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2장. 새로운 씨앗들. -02
‘몇 년 지나면 삼봉이 아니라 사봉(四鳳)이 될 수도 있겠어.’
언제 병약했었냐는 듯이 예유화의 미모는 물이 올랐다.
지금처럼 사내아이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아서라, 아서. 오르지 못할 나무다.’
하나같이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과 달리 봉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었다.
미녀는 자신에게 걸맞은 남자를 만났기에 봉구는 시선을 돌려 연무장에 막 들어온 곽춘과 친구들을 바라봤다.
현재 가장 무상문도에 가까운 이들이 바로 저들이었다.
“다 모였으면 뛰자.”
“예!”
따로 정한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매일 똑같은 시간에 모인 사람들이 반호진의 말에 연무장을 돌기 시작했다.
달리기로 체력훈련을 시작한 것이었다.
헥헥헥!
그런 반호진의 곁으로 언제 나타났는지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가 붙었다.
훈련이 아니라 놀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꼬리를 신나게 흔들며 같이 뛰었다.
“헉헉헉!”
처음에는 비슷했던 속도가 시간이 갈수록 달라졌다.
지친 사람들부터 달리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던 것이다.
그리고 후미에는 어느새 봉구가 있었다.
나름 체력 분배를 하며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역시 거의 끝자락까지 밀려났다.
컹!
“뛰, 뛰고 있어!”
허우적거리듯이 뛰고 있는 봉구의 옆으로 삼동이가 다가왔다.
점차 느려지는 봉구를 닦달하기 위해서였다.
벌써 한 식경이나 뛰었음에도 전혀 지친 기색을 안 보이며 삼동이가 주둥이로 봉구의 엉덩이를 밀었다.
걷지 말고 뛰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컹! 컹!
그런데 비슷한 광경이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봉구와 마찬가지로 지친 아이들을 일동이와 이동이가 밀어 주었다.
“벌써 지친 거야?”
“아, 아닙니다!”
“포기하고 싶으면 포기해도 돼. 아무도 안 말려.”
“아닙니다!”
어느새 한 바퀴를 돌아 자신을 따라잡은 반호진이 지나가는 투로 말하자 봉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독기를 잔뜩 끌어올렸다.
“잔병이 없다는 전제조건하에 체력은 재능이 크게 차지하지 않는 영역이야. 무인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기본이기도 하고.”
봉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재능이 크게 중요치 않다는 말이 가슴에 화인처럼 박혀서였다.
타다다닷!
그리고 그 말은 봉구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언제 지쳤냐는 듯이 다시 힘차게 달리는 봉구의 모습에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을 불태우는 것이었기에 얼마 가지 않겠지만 중요한 건 남은 힘을 모두 다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한계를 알 수 있을 것이기에 반호진은 웃으며 이름표가 달린 목줄을 하고서 뛰는 삼동이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워올!
“그래. 네가 더 낫구나.”
손길이 기분 좋은 모양인지 달리면서도 길게 울부짖는 삼동이의 모습에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매일을 같이 뛰어서 그런지 삼형제의 체력은 예유화나 백휘경, 백휘성 형제와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순수하게 체력만 사용하면 더 나은 것 같기도 했고.
월! 월!
막내만 예뻐 하지 말라는 듯이 일동이와 이동이가 옆으로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그 행동에 반호진은 공평하게 둘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
“이제야 불러 주네.”
“바쁠 것 같아서.”
“이제는 안 바빠. 급한 일들은 다 마무리 지었거든. 나 혼자서만 일하는 것도 아니고.”
“처음 왔을 때는 거의 시체였거든.”
손으로 자리를 권하며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무상문에 막 왔을 때가 떠올라서였다.
그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그런지 많이 위태로워 보였었다.
걸어 다니는 시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시체였어도 내 미모가 어디 가지는 않지.”
“꼭 그렇지만은 않던데?”
“뭐라고?”
난희주가 짐짓 쌍심지를 켰다.
자고로 여자는 죽을 때까지 외모를 신경 쓸 수밖에 없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었다.
“얼굴을 보니 얼추 정리된 것 같네.”
“다 오빠 덕분이지. 만약 오빠가 나를 믿어 주지 않았다면 반대의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어. 서찰에도 적었었지만 정말 고마워, 오빠.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게.”
“그만해.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이제는 의미가 희석되는 느낌이야.”
