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4장. 제삼의 선택. -01
“그래?”
서조운이 단호하게 말했음에도 반호진은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서 바라봤다.
생채기라고 하기에는 제법 깊은 상처들이 군데군데 있어서였다.
“넵!”
“맞아. 요 정도면 생채기 수준이지. 그래도 암월교 때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 아냐?”
서조운을 지원해 주겠다는 듯이 함께 싸웠던 선우방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완숙한 절정고수였지만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일행들은 이인일조로 움직였는데 서조운과 선우방이 한 조였다.
“암월교와 살방의 수준 차이도 생각해야지. 암월교가 멀쩡했을 때 살방은 기도 못 폈어.”
“그래도 지금은 사도육주 중 한 곳이잖아. 암월교를 박살 냈을 때 정예들은 네가 주로 상대하기도 했고. 근데 이번에는 우리도 제법 간부들을 잡았다고.”
“뭐, 그렇긴 하지. 방심하지도 않았고.”
반호진이 못 이기는 척 고개를 주억거렸다.
특히 후기지수들 중 손꼽히는 강자가 되었음에도 자만하지 않고 이인일조로 움직인 것에 반호진은 높은 점수를 주었다.
“방심하다 당하면 그것만큼 쪽팔리는 일도 없으니까. 네 잔소리도 잔소리지만 애들한테 당할 놀림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들어.”
“어? 형도요?”
“물론이지. 난 너보다 더 해. 너야 막내지만 나는 가장 연장자라고. 동생들의 놀림을 받는 형이라니. 끔찍하지.”
선우방이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기는 하겠네요. 근데 저도 형들한테 놀림받는 건 싫어요. 똑같다는 거죠.”
“나중에 너보다 어린 녀석한테 놀림당했으면 좋겠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서조운이 히죽 웃으며 검지를 휘휘 저었다.
그런데 호언장담하는 서조운의 모습을 보며 선우방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야. 너보다 더한 재능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 당장 호진이만 보더라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잖아.”
“어…….”
선례가 눈앞에 있었기에 서조운은 말문이 막혔다.
희박하긴 해도 가능성은 확실히 있어서였다.
“그러니 난 그날을 고대하련다. 죽기 전에는 볼 수 있겠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죽어라 노력할 테니까요.”
서조운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가능성이 있기에 독기를 바짝 끌어올린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거나 말거나 반호진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반호진은 숙소로 쓸법한 제법 큰 목조 전각 앞에 섰다.
“응?”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는데요?”
“맞아. 숫자가 제법 많아.”
무의식적으로 반호진을 따라 걸어가던 선우방과 서조운이 흠칫 놀랐다.
건물 안에서 상당한 숫자의 기척이 느껴져서였다.
그 말에 보좌하듯 따라오던 비천대주가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아이들일 수도 있으니까 일단 들어가 보자고.”
달칵.
긴장하는 일행들과 달리 반호진은 담담한 얼굴로 출입문을 활짝 열었다.
이윽고 건물 안의 모습이 반호진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으음!”
“뭐야?”
언제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자세를 잡고 있던 비천대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연무장처럼 탁 트인 일 층에 소년과 청년 경계에 서 있는 듯한 남자들이 초점 없는 멍한 눈빛으로 도열해 있어서였다.
마치 인형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에 선우방과 서조운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일층을 두리번거렸다.
“살수 훈련을 받고 있던 아이들 같습니다. 아직 살행은 나가지 않은 것 같고요. 통제는 약물을 사용한 듯싶습니다.”
모두가 당혹스러워하는 것과 달리 비천대주는 아는 게 있는 모양인지 익숙하게 다가가서 남자들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런데 그가 다가갔음에도 백 명이 훌쩍 넘을 것 같은 남자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아직 살수는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훈련을 어디까지 받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이대로 보건대 살행을 나가기 직전이거나 그에 근접한 단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확한 건 관리했던 녀석이 알고 있겠지요. 거기 너.”
비천대주의 추측을 듣던 반호진이 고개를 돌렸다.
이 층과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쪽을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 옆의 비밀 공간에 숨어 있는 너 말이야.”
“…….”
“제가 끌고 나오겠습니다.”
확신 어린 반호진의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서조운이 나섰다.
위치를 정확히 짚어 주었기에 강제로 끌고 나오려는 것이었다.
한데 그때 돌이 밀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 지금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리로 와.”
“예, 옙!”
방금 전까지 숨어 있었다는 걸 보여 주듯이 왜소한 체구의 장년인은 흙먼지가 가득한 몰골로 반호진의 앞에 와서 고개를 숙였다.
딱 봐도 반호진이 우두머리 같았기에 알아서 머리를 조아린 것이었다.
철컹. 철컹.
반호진의 시선이 황급히 뛰어온 장년인의 다리로 향했다.
정확하게는 그의 두 발목에 걸려 있는 쇠고랑과 쇠사슬에게로.
“노예인가?”
“그, 그렇습니다.”
장년인이 잔뜩 움츠러든 자세로 대답했다.
감히 눈을 마주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대 들지 않았다.
“약물을 쓴 것 같은데, 그것도 당신이 한 건가?”
“예에.”
고저 없는 반호진의 어조에 장년인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답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럴 경우 더한 변을 당할 게 분명했기에 장년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의술을 익힌 것 같은데.”
“맞습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장년인의 몸에서는 약초 냄새가 은은히 풍겼다.
