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2장. 새로운 씨앗들. -04
이제야 이해되었다는 듯이 난희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만 조금 서두르는 감이 없지 않아 있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니에요? 아직 정정하신데.”
“무상문주님을 보고 느끼는 게 많아. 나이는 내가 훨씬 더 많은데 말이지. 오히려 건강할 때 준비를 해야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평화로울 때 혈난을 대비하는 것처럼.”
“좀 신기하기는 해요. 아무 생각 없이 한량처럼 지내는 것 같다가도 또 막상 일이 벌어지면 거의 완벽하게 대비가 되어 있으니. 미리 안배를 해 놓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
난희주만 그리 느낀 게 아니라는 듯이 하오문주도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뒷조사가 아니라 인연이 얕지 않았기에 그녀는 반호진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늘 주시하고 있었다.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녀에게 들리기도 했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존경스러운 사람이기는 해요.”
“능히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될 인물이지.”
“사실 이번에도 큰 도움을 받았고요. 오빠 말로는 상부상조라고 하는데 엄밀히 따지면 저희가 받은 게 좀 더 많죠.”
“빚이라고 생각하고 나중에 갚으면 돼. 너도 문주님 성격 알잖아. 절대 안 잊을 테니까 눈치껏 하나씩 갚아 나가면 된단다.”
“그럴 거예요. 근데 꼭 지금 시작하셔야 해요?”
잠시 다른 곳으로 샜던 이야기가 제자리를 찾았다.
담소도 좋지만 중요한 사안을 뒤로 넘길 정도는 아니었다.
더욱이 난희주는 화제 전환에 넘어갈 정도로 더 이상 어수룩하지 않았다.
“말했잖니. 미리 대비하는 마음으로 시작할 거라고.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야. 난 여전히 문주직에 있을 거고. 그저 내 업무가 조금씩 너에게 넘어가는 것뿐이야.”
“저는 아직 사부님의 가르침이 필요해요.”
“내가 어디 멀리 떠나니? 은퇴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하오문주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난희주의 눈에는 깊어진 눈가의 주름이 가장 먼저 보였다.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하는 얘기죠.”
“언제까지 내가 문주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제 슬슬 준비해야지. 그래야 진짜 갑작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 혼란이 안 생기지. 그나저나 좋은 소식은 없니?”
“있을 게 있나요. 제가 아는 건 다 알고 계시면서.”
서운한 마음에 난희주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제자의 대꾸에도 하오문주는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모르는 것도 있는데?”
“무얼 물어보시는지 소녀는 모르겠사옵니다.”
“알면서.”
하오문주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재차 물었으나 난희주는 요지부동이었다.
새침한 얼굴로 모르쇠를 고집했다.
“몰라요.”
“뭐,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사실 나도 이제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기도 하고. 이번에는 남자애들로 선별해 볼까?”
“성별이 중요한가요. 재능과 인성이 중요하지.”
“그렇지. 그게 가장 중요하지. 그래서 시간이 오래 필요해. 재능이야 금방 알아볼 수 있다지만 인성은 다른 문제니까.”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툴툴거리던 난희주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작게 말했다.
나이가 나이이니만큼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히 무리해서 건강이 악화될 수도 있었기에 난희주는 엄한 곳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알았어. 그러니까 잔소리 좀 그만해. 가끔 보면 네가 사부이고 내가 제자인 거 같아.”
“제가 언제 잔소리를 했다고 그러세요?”
“지금.”
“아니거든요.”
“기가 너무 세.”
절대 아니라는 듯이 두 눈을 부릅뜨고 부정하는 하나뿐인 제자를 보며 하오문주는 작게 탄식했다.
모든 걸 다 갖추다시피 한 제자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그건 바로 기가 너무 세다는 점이었다.
차기 하오문주로서는 좋은 기질이지만 한 남자의 여자로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왜 얘기가 그리로 가요!”
“다 내 잘못이지. 암.”
“사부님!”
“나 아직 귀 안 먹었어.”
깊은 한숨과 함께 찻잔을 들어 올리는 하오문주의 모습에 난희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제자의 고성에도 하오문주는 득도한 고승처럼 묵묵히 차를 들이켰다.
***
회의실로 사용하는 커다란 방에 모인 아이들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모두 모이라고 하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동오야. 너 혹시 실수한 거 있어?”
“어, 없는데?”
“근데 왜 말을 더듬어?”
말을 더듬는 황동오의 모습에 곽춘은 물론이고 한륭이 두 눈을 모았다.
반응을 보니 뭔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아서였다.
다른 아이들도 같은 생각인지 눈빛이 매서워졌다.
“네가 그렇게 쏘아보니까 그러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데 안 놀라고 배겨?”
“그건 인정.”
“요즘 춘이 눈빛이 범상치 않기는 하지.”
황동오의 말에 몇몇 아이들이 동조하듯 입을 열었다.
열심히 하려는 건 좋으나 그게 요즘 좀 과하다고 다들 느끼고 있었다.
그걸 곽춘도 인정하는지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좀 그랬나?”
“조금이 아니라 많이.”
“너까지 이러냐.”
믿었던 한륭마저 동조하자 곽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딴에는 서로 힘내서 으쌰으쌰 하자고 한 건데 다들 과하다고 하자 곽춘은 섭섭했다.
“근데 이해하니까 별말 안 한 거야. 다들 마찬가지일걸?”
“맞아.”
“우리한테 피해 준 것도 없고.”
“열심히 해야 하는 건 맞으니까. 춘이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렇게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겠어? 무공까지 배우면서.”
