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3장. 빈집털이. -01
“무……상문이요.”
“그래. 잘 알고 있네. 근데 이걸 왜 물어보는 거야? 내 장원이 작은 것도 아닌데. 이곳에서 머물고 싶으면 얼마든지 지내도 돼. 원래 살던 곳에서 살고 싶으면 그래도 되고. 이것 역시 강요할 생각은 없어.”
반호진이 빙긋 웃었다.
어느 쪽이든 원하는 걸 선택하라는 듯이 말이다.
그 말에 아이들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문주님……!”
하나같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꾸벅 숙이는 아이들의 모습에 반호진은 그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준 것이었다.
“사내대장부라고 해서 꼭 울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주 우는 건 좋지 않아.”
“예에!”
“시정하겠습니다!”
패앵!
가지고 다니는 낡은 무명천에 코를 푸는 몇몇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반호진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보아하니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반호진은 아예 화제를 전환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우웅.
반호진의 의지에 무형지기가 반응하며 회의실 한쪽 구석에 미리 챙겨 두었던 나무 궤짝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 안에 담아 두었던 것들을 일제히 들어 올려 아이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어?!”
“이, 이건!”
눈물바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눈가가 촉촉했던 아이들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자신의 앞에 착지하는 옷을 보고는 깜짝 놀란 것이었다.
“부총관이 직접 만든 무복이다. 지금은 한 벌이지만 계속 만들고 있으니까 차차 여벌이 생길 거야.”
“우와…….”
아이들이 옷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반호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다들 두 손으로 경건하게 무복을 잡아서 들어 올리고 있었다.
몇몇은 치수를 확인하려는 것인지 자신의 몸에 대기까지 했다.
“똑같은 색이야.”
“아름다워!”
새 옷인 것도 있지만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바로 무복의 색깔이었다.
반호진은 주로 검은색이나 짙푸른 색의 무복을 입었는데 지금 아이들에게 배급된 무복은 바로 짙푸른 빛깔의 청의무복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감동한 표정으로 연신 무복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다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네.”
“감사합니다!”
“아껴 입겠습니다!”
이제야 반호진의 말이 들리는 모양인지 아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고마운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난 전달한 것밖에 없어. 감사 인사는 부총관과 여자아이들에게 해. 오늘까지 만드느라 꽤 고생한 걸로 알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옷은 옷을 뿐이야. 너무 아낄 필요 없어. 이제는 알겠지만 나 돈 많아. 산채들 털면서 번 돈도 적지 않고. 그러니 옷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어떻게 강해질 것인지만 생각해.”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반호진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째 쓸데없이 힘이 들어간 것 같아서였다.
“평소대로 해, 평소대로. 너희들이 언제부터 어려운 말을 썼다고.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말을 해. 괜히 조숙한 티 내려 하지 말고.”
“넵!”
“이제 정식 문도가 되었으니 무공에도 제대로 입문해야겠지? 들어오세요.”
끼이익.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향했다.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려서였다.
이윽고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익숙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저씨?”
“앞으로는 호법님이라고 불러. 본문의 첫 번째 호법님이시니까.”
“하하하하.”
담담한 얼굴로 들어오던 유호량이 반호진의 소개에 멋쩍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호법이라는 두 글자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어서였다.
아직 무상문의 호법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안녕하세요, 유 호법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아저씨라 불렀지만 이제는 달랐다.
정식으로 무상문의 제자가 되었기에 곽춘을 위시로 아이들이 일제히 유호량을 향해 포권했다.
“나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하마.”
그 모습에 유호량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나 할까.
늘 가슴 한구석에 쓸쓸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묘하게 가슴이 채워지는 듯한 느낌에 유호량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부터는 수련이 힘들어질 거야. 건강을 위해 익히는 운기토납법과 내공심법은 완전히 다르니까. 무공도 마찬가지고. 나는 검객이고 유 호법님은 도객이지만 검법과 도법만 가르칠 생각은 없어. 내공심법과 운신법은 동일하게 익히되 각자의 적성에 맞는 병기를 익히게 할 거야. 물론 그 전에 기본기부터 확실하게 다져야겠지?”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반호진의 경고 아닌 경고에 아이들은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도망치거나 회피하는 이들은 없었다.
각오한 일이었기에 겁은 먹어도 피하지는 않았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지금의 각오를 그대로 살려서, 바로 시작하자. 다들 옷 갈아입고 나와.”
“예!”
예고도 없이 바로 훈련이 시작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히 기대했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진짜 무공수련이었기에 아이들은 잽싸게 배급받은 무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또 한 번 감탄했다.
옷이 각자의 몸에 딱 들어맞아서였다.
처음 옷을 받았을 때 몸에 대어 보았기에 얼추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어 보니 맞춤옷처럼 딱 들어맞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서로를 쳐다봤다.
“나 소름 돋았어.”
“내 몸 치수를 어떻게 알았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눈썰미로 때려 맞힌 거 아냐?”
“그럼 더 놀라운 거지.”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는 듯이 아이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하지만 안 믿을 수도 없기에 아이들은 이내 놀란 감정을 추스르고는 유호량의 인솔하에 회의실을 나섰다.
연무장에 나온 봉구는 부러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곽춘 등등을 바라봤다.
달라진 옷차림에서 곽춘 일당의 신분 변화를 알 수 있어서였다.
그리고 그건 근처에 모여서 몸을 풀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확 달라진 형들의 모습에 다들 부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부럽다.”
“역시 먼저 문도가 되었네.”
