호진의 말에 우송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대답으로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더해서 나이도 따지지 않기로 했다.
‘나도 내년이면 지천명인데 새롭게 문도가 되었으니.’
우송덕은 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반호진이 말한 대로 딱 두 가지 조건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 두 가지만 충족된다면 나이가 어떻든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나에게 제자라니…….’
우송덕의 표정이 일순 멍해졌다.
지금의 상황이 꿈처럼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우송덕은 마음을 다잡았다.
‘반드시 성공한다. 절대 주군을 실망시키지 않겠어.’
집이 생겼고, 목표가 생겼다.
심지어 목표는 그가 바라 마지않던 꿈과 일맥상통했기에 우송덕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월! 워얼!
“오냐.”
밖에 나오기 무섭게 후다닥 달려와서 인사하듯 크게 짖는 삼형제를 보며 반호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가 동시에 반호진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반가운 만큼 만져 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쉬운 남자가 아니었기에 삼형제의 애교에도 뒷짐을 풀지 않았다.
끼이잉! 끼잉!
배를 까 봤자 그사이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린다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깨달았기에 삼형제는 앓는 소리를 내며 끈질기게 질척거렸다.
몸으로 막듯이 온몸을 비벼 댔다.
“그렇게 해도 안 만져 준다.”
온몸으로 애교를 부렸지만 반호진은 냉정했다.
오히려 다 자란 녀석들이 애교를 부리자 냉엄한 눈빛으로 세 마리를 바라봤다.
추욱.
미동도 없는 반호진의 모습에 세 마리의 꼬리가 동시에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한데 웃긴 건 그러면서도 다른 곳으로 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형님!”
“너도 산책 나온 거야?”
“네. 일흑이도 볼 겸해서요.”
“고양이?”
반호진의 시선이 사마의성의 뒤로 향했다.
새까만 털을 가진 검은 고양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반 보 정도 뒤에서 따라오고 있어서였다.
털만큼이나 새까만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짙게 서려 있었다.
“야생에서 사는 녀석인데 상처 입고 죽어 가던 걸 치료해 주었더니 아예 이곳에 터를 잡았어요. 의외로 애교도 많고, 쥐도 잘 잡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부총관도 되게 좋아하세요.”
“쥐를 잡으려고 키우는 곳이 많기는 하지.”
반호진을 호위하듯 딱 붙어서 앉아 있는 삼형제와도 친해진 모양인지 검은 고양이는 딱히 경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 보는 반호진을 지그시 째려봤다.
“형님을 처음 봐서 이러는 것 같아요.”
“저게 정상이지. 고양이는 원래 좀 도도하니까.”
“키워도 괜찮겠죠?”
“허락이 필요한 단계는 넘은 것 같은데. 근데 이름이 일흑이야?”
“네.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처럼 저도 숫자를 넣었어요. 괜찮죠?”
사마의성이 싱긋 웃으며 쭈그려 앉아서 이마를 손가락 끝으로 살살 긁어 주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은지 일흑이가 귀를 움직이며 눈을 감았다.
“통일성은 있네. 사이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삼형제 성격이 좋잖아요. 처음에는 낯을 좀 가렸는데 지금은 가끔 같이 놀기도 해요. 제가 보기에는 삼형제가 받아 주는 것 같지만요. 물어보니까 나이는 삼형제와 비슷할 거 같대요.”
냐아아옹.
일흑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자신이 원하는 곳을 행동으로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눈을 떠서 반호진을 바라봤다.
“형님도 만져 보실래요?”
“딱히. 난 고양이를 만져 본 적이 없어. 지나가다 본 적은 있어도.”
“고양이도 매력 있어요.”
“키워 봤어?”
“아주 어렸을 적에요. 산에서 만난 고양이라 키웠다고 하기에는 좀 애매하지만요. 그냥 때 되면 밥 챙겨 주고 놀아 주는 정도였어요.”
말은 애매하다고 했지만 표정을 보면 아니었다.
진심으로 아껴 주고 사랑해 주었다는 게 얼굴에 다 드러났다.
“일흑이도 잘 키워 봐. 동물에게 정을 주고 기르는 건 정서적으로도 좋으니까.”
“맞아요. 이 아이들 덕분에 새로 온 애들이 더 빠르게 적응하는 것 같아요. 삼형제는 친화력으로, 일흑이는 매력으로요.”
“매력이라.”
사마의성은 일흑이가 연신 매력 있다고 말했지만 반호진은 수긍하기 힘들었다.
고양이 치고는 제법 잘생긴 듯했지만 그렇다고 매력이 넘치는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아서였다.
“자주 보시면 형님도 알게 되실 거예요. 아주 가끔씩 먼저 다가와서 애교도 부리거든요. 저한테는 늘 애교쟁이지만.”
“나한테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 애교는 이 녀석들만으로도 충분해.”
월! 월! 월!
자신들을 말하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삼형제가 크게 짖으며 꼬리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에 반호진은 결국 한 번씩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형님도 아시죠? 다른 사람들에게 부리는 애교와 형님에게 부리는 애교의 강도가 다르다는 것을요.”
“모를 수가 있나.”
“이 녀석들에게 형님은 부모나 마찬가지예요. 형님이 안 계시면 매일 찾기도 하고요.”
“이제는 다 큰 녀석들이.”