노예라서 그런지 제대로 씻지 못해 몸에서 나는 악취가 상당했으나 그럼에도 약초 향을 숨기지는 못했다.
“직접 제조한 건가?”
“아닙니다. 저는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고분고분히 대답하는 장년인을 반호진은 지그시 바라봤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일행들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왜 이렇게 질문을 하는지 그들로서는 알 수가 없어서였다.
특히 비천대주는 반호진이 손을 쓰지 않고 있는 게 이상했다.
“어떻게 할까요, 형님?”
그 마음은 서조운도 마찬가지인지 반호진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반대로 장년인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서조운의 말이 그에게는 사형선고처럼 들려서였다.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어. 이 아이들 어디까지 훈련된 거지? 혹시 모르나?”
“대, 대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훈련 단계는 거의 막바지까지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나?”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 건지요?”
“평범한 사람으로. 지금은 인형 같잖아. 살방의 살수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어도 인형 같지는 않았는데 이 아이들은 인성이 아예 말살된 것 같아서.”
반호진의 시선이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문이 열렸을 때도 반응하지 않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처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처음처럼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훈련받기 전으로는 돌아가기 힘듭니다.”
“그 말은 어느 정도는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로군?”
“보통 훈련이 끝나면 약물을 서서히 줄입니다. 살행은 보통 완벽한 작전하에 이루어지지만 임기응변도 어느 정도 필요한 만큼 사고할 수 있어야 하거든요. 완벽하게 세뇌가 되면 약물이 필요 없기도 하고요.”
“평범한 생활이 가능하긴 하단 말이군.”
“예. 약간의 후유증이 있기는 하나 일상생활은 가능합니다.”
장년인의 대답에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대로 비천대주와 비천대원들의 얼굴은 굳어졌다.
반호진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제는 짐작한 것이었다.
“문주님. 혹시 살려 주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보면 강제로 끌려온 아이들이지 않습니까. 안 그런가?”
“맞습니다. 납치당한 아이들도 있고, 부모에게 돈을 주고 사 온 아이들도 있습니다.”
눈치껏 자신에게 묻는 말이라는 걸 알아차린 장년인이 반호진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말에도 비천대주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 세상에 불쌍하고 불운한 아이들은 여기 말고도 많아서였다.
“위험합니다, 문주님. 살방의 본거지를 무너뜨렸다고 하나 핵심 전력은 여전히 건재합니다. 분명히 다시 살방주의 손아귀로 들어갈 겁니다.”
비천대주가 조심스럽지만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행에 나가지 않았다고 하나 정식으로 살수 훈련을 받은 이들이 여기 있는 아이들이었다.
즉 달리 말하면 언제라도 살행에 나갈 수 있었기에 비천대주는 죽이면 죽였지 굳이 살려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후환을 생각하면 이 자리에서 전부 죽이는 게 가장 깔끔했다.
스윽.
그래서 비천대주는 은근슬쩍 서조운과 선우방을 바라봤다.
두 사람도 자신과 같은 생각일 것 같아서였다.
더욱이 그는 감히 반호진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었기에 도움을 청하듯 둘을 쳐다봤다.
“저는 형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형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니 이런 말을 꺼내신 거겠죠.”
“나도 같은 생각이야.”
비천대주는 물론이고 비천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두 사람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라서였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압니다. 그런데 정신이 돌아오면 과연 살방주에게 다시 찾아갈까요? 팔린 아이들이야 그럴 여지가 있다지만 강제로 납치당한 아이들이요.”
“어…….”
“이자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약물치료를 하면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그럼 세뇌도 풀릴 테고 강제로 끌려온 아이들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려 하지 않을까요.”
비천대주가 눈을 껌뻑였다.
듣고 보니 반호진의 말도 일리가 있어서였다.
더불어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도 깨달았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면 제가 거두는 방법도 있고요.”
“아!”
“살수 훈련을 받았다고 해서 꼭 살수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니니.”
비천대주의 동공이 커졌다.
이제야 반호진이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장년인에게 물은 건지 이해가 된 것이었다.
“약물치료는 한 번에 가능하나?”
“가능하긴 한데 몸에 좋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좀 두고 점진적으로 치료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나?”
“사, 살려 주시는 겁니까?”
장년인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생각지도 못 한 말에 깜짝 놀란 것이었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있지. 보아하니 이곳에서 그리 대접을 못 받은 것 같은데.”
반호진의 시선이 다시 장년인의 발 쪽으로 향했다.
쇠고랑을 지나 짚신도 신지 못한 굳은살 가득한 맨발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맞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면 보내 주고. 단, 이 아이들의 약물치료가 끝난 후에. 알겠지만 이쪽에는 우리 모두 문외한이니까.”
“혹시 의원이 필요하지는 않습니까?”
살려 준다는 말에 장년인이 용기를 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 갇혀 지냈기에 이제는 고향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돌아간다고 해도 아는 이가 있지도 않았고.
어차피 천애고아였기에 장년인은 받아만 준다면 반호진에게 의탁하고 싶었다.
“마침 의술을 익힌 자가 필요하긴 한데.”
“받아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대뜸 무릎을 꿇는 장년인을 보며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어떤 심정인지는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너무 성급하게 결정을 내린 것 같아서였다.
“솔직히 대협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본 것으로만 판단을 내렸습니다.”
“판단이라. 네가 본 나는 어떤데?”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저였어도 고민하지 않고 전부 다 죽였을 겁니다. 그게 가장 깔끔하니까요. 하지만 대협께서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저에게 선택지를 주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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