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4장. 제삼의 선택. -03
선우방을 보며 반호진이 개구지게 웃었다.
필요치 않다면 너에게는 공개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 모습에 선우방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공개해 주면 나야 좋지. 암월교보다는 못하다지만 그래도 살방의 은신술인데.”
“받을 거면서 튕기기는.”
“두 번 정도는 거절하는 게 일반적인 예의이니까.”
“난 두 번은 없어.”
“근데 이러면 우리가 하는 것에 비해 너무 많이 받는 거 같은데.”
선우방의 말에 서조운, 모용척, 정이륭, 사마의성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이 생각하기에도 가장 큰 활약을 한 반호진보다 얻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애들 좀 봐줘. 유 호법님이 계시지만 절정고수의 조언은 또 다르니까.”
“크게 도움은 안 될 거 같은데.”
선우방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슷한 경지라면 모를까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아이들에게 조언이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였다.
“그건 각자 알아서 생각해 봐야지. 꼭 무공이 아니더라도 인생의 교훈이라든가. 아니면 대련도 있고.”
“저는 할게요.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이렇게라도 보답할 수 있다면 해야죠. 그렇다고 형님이 돈을 받으실 것도 아니고.”
“역시 나에 대해 잘 안다니까.”
“여기서 제가 제일 오랫동안 형님과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서조운이 히죽 웃었다.
은근슬쩍 우쭐거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선우방이 반박했다.
“가장 먼저 안 건 나인데?”
“안면을 튼 건 중요하지 않죠. 중요한 건 함께한 시간입니다. 자고로 정이라는 건 같이 부대껴야 생기는 거니까요. 괜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죠.”
서조운이 선우방을 보며 조목조목 따졌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함께한 시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더구나 반호진과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끈끈한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쓸데없는 걸로 싸우지 말고 일단 이렇게 알고 있어.”
“형님.”
“말해.”
“저희야 공개해 주신다면 감사하지만 어떻게 보면 무공이 유출되는 건데 괜찮으세요?”
사마의성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반호진에게로 쏠렸다.
안 그래도 다들 걱정하는 게 바로 이것이었다.
또 모두에게 공개한다는 건 각 가문의 정보 조직이 똑같은 은신술을 익힐 수도 있다는 걸 뜻했기에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흐음. 다들 무공비급에 있는 그대로 익히려고 했어?”
“어?”
“에?”
반호진의 반문에 네 사람의 눈동자가 다 확대되었다.
짧은 한마디였으나 어떤 의미로 말했는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어서였다.
“그러려고 했다면 실망인데.”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허참. 맞아. 똑같은 무공이라도 어떻게 개량시키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지는데.”
“거기다 각 가문의 내공심법이 다르니 거기에 맞게 변형시켜야 해요. 어쩌면 싹 다 뜯어고쳐야 할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공부도 될 테고.”
“허어.”
선우방, 서조운, 사마의성, 모용척이 똑같이 입을 벌렸다.
여기까지 생각해서 말한 걸 알자 다들 놀란 것이었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언제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어쩌다 보니.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어.”
“그나저나 이거 일이 묘하게 흘러가는데. 경쟁 아닌 경쟁이 되겠어.”
선우방의 중얼거림에 세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
친해졌다고 하나 경쟁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더구나 조건은 모두가 같았기에 결과는 오로지 각자의 실력으로 갈렸다.
“우리 공평하게 해요. 형님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 걸로.”
“그럼 다른 사람의 조언은 괜찮고?”
“그것도 안 되죠. 이륭이 형 사부는 명왕이잖아요. 이건 형평성에 어긋나요.”
서조운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삼자가 끼어들면 절대 공평해지지 않아서였다.
“맞아. 그럴 거면 모두에게 다 조언을 받는 게 맞지.”
“근데 이것도 문제인 게 본가의 무공도 밝혀야 하잖아. 그러니까 혼자서 하는 게 가장 깔끔해.”
사마의성과 모용척까지 동조하자 정이륭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의 말처럼 형평성에 어긋나기도 했고.
한데 묘한 건 누구의 도움도 안 받는 것으로 하자 승부욕이 끓어오른다는 점이었다.
‘상황이 재미있게 흘러가네.’
하나같이 승부욕을 불태우는 네 사람의 모습에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
똑똑똑.
“문주님. 소인 우송덕입니다.”
“들어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처음 봤을 때와 달리 깔끔한 황의경장을 입은 우송덕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앉아 있는 반호진에게 다가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맞아. 슬슬 대화를 나눌 때가 되었잖아?”
“그렇습니다.”
자리에 앉으며 우송덕이 마른침을 삼켰다.
반호진의 한마디에 잔뜩 긴장한 것이었다.
“긴장 풀어. 다른 사람이 보면 내가 잡아먹으려고 하는 줄 알겠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여전히 잔뜩 경직되어 있는 우송덕의 모습에 반호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암만 말해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아서였다.
제 딴에는 나름 웃으려고 한 것 같은데 반호진이 보기에는 얼굴을 찡그리는 것으로 보였다.
“지내는 건 어때?”
“좋습니다.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사람들도 너무 좋습니다.”
굳어 있던 우송덕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반호진과의 독대가 부담스러운 건 여전했지만 대화가 이어지자 긴장도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다행히 불편하지는 않은 것 같네.”
