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2장. 새로운 씨앗들. -03
“문주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약간의 성취가 있었습니다.”
“제 덕분이라기보다는 유 소협께서 열심히 노력한 대가이지 않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문주님께서 무공비급을 저에게 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성취는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유호량이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반호진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심지어 기본공이라 할 수 있는 무공서조차 유호량에게 꽤나 큰 도움이 되었다.
부족한 기초 지식을 정말 이해하기 쉽게 풀어 주었기에 유호량은 무공서를 보며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제 도움이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이루었을 성취입니다.”
“장담컨대 몇 년은 더 걸렸을 겁니다. 어쩌면 십 년 후에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반호진이 빙긋 웃었다.
미래를 알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특히나 심화편은 제가 봐도 되나 싶을 정도로 뛰어나더라고요.”
“티를 안 내서 그렇지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이왕 키울 거면 어중간한 나무가 아니라 무림의 거목(巨木)으로 키우고 싶었거든요. 물론 시작은 유 소협이십니다.”
“제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드린 것이고요.”
찻잔을 들던 유호량이 움찔거렸다.
반호진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만약 그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심화편을 대성할 경우 최절정의 경지를 넘어 초절정에 다다를지도 몰랐다.
꿀꺽!
탈인경이라 불리는 초월경이 아니라고 하나 초절정의 경지도 결코 만만한 경지가 아니었다.
보통의 무인은 감히 닿을 수도 없는 경지가 초절정의 경지였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닿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기도 했고.
초월경은 인간에서 벗어난 경지이기에 현실적으로 보통의 사람이 닿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가 초절정이라는 경지였다.
“역시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보신 모양이군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절세무공도 알아보지 못하면 그저 낙서장일 뿐입니다. 안목은 아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우려를 표하는 유호량과 달리 반호진은 여유로웠다.
말한 대로 안목이 없다면 봐도 모를 게 분명해서였다.
설사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지킬 자신이 있었고.
스윽.
흔들림이 없는 반호진의 눈빛에 유호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문주님을 모시겠습니다.”
“유 소협.”
느닷없는 충성 서약에 웬만해서는 평정심이 흔들리지 않는 반호진이 놀랐다.
그 정도로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놀람이 가득 담긴 반호진의 목소리에도 유호량은 움직이지 않았다.
미동도 없는 자세로 반호진을 향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무상문의 호법으로서 절대 모자라지 않는 무인이 되겠습니다.”
“저는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맹세이기도 하고요.”
담담하지만 힘이 담긴 어조에 반호진도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목소리에 가득 담겨 있는 경건함에서 유호량의 각오를 느낄 수 있어서였다.
“사내대장부의 무릎은 목숨과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문주님을 위해서라면 무릎이 아니라 목숨이라도 버릴 수 있습니다.”
장수가 자신을 알아봐 준 이를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처럼 유호량도 마찬가지였다.
반호진을 위해서라면 그는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스스로도 믿지 못했던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고 믿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상승절학까지 아낌없이 전수해 주었다.
그렇기에 유호량은 이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유 소협께서 소망을 이루고, 저와 무상문을 조금 도와주시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유호량도 알고 있었다.
감히 자신이 반호진을 지키고 말고 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한 번쯤은 말하고 싶었다.
언제고 절체절명의 순간이 닥치게 된다면 반호진 대신 자신이 죽을 수 있다고 말이다.
“지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불편하신 건 없으신지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이렇게 수련에만 집중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요. 이런 호강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나 행복합니다. 무공수련을 원 없이 할 수 있고, 거기다 상승무공까지 매일 볼 수 있으니까요.”
“혹 서운하신 건 없으신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조심스레 묻는 반호진의 말에 유호량은 격렬하게 손사래를 쳤다.
반호진은 자신이 소홀했다고 생각하는 듯했으나 유호량은 아니었다.
얼마나 바쁜 일정을 보냈는지 알았기에 절대 서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있으시다면 언제라도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진짜 없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기만 한걸요. 보잘것없는 저를 이렇게 신경 써 주고 계시니까요.”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반호진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경을 쓰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챙겨 주는 건 또 아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적당히 선을 넘지 않는 수준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유호량이 혼자서 잘할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총관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배려해 주고 있기도 하고요. 사실 그래서 걱정이 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나 싶어서요.”
“그럼 소일거리 하나 하시겠습니까?”
“제가 할 일이 있습니까?”
유호량이 눈을 번쩍였다.
쓸데없는 말은 아예 안 꺼내는 성격이 반호진이었다.
그런 반호진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그에게 시킬 일이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유호량은 눈을 빛냈다.
“거창한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유 소협의 시간을 많이 빼앗을 수도 있고요.”
“어쨌든 제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잖습니까?”
“예. 유 소협만이 해 주실 수 있는 일이긴 합니다.”