반호진이 혀를 찼다.
새끼일 때야 어리니 엉겨도 그러려니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일어서면 곽춘과 엇비슷한 녀석들이 여전히 자신을 찾는다고 하자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만큼 형님을 의지하고 따른다는 거죠.”
“다 컸으면 이제 자립할 줄도 알아야지.”
“흐음. 다 크긴 했어요. 셋 다 아빠가 되었거든요.”
“어?”
웬만해서는 평정심이 흔들리지 않는 반호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도로 놀란 것이었다.
“지금 떠오르신 게 맞을 거예요.”
“세 녀석 다 새끼를 낳았다고?”
“곧 나올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어떻게?”
“마을을 돌아다니던 떠돌이 암컷을 임신시킨 것 같아요. 산에서 살아가는 들개들은 보통 무리 지어 다니니까요.”
이어지는 사마의성의 설명에 반호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남자가 됐네?”
“그런 셈이죠.”
“암컷은 어디에 있어?”
“뒷마당 구석진 곳에 있어요. 목장 근처가 안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그곳에 땅굴을 팠더라고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반호진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다 자랐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갑자기 가장이 되었다고 하자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감정은 대견함이었다.
“먹이는?”
“춘이랑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챙겨 주고 있어요. 직접 만지거나 보려고 하지는 않고 땅굴 앞에다 그릇에 담아서 줘요. 특식으로 계란이나 오리 알도 주고요.”
“그런데 나한테 와 있단 말이야? 자기 부인한테는 가지 않고?”
“부인보다 형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저는 이해가 돼요.”
암컷과 새끼 걱정은 전혀 안 하는 모양인지 귀를 잔뜩 뒤로 젖힌 채 반호진을 향해 꼬리를 흔들었다.
어떻게든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다는 듯이 갈구하는 모습에 반호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 봤어?”
“네. 일흑이도 같이 갔어요.”
“나도 가 봐야겠다.”
“그럼 저랑 같이 가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사마의성이 생긋 웃으며 따라오라는 듯이 앞장섰다.
잠시 후 반호진은 뒷마당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작은 땅굴 세 개를 발견했다.
“교묘한 곳에 잘 만들었네.”
“형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죠?”
“응. 근데 이왕이면 개집을 지어 주지. 만드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을 텐데.”
“떠돌이 개이긴 한데 사람 손을 제대로 탄 게 아니라서 오히려 싫어할 수도 있어요. 세 녀석이야 저희 식구가 익숙하지만 암컷은 아니니까요. 불안한 상태면 새끼를 낳아도 바로 잡아먹는 경우도 있대요. 그래서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쪽으로 결론을 냈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애정 표현을 자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삼형제는 반호진이 직접 거둔 아이들이었다.
조막만 한 새끼 때부터 키운 만큼 애정이 없지는 않았다.
단지 티를 안 내서 그런 것뿐.
그런 삼형제가 처음으로 낳는 새끼였기에 반호진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세 마리의 선택을 존중했다.
“제가 매일 살펴보는데 암컷들 상태는 괜찮아요.”
“성격이 사납지는 않고?”
각자의 땅굴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있던 암컷들이 삼형제의 등장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반호진과 눈이 마주치고는 멈칫거렸다.
초면인 반호진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할짝할짝.
그런 암컷들의 모습에 삼형제가 땅굴로 후다닥 들어가서는 얼굴을 핥았다.
괜찮다고,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해 주는 듯한 행동에 날카로워졌던 눈매가 풀어졌다.
“낯은 가리는데 이를 드러내지는 않아요. 춘이를 비롯해서 남창에서 자랐던 애들하고는 이래저래 마주친 적이 있는지 밥을 챙겨 주러 오면 가끔 땅굴에서 나오기도 해요.”
“그래도 능력 있네. 각자 짝을 데려온 걸 보면. 나보다 낫다.”
“하하하.”
진심이 담겨 있는 반호진의 중얼거림에 사마의성도 동의하듯이 웃었다.
그리고 옆에는 일흑이 얌전히 앉아서 땅굴 속을 지켜보고 있었다.
“배를 보니 곧 새끼를 낳을 것 같은데.”
“아이들도 그러더라고요. 배가 저 정도 나오면 슬슬 낳을 때가 되었다고. 그래서인지 새끼를 낳으면 달라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난 소저도 그렇고.”
“희주야 미리 침을 발라 놓았으니까.”
“유화랑 휘경이, 휘성이도 키우고 싶어 하더라고요.”
“흐음.”
반호진은 미간을 좁혔다.
아직 어린 세 명이 미덥지 않아서였다.
그나마 예유화는 나을 것 같지만 쌍둥이 형제는 영 미덥지 못했다.
“오빠!”
“음?”
그때 멀리서 난희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목소리가 상당히 다급했다.
게다가 달려오는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무슨 일이시지?”
한눈에 봐도 무언가 일이 생긴 것 같은 난희주의 표정에 사마의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반호진만큼은 아니지만 난희주 역시 웬만해서는 평정심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사마의성은 눈썹을 모았다.
“큰일났어!”
“큰일?”
“소림의 대제자께서 크게 다치셨대!”
“그게 무슨 말이야?”
반호진의 동공이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대경한 것이었다.
사마의성 역시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렸다.
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