친구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다른 곳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있었던 온갖 핍박과 차별이 이곳에는 없었다.
더구나 휴식 시간까지 챙겨 주었기에 무상문에서 나가고 싶은 아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이들이 남창에 수두룩했다.
“혹시 인원을 감축하려고 하시는 건 아니겠지?”
“신입이 많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린 나름 경력직인데.”
“근데 대체를 못 하는 건 아니잖아. 부총관님이랑 누나들도 있고.”
“으음!”
언제 투닥거렸냐는 듯이 아이들이 의기소침해졌다.
불안감이 점점 커져서였다.
특별한 기술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걱정이 안 될 텐데 그런 게 아니었기에 다들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끼이익.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을 이곳에 집합시킨 반호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늘 그렇듯이 심드렁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서 회의실에 들어온 반호진이 느릿하게 아이들의 표정을 살폈다.
“뭔 일 있어? 왜 죄다 울상이야?”
“아,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니까 더 이상한데? 목소리도 커지고.”
“그게, 그러니까요…….”
반호진의 시선에 아이들이 일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표정들이었다.
“일단 앉아 봐. 왜 서 있어? 자리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예!”
대답은 잘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상석에 앉았다.
그러자 아이들도 빠르게 착석했다.
“왜들 그렇게 얼어 있어? 모두 뒷간이 급한 거야?”
“아니요.”
“뒷간은 미리 다녀왔습니다!”
바짝 얼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 반호진이 슬쩍 웃었다.
왜 이러는지 그는 알고 있어서였다.
긴장한 모습이 귀여워서 좀 더 놀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한두 명이 울 것 같아서 반호진은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다들 눈치챘겠지만 너희들을 전부 부른 건 전달할 사항이 있어서야.”
“경청하겠습니다!”
“병사도 아닌데 그렇게 하지 마. 그냥 편안하게 들어. 너희들이 걱정하는 일은 아니니까. 이제 슬슬 때가 된 것 같아서 다 모이라고 한 거야. 너희들 생각이 궁금하기도 하고. 정식 문도가 되기 싫은 사람 있으면 지금 편하게 말해. 싫다고 해서 불이익이 있지는 않으니까 걱정 말고.”
“……!”
아이들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상상도 못한 말에 다들 크게 놀란 것이었다.
다들 짤리는 건 아닐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반대의 이유 때문이자 몇몇은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무무무, 문도요?”
“정식으로요?!”
“그래. 너희들이 그럴 마음이 있다면.”
대경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반호진이 도리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서였다.
정식 문도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제법 된다는 건 반호진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기에 반호진은 의아한 눈으로 아이들을 살펴봤다.
“저희에게 선택권을 주시는 건가요?”
“당연하지. 내가 너희들을 문도로 받아들일 권한이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거절할 권리가 있어. 사도문파나 마도문파에서는 강제로 끌고 간다고도 하는데 나는 엄연히 백도인이지 않더냐. 소림사 속가제자가 그럴 수는 없지.”
뭐가 이상하냐는 듯이 반호진이 설명해 주자 아이들이 일제히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의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아직도 구분이 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하겠습니다!”
“받아 주시면 무상문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곽춘을 시작으로 한륭과 황동오 등등이 크게 소리쳤다.
그로 인해 방이 쩌렁쩌렁 울렸다.
“작게 말해도 다 들려.”
귀가 아파 올 정도의 큰 목소리에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한데 그와 달리 아이들은 어려서 고막이 튼튼한 모양인지 전혀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죄, 죄송합니다!”
“야야. 지금도 커!”
“헙!”
“사과까지 할 정도는 아니고. 어쨌든 다들 같은 생각인가 보네? 거부하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반호진이 다시 한번 물었다.
한 사람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만큼 신중해서 나쁠 건 없어서였다.
급한 일도 아니었기에 고민할 시간을 충분히 줄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그러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저희야 받아 주시면 감사하죠.”
“맞아요.”
“들어오고 싶어도 못 들어오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기. 근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모두가 기뻐할 때 곽춘이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역시 기쁜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하나 짚고 넘어갈 게 있어서였다.
“물어 봐.”
“정식으로 문도가 되면 임금은 못 받는 건가요?”
“어…….”
뒤늦게 현실적인 부분을 깨달은 아이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져서 반호진을 바라봤던 것이다.
“임금에는 변화가 없을 거야. 대신 지금보다 할 일이 늘어날 거야. 무상문도가 되었다는 건 무상문 소속이라는 걸 뜻하고, 그렇다면 본문을 지켜야겠지?”
“감사합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아이들의 표정이 대번에 밝아졌다.
일이 많아진다고 말했으나 걱정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지금도 다른 곳에 비하면 업무 강도가 약한 편이었다.
특히 마음고생 같은 게 없어 정신적으로도 편했기에 일이 늘어나는 것 정도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저도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이참에 다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 봐.”
“저희도 장원에서 지낼 수 있나요?”
한륭의 질문에 모든 아이들이 입을 다물고 집중했다.
어떤 의도로 한륭이 이걸 물어봤는지 모르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반호진 역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저의를 알아차렸다.
“너희들이 나와야 동생들에게 돌아가는 게 좀 더 많아지지?”
“예.”
“근데 좀 서운한데. 고작 이런 걸 묻는데 그렇게 눈치 보는 거야?”
아이들이 눈을 껌뻑거렸다.
반호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의 눈을 한 명씩 마주 보며 반호진이 말을 이었다.
“너희들 소속이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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