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4장. 제삼의 선택. -02
“변덕일 수도 있지. 사람 마음이라는 게 뒷간에 들어가기 전과 후가 극명하게 다르잖아? 그리고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었어. 다른 사람들의 생각처럼 몰래 살방주에게 합류할 수도 있으니까.”
“저 역시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쉽게 믿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대협께서 공평하게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겁니다. 저를 한 명의 사람으로서 대우해 주셨고요. 이런 사람이라면 제 인생을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호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반호진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장년인을 바라봤다.
마치 그의 속내를 훤히 보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꿀꺽!
그 모습에 장년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반호진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죽음은 두렵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이의 피를 손에 묻혔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어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렇기에 살방의 복수는 무섭지 않습니다.”
“진심이군.”
“예.”
미동도 없는 눈빛과 달관한 듯한 표정에서 반호진은 장년인의 말이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흥미가 일었다.
“좋아. 함께 가도록 하지. 그런데 아직 받아들인 건 아니야. 나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너도 지켜보다가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떠나도 된다.”
“알겠습니다.”
당장은 반호진도 장년인이 필요했다.
약물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최대한 원래대로 회복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켜보다가 괜찮다 싶으면 거둘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하지 않았네. 이름은?”
“우송덕이라고 합니다.”
“나는 반호진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우송덕은 마음속으로 반호진의 이름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어정쩡한 관계이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기에 우송덕은 깍듯하게 반호진을 대했다.
철컹.
그사이 반호진은 무형지기를 일으켜 족쇄처럼 우송덕의 발을 묶고 있던 쇠고랑을 끊어 버렸다.
그러자 우송덕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쇠고랑을 내려다봤다.
“정리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하루면 충분합니다. 숨겨 놓은 곳들이 있겠지만 저희들도 나름 전문가들이니까요. 탈탈 털 생각으로 인원을 따로 빼 왔기에 옮기는 건 금방입니다. 짐꾼들도 대기 상태고요.”
오만가지 감정에 휩싸인 우송덕을 일별하며 반호진이 비천대주를 바라봤다.
오랜 시간 묶여 있었으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우송덕 말고도 할 일이 많았다.
“하루라.”
“인력이 부족하면 비천대가 들고 나르면 됩니다. 관도가 없어 마차가 들어올 수는 없지만 지게는 금방 만들 수 있으니까요. 다만 문제는 저 아이들입니다.”
비천대주의 시선이 가만히 서 있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약물치료를 한다고 해서 바로 회복이 되는 게 아니기에 비천대주는 걱정이 되었다.
자칫 잘못하면 저 아이들을 업고 날라야 할 수도 있어서였다.
“훈련을 받던 아이들이니 이동하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살방주는 아직 소식을 못 들었을 테고. 설사 알았다고 해도 당장 이곳으로 못 올 겁니다.”
“살방주가 알았을 때에는 저희가 다 떠난 뒤일 겁니다. 일단 이동할 수 있는 걸로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주님께서 일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도록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하들에게서 계속 보고를 받고 있었기에 비천대주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전투가 문제이지 정리는 금방이었기에 비천대주는 이내 밖으로 나가 직접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
“역시 집이 제일 좋아.”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여기는 형님 집이지, 네 집은 아니지. 네 집은 모용세가잖아.”
“두 번째 집도 집이지.”
정이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개소리를 이렇게 태연하게 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러나 모용척은 당당한 얼굴로 빈자리 중 한 곳에 앉았다.
“집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편하기는 하지.”
“저는 집보다 여기가 더 편해요. 좋은 기억만 있어서 그런가. 집에서는 아팠던 기억밖에 없어서.”
동조하는 선우방에 이어 서조운이 입을 열었다.
그야말로 무상문이 이제는 집처럼 편안해져서였다.
추억도 집보다 이곳이 더 많기도 했고.
“고생하셨어요.”
자기 집 안방인 마냥 한 자리씩 차지하는 형들과 친구를 보며 사마의성이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미리 데워 놓은 차를 따라 주었다.
“어째 손님맞이하는 집주인 같은데?”
“저에게도 집이나 마찬가지죠. 숭산에서 지냈던 시간과 여기에서 보낸 시간이 엇비슷하니까요.”
“그것도 그러네.”
사마의성의 대답에 모용척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를 비롯해서 다른 이들은 숭산이 더 익숙했지만 사마의성은 다를 터였다.
“별일은 없었고?”
“명왕이 계시는데 별일이 있을 리가 없지요.”
“따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어.”
반호진이 아무 걱정 없이 외출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상일기 덕분이었다.
그가 든든하게 무상문을 지켜 주었기에 반호진은 망설이지 않고 살방의 본거지를 칠 수 있었다.
“문주님이 계시지 않았어도 큰일은 없었을 거예요. 당장은 천사맹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까요.”
“그래도 또 모르는 게 무림이니까. 나도 문주님이 계셔서 안심하고 다녀온 것이기도 하고.”
“근데 데려온 사람들은 누구예요?”
“살방에서 살수 훈련을 받던 아이들이야. 약물로 세뇌를 당하던 중이라 조금 이상해 보이지만 곧 멀쩡해질 거야.”
“문도로 받아들이시게요?”
사마의성이 눈을 반짝였다.
무슨 생각으로 반호진이 그들을 데려왔는지 단박에 눈치챈 것이었다.