“우리는 안 되는 거 아닐까?”
봉구의 귓가로 맥 빠진 목소리들이 들어왔다.
바로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였다.
“왜들 그렇게 부정적이야?”
“봉구 형.”
“이건 긍정적인 신호로 봐야 해.”
“긍정적으로요?”
처음에는 혼자만 따로 합류했기에 많이 서먹서먹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다 같이 동고동락해서 그런지 이제 어색함은 많이 사라졌기에 봉구는 편안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응. 나는 오히려 지금의 상황이 우리에게 호재라고 생각해.”
“왜요?”
“물꼬가 트였잖아. 사실 다들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있었잖아? 이대로 일꾼으로만 지내는 건 아닐까 하고.”
이어지는 봉구의 말에 아이들이 하나둘 고개를 주억거렸다.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으나 다들 비슷한 걱정을 가지고 있었다.
무상문까지 오기는 했으나 반호진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서였다.
체력훈련도 하고 운기토납법도 배웠으나 이건 말 그대로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무공에 입문했다고 말하기가 민망할 수준이었기에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대로 그냥저냥 지내다가 쫓겨나는 건 아닐까 하고.
“우리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늦게 온 우리가 저 사람들 제치고 먼저 문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건 힘들죠.”
“순서라는 게 있으니까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재능이 있다면 모를까 현실적으로 먼저 정식 문도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거봐. 너희들도 알고 있잖아. 그래서 다들 초조해했던 거고. 근데 이번에 전부 다 정식 문도가 되었어. 이게 뭘 말해 주는 걸까?”
“다음은 우리가 될 수도 있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야. 두 번째, 세 번째는 쉽지.”
봉구의 두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하다못해 황동오도 정식 문도가 되었는데 자신이 안 될 리가 없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하나뿐이네요.”
“지금처럼, 하던 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돼. 일도 성실히 하고, 수련도 꾸준히 하고.”
봉구의 말이 큰 도움이 되었는지 주변 아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마냥 부러워만 하던 기색은 사라지고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더불어 기대도 은은히 서렸다.
봉구의 말마따나 곽춘 일행도 정식 문도가 되었는데 자신이라고 되지 말란 법은 없었다.
“근데 저 옷은 진짜 부럽다.”
“문주님께서 입으시는 무복이랑 되게 비슷해.”
“화려함은 덜하지만 실용성을 생각하면 훨씬 나은 것 같기도 하고.”
“딱 티가 나잖아. 무상문도라는 티가.”
조급한 건 사라졌지만 부러운 마음은 여전했다.
특히 반호진에게 하사받은 듯한 짙푸른 색의 청의무복이 아이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건 나도 인정.”
“우리도 곧 될 수 있겠죠?”
“노력해야지. 문주님께서 가장 중요시하는 게 노력이니까. 쉴 땐 쉬더라도 할 때는 제대로 하는 거. 그게 문주님께서 바라시는 거니까.”
아이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드시 무상문도가 되겠다는 열의가 모두의 두 눈에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한데 곽춘 무리의 청의무복을 부러워하는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옷 예쁘네.”
“소속감도 있어 보이고.”
“부러워하는 거야?”
유호량과 함께 기본기를 다지는 곽춘 일당을 바라보며 백휘경, 백휘성 형제가 중얼거리자 예유화가 피식 웃었다.
무복만 통일되게 입었을 뿐인데 되게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였다.
“부럽다기보다는, 뭐랄까. 기분이 묘하다고나 할까.”
“한 단계 나아간 느낌? 그렇다고 추월당한 건 아니고.”
“우리 실력이 금세 추월당할 정도는 아니지.”
쌍둥이 형제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은근히 반박하는 듯했으나 예유화의 눈은 피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쌍둥이 형제가 부러워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둘러대지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해. 딱 봐도 부러워하는 거면서.”
“아니거든!”
“누가 봐도 둘 다 부러워하는 표정이야. 안 그래요, 오빠?”
예유화가 스리슬쩍 다가와 있던 서조운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러자 서조운이 살짝 놀랐다.
기척을 감추고 다가왔음에도 예유화가 귀신같이 알아차려서였다.
“어떻게 알았어? 기척을 가렸는데.”
“체취요. 바람을 타고 오빠 체취가 날아오더라고요.”
“그래?”
바람의 방향을 확인하며 서조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쌍둥이 형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같은 곳에 서 있었지만 딱히 체취라고 할 만한 냄새를 맡지 못해서였다.
“우리 후각이 떨어지는 건가?”
“아닌데. 내 코는 개코인데.”
백휘경과 백휘성이 눈을 마주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식 냄새는 물론이고 악취에 누구보다 빨리 반응하는 게 자신들이었다.
그런데도 둘은 서조운의 체취를 맡지 못했다.
찌릿!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두 형제의 모습에 예유화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째려봤다.
쓸데없는 일에 관심 끄라는 무시무시한 안광에 두 사람은 못 이기는 척 넘어갔다.
“너희들이 춘이랑 아이들에게 집중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근데 내가 보기에도 둘 다 부러워하는 기색이더만.”
“진짜 부러워한 거 아닌데요?”
“그럼 안 줘도 되겠네?”
“예?”
백휘경, 백휘성 형제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였다.
“저 청의무복 부총관님이 직접 만드신 거거든. 일일이 아이들 치수 확인해서. 그런데 우리 부총관님이 남을 차별하는 사람이 아니시거든.”
“서, 설마!”
“호,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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