“불편하다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런 평온한 일상을 꿈꿨거든요.”
“그거 좋지.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 그게 내 꿈이기도 해. 근데 이상하게 쉴 만하면 방해꾼들이 나타난단 말이지.”
“하하하.”
얼굴 가득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내는 반호진의 모습에 우송덕이 어색하게 웃었다.
저런 표정을 보면 풀어지던 긴장이 바짝 조여졌다.
정신이 번쩍 든다고나 할까.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은 달랐다.
“아이들은 어때? 내가 보기에는 많이 괜찮아진 것 같은데.”
“약물치료는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도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은 없습니다. 감정이 조금 메마르긴 했는데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요. 시간이 좀 더 흐르면 감정이 다양해질 겁니다. 아, 이건 확신은 아니고 제 예상입니다.”
“다행이네. 사람은 사람다워야지. 살인병기로 키워졌지만 사람이 아닌 건 아니니까.”
“그래서 다들 문주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문주님께서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처럼 생활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뭐, 그렇긴 하지. 근데 몇 명이나 남을 것 같아?”
무상문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그보다 우송덕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반호진은 넌지시 물어봤다.
“확실하게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열 명 안팎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 같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정확한 숫자는 아닙니다. 원하신다면 내일 아침에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억지로 붙잡아 둘 생각은 없으니까. 물론 감시가 붙는다는 건 말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어찌 보면 냉정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우송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배신에 대한 응징은 당연한 것이었다.
더욱이 거짓말을 한 것이기에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갈까? 오늘 이 자리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니까.”
차를 한 모금 들이켠 반호진의 시선이 우송덕에게 닿았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유한 눈빛이었으나 놀랍게도 우송덕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전히 동공은 흔들렸으나 처음 마주 봤을 때와 비교하면 확연히 달랐다.
“소인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곳에서 지내고 더 단단해졌습니다.”
“이곳이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보네.”
“예.”
“그럼 내 결정만 남은 셈인가.”
조금 풀어졌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에 바짝 긴장한 것이었다.
“앞으로도 함께했으면 좋겠어. 무상문도로.”
“가, 감사합니다! 문주님과 무상문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 역시 약속할게. 우 의원에게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필요한 의서가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 구할 수 있는 데까지는 구해 볼 테니까.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얼마든지 하명하셔도 됩니다.”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숙인 우송덕이 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경청하겠다는 듯이 눈을 빛내는 모습에 반호진은 말을 이었다.
“알겠지만 현재 본문의 의원은 우 의원뿐이야. 그래서 말인데 제자들을 양성해 주었으면 해.”
“제……자요?”
기합이 바짝 들어간 자세로 앉아 있던 우송덕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눈알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 격렬한 반응에 반호진이 덩달아 놀랐다.
“내가 무리한 부탁을 했나?”
“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너무 감격해서 그만…….”
“감격? 왜?”
“제 의술을 전수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이제는 노예가 아니잖아? 소인이라는 말도 쓰지 마. 습관이 된 것 같은데 고쳐.”
말로만 감격한 게 아닌지 우송덕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누군가가 톡 건들면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오히려 단호하게 말했다.
이참에 말투도 고치고 감정도 추스를 수 있도록.
“그리하겠습니다!”
“어쨌든 할 의향은 있다는 거지?”
“예. 그런데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주군. 의술이라는 게 워낙에 공부해야 할 게 방대해서 단기간에 성과가 나오기 힘듭니다.”
“알지. 내가 설마 그걸 모를까. 더구나 처음부터 가르치는 건데. 나도 당장 필요해서 제자를 양성하라고 하는 게 아니야. 당장은 도움을 청할 곳이 꽤 돼. 다만 내가 원하는 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본문에 오래 있을 의원을 원하는 거야. 정확하게는 문도로.”
“실력과 인성을 전부 봐야 하겠군요.”
우송덕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찌 보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지만 그래서 어려운 것이기도 했다.
실력이 좋거나 인성이 좋은 이들은 찾아보면 꽤 있었으나 둘 다 충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굳이 의원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둘 중에 한쪽을 고르라면 인성이야. 실력은 느려도 키울 수 있지만 인성은 바로잡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 인성 쪽에 중점을 두고 선별했으면 좋겠어.”
“인원은 얼마나 뽑을까요?”
우송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명의 의원을 키우는 데는 오랜 시간도 필요하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게다가 투자한다고 해서 결과가 비례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우송덕으로서는 반호진이 어느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아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 의원이 생각하기에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 며칠 지내면서 느꼈겠지만 본문의 규모는 점차 커질 거야. 표사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하고. 그러니 의원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무공수련을 하다가 다치는 경우도 있으니까. 미래를 보고 양성하는 것이니만큼 적은 것보다는 넉넉한 게 낫다고 생각해.”
“그럼 두 명에서 다섯 명 정도를 생각하고 찾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해.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찾아 봐. 인성이라는 게 단시간에 파악하기 힘든 거니까. 몇 번이고 확인한 다음에 결정해도 돼. 필요한 게 있으면 나나 부총관에게 부탁하고.”
“알겠습니다.”
“의술에 관한 서적은 틈틈이 모아 놓은 게 있는데 내가 문외한이다 보니 일단 무작정 모아 놓기만 했어. 그러니 우 의원이 봐서 필요한 것들은 따로 모아 놓고 이상한 것들은 버려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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