“응.”
“확실히 도움은 되겠네요.”
“아직 확정은 아니고 남겠다는 이들만. 떠나겠다고 하면 보내 줄 생각이야. 물론 감시는 붙여서. 괜히 살방에 좋은 일을 하면 안 되니까.”
“절대 안 되죠. 이건 하오문에 도움을 청하면 될 것 같아요. 비천대가 같이 움직이기도 했고.”
사마의성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잘만 하면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정보 조직을 구축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형님께서 생각하기에 얼마나 남을 것 같아요?”
“적든 많든 나는 상관없어. 각자의 인생이 중요한 거니까. 내 밑에서 일하라고 하면 살방과 다를 게 뭐야?”
“그건 그렇죠.”
서조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데려온 아이들의 능력이 탐나는 건 사실이나 강요한다면 반호진의 말대로 살방과 똑같은 짓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걱정은 안 돼? 저들 중에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이도 있을 수 있어.”
“그럴 수도 있겠지. 나라고 사람 마음속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근데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정황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살방 소속이었다고 해서 너무 의심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봐. 도구도 마찬가지지만 사람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
“네 말도 맞기는 한데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네. 세뇌가 쉽게 풀리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충성심의 방향을 너에게로 바꾸면 걱정이 안 될 텐데.”
“그럼 살방하고 똑같은 짓을 하는 거야.”
“나도 알아.”
선우방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역시 백도 출신이기에 이런 방식은 절대 선호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었고.
다만 이 방법만큼 확실한 게 없었기에 말을 꺼낸 것이었다.
“얼마나 남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반 정도는 남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니까.”
“최대한 많이 남았으면 좋겠어요. 사실 저희가 인원이 좀 적은 편이잖아요. 정식 문도도 이번에 아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유 호법뿐이었고요. 게다가 딱 필요한 인력이기도 하고.”
“그렇긴 하지.”
“당연히 형님께서 직접 관리하실 거죠?”
서조운의 말에 반호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말에서 묘한 의미가 느껴져서였다.
그런데 서조운뿐만 아니라 선우방과 모용척, 정이륭의 표정도 이상했다.
“의성이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분위기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네?”
“조금 주제넘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이건 말해야 할 것 같아. 나는 그 결정에 반대야.”
“저도요.”
“이 부분에 한해서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선우방이 조심스럽게 물꼬를 트자 서조운과 모용척이 동조했다.
그리고 정이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삼자로서 객관적으로 봐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의성이가 동생이라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해. 정보 조직을 만들기 위해 공동으로 시작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어. 다 같이 배우는 입장이니까. 그렇지만 이건 달라. 의성이는 말 그대로 의동생일 뿐이야. 무상문도도 아니고, 충성을 맹세한 가신도 아니야. 그런데 무상문의 속사정에 대해서 가장 잘 알게 될 정보 조직을 관리한다고? 그건 말이 안 돼.”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해요.”
조목조목 말하는 선우방을 보며 사마의성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식적으로 선우방의 말이 맞아서였다.
그 어떤 문파나 무가도 외부인에게 정보 조직을 맡기지 않았다.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설마 내가 의성이에게 전부 다 맡기고 손 놓을 줄 알았어?”
“왠지 너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내가 무상문의 주인이야. 아무리 의성이를 믿지만 이건 아니지. 정보 조직은 내가 직접 관리할 거야. 그러니 걱정 안 해도 돼. 모르는 건 물어볼 사람이 있기도 하고.”
“다행이네.”
“근데 너무 앞서가는 거 아냐? 아직 아이들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도 아닌데.”
“미리미리 계획을 짜 두어야지. 그래야 네가 가장 싫어하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지.”
선우방의 말에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어서였다.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
“전혀. 나도 말씀드리려고 했어.”
반호진이 선우방과 대화하고 있을 때 서조운이 슬그머니 사마의성에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사마의성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서운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서조운의 걱정과 달리 사마의성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사마의성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려 했기에 오히려 고맙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그래?”
“너도 생각한 걸 내가 생각 못 했을까 봐?”
“그것도 그러네.”
“나야 나중에 독립하게 해 주시면 가신이 될 마음이 있긴 하지만.”
“그게 무슨 가신이야? 한 번 충성을 맹세하면 끝까지 가야지.”
언제 걱정했었냐는 듯이 서조운이 배신자를 쳐다보듯이 사마의성을 바라봤다.
모름지기 사내대장부라면 한 번 뜻을 세웠으면 끝까지 가야 했다.
그렇게 못 한다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했다.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그래서 안 하고 있는 거잖아.”
“네 목표는 사마세가를 재건하는 거잖아. 그것만 생각해.”
“너는 어떻게 하려고? 아직도 고민 중이야?”
“난 어차피 시간이 많이 남아 있어서 괜찮아. 고민할 시간이 많으니.”
“그건 부럽네.”
사마의성이 짐짓 부러운 얼굴로 서조운을 바라봤다.
친구지만 아주 가끔 진심으로 부러울 때가 있었다.
“아, 이번에 살방에서 얻은 무공 중 은신술과 경신술은 모두 공개할게.”
“그걸 전부 다요?”
서조운과 사마의성의 고개가 번개같이 돌아갔다.
반호진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우리가 챙긴 부수입도 적지 않은데.”
“그래서 안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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