“하겠습니다.”
“제가 어떤 부탁을 할 줄 알고요.”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듣지도 않고 하겠다고 하자 헛웃음이 나왔다.
한데 의외로 유호량은 진지했다.
“어떤 부탁이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제가 필요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최소한의 밥값은 해야지요.”
“무공교관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신입 문도들의 기본기를 유 소협께서 잡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드디어 정식으로 문도를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부탁임에도 유호량은 반색한 표정을 지었다.
공식적으로 현재 무상문도는 그 혼자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말은 새로운 문도를 받는다는 뜻이었기에 유호량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 근데 누구인지 짐작하시는 모양이네요?”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아이들도 기뻐할 겁니다.”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결정하기는 했으나 선택은 아이들이 하는 것이니까요. 반기는 아이들도 있겠지만 거절하는 아이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유호량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의 생각을 그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어서였다.
반호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지만 그건 말 그대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일단 해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물론입니다. 심화편을 가르치는 건 무리지만 기본기를 잡아 주는 건 자신 있습니다. 제가 제일 자신 있는 것 중 하나이니까요.”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어떻게 보면 선우방과도 비슷한 과가 유호량이었다.
그런 만큼 반호진은 믿을 수 있었다.
적어도 기본기에 한해서는 선우방과 쌍벽을 이루는 게 유호량이었기 때문이다.
***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각.
초승달이 은은하게 야공을 밝히는 시간에 난희주는 사부의 거처로 들어갔다.
“어서 오너라.”
“너무 늦게 주무시는 거 아닌가요?”
“원래 늙으면 잠이 없는 법이란다.”
“사부님은 아직 젊으신 걸요.”
“호호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침의 차림의 하오문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동경만 봐도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었기에 하오문주는 고개를 저었다.
“사부님 또래에 비하면 엄청 동안이시죠. 사부님도 아시잖아요.”
“아서라. 다른 곳에서 그런 말하면 욕먹어. 동안은 무슨.”
“동안이 별것인가요. 또래보다 어려 보이면 동안이죠.”
“실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차나 마시거라. 요즘 통 잠을 못 자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걱정하는 하오문주의 말에도 난희주는 씩씩하게 웃었다.
평소보다 잠을 줄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리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도망치던 때에 비하면 정말 편하게 숙식하고 있었다.
“피부는 어려서부터 챙겨야 해. 아직 괜찮아, 아직 젊어.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늦었어. 어렸을 때부터 관리해야 노화가 늦어.”
“알겠어요.”
난희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난희주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평소와는 잔소리의 결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였다.
“희주야.”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세요?”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난희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사부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표정 관리를 잘하는 그녀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왜 그렇게 놀라니? 내가 곧 죽을 것처럼.”
“분위기가 왠지 그런 것 같아서요.”
“너도 알잖니. 나 건강한 거. 어느 날 갑자기 자객으로 인해 비명횡사하는 거면 모를까 급사는 없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호진 오빠가 늘 말하잖아요. 세상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그러니 늘 대비해야 한다고 말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지.”
하오문주는 빠르게 수긍했다.
그녀 역시 이 말에는 동의했다.
완벽한 계획이 존재할 수 없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게 인생이기도 했고.
“근데 무슨 준비를 하시겠다는 거예요?”
“이번에 느꼈어. 이제는 내가 물러나도 되겠다고.”
“……!”
난희주의 동공이 더 이상 커지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사부가 무엇을 말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물론 당장 이 자리를 물려주겠다는 건 아니야. 네 능력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아직 증명을 확실하게 끝낸 건 아니니까. 인정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받아야 해. 그리고 그건 아무리 너라도 시간이 좀 필요하지. 아직은 내가 필요하기도 하고.”
“그건 당연하죠. 근데 너무 서두르시는 것 같아요. 저는 아직 사부님의 가르침이 필요해요.”
하오문주가 어떤 걸 말하는지 난희주는 모르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역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문주직을 물려받을 때가 아니었다.
“얘는. 내가 당장 너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니? 아, 혹시 기대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너무 심각한 표정의 난희주를 놀리듯이 하오문주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가벼운 사부의 말투에도 난희주의 굳은 얼굴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말했잖아. 준비가 필요하다고. 본문도 규모만 따지면 개방 못지않아. 하루아침에 인수인계가 가능하지 않아. 말했다시피 희주 넌 아직 증명이 더 필요하고. 그러니 준비를 해야지. 너는 하오문주가 될 준비를, 나는 네 다음을.”
“제 다음이라 하면?”
“네 제자는 네가 선택하는 게 맞지만 밑그림은 이 사부가 그릴 수 있지 않겠니? 너도 그랬고, 나도 그랬으니까. 인재라는 게 하루아침에 찾아지는 게 아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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