“나로서는 어쩔 수 없어. 정말 반쯤 죽다 살아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너무 고마워할 거 없어. 나에게도 이득이니까 움직인 거야. 서로 상부상조한 거지.”
후르릅.
반호진이 따뜻한 차를 들이켰다.
이번에 배신한 하오문의 장로들을 공격한 건 복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배신자들이 사라지면 천사맹의 정보력 역시 약해질 것이고, 그건 곧 정천맹에 이득이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일거양득을 노리고서 직접 움직인 것이었다.
“오빠는 참 말을 기분 좋게 하는 것 같아.”
“기분 나쁘게 할 이유가 없잖아? 내가 행복하고 다른 사람이 행복하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니까. 다만 욕심으로 인해서 이렇게 안 되는 거지.”
“욕심 또한 사람의 본능이니까. 모든 사람이 불가에 귀의하지 않는 이상 오빠의 말은 말 그대로 이상향일 뿐이지.”
“불제자라고 해서 욕심이 없는 건 아냐.”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승려라고 해서 모든 이가 청렴결백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 걸 넘어 직접 날려 버리기까지 했기에 반호진은 난희주의 생각을 정정해 주었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오빠만 보더라도 그렇고.”
“맞아.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강한 사람일 뿐이지.”
“조금은 아니고. 조금 강한 사람이 수천 명을 베어 넘길 수는 없지.”
난희주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러나 반호진은 반응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전쟁은 아무래도 겨울이 지난 후에야 시작하겠지?”
“가을이 슬슬 끝나 가니까. 겨울이라고 해서 전쟁을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급적이면 피하는 게 좋지. 무인들이 계절의 영향을 덜 받는다지만 그래도 보급을 생각하면 봄이 낫지.”
“전쟁은 짧게 하는 게 좋은데 말이지.”
“천사맹과 마도련은 급한 게 없으니까. 실제로 중원 곳곳에서 지원군이 도착하고 있고.”
내전으로 인해 규모는 작아졌을지 모르나 대신 결속력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렇기에 난희주는 중원의 상황을 손바닥 보듯이 보고 있었다.
정천맹과 협력관계는 아니지만 하오문 역시 천사맹이라는 공통의 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의주시하는 중이었다.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사도육주와 마도십문(魔道十門)이 핵심이야. 천사맹과 마도련을 무너뜨리려면 이곳들부터 쓰러뜨려야 해. 그런데 밝혀진 게 너무 적어. 현재 알고 있는 정보들은 대부분 오래된 것들이라.”
“믿어 봐야지. 대규모 전쟁을 겪어 본 이들이니까.”
수적으로는 적을지 모르나 정천맹의 무인들은 새외무림과 대규모 전투를 겪은 이들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경험만 있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이들이었기에 반호진은 여기에 기대를 걸었다.
“정 불리하면 오빠가 나설 거잖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거봐. 참, 사마 공자에게서 들었어?”
“정보 조직에 관한 거?”
“응. 오빠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사마의성이 여러 가지 조율 중이라고 했지만 난희주는 궁금했다.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그녀도 그에 맞게 준비할 수 있었기에 난희주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나도 참여하려고 했는데 조건에 맞는 이가 없어서 결국 빠지기로 했어. 아무래도 처음에는 체계를 잡아야 해서 나이가 좀 있는 이부터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 추후 충원될 인원을 다루기 위해서라도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게 나으니까. 능력을 중시하더라도 이왕이면 연장자를 따르는 게 자연스러우니.”
“그렇긴 해. 장기적으로 생각하면 충성심을 위해서라도 어린아이가 낫지만 아랫사람을 관리하려면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게 낫지.”
난희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째서 사마의성이 조율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되어서였다.
동시에 이 조건들을 따졌을 때 안타깝게도 반호진의 휘하에 있는 이들 중 조건에 맞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한 건 아니고. 잠시 보류. 나도 필요성은 느끼고 있어서.”
“인재가 정말 없어. 사람은 많은데.”
“그러니까 인재라고 그러는 거지. 쉽게 구할 수 있으면 그게 인재인가.”
“두 사람은 언제 독립시킬 생각이야?”
“조운이는 약속한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나갈 거고, 의성이는 스스로 정할 것 같은데.”
지금은 다 함께 지내지만 이 시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음을 반호진은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다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지도 몰랐다.
“서 공자는 안 나갈 것 같은데?”
“조운이도 꿈이 있어. 나름 원대해. 유일하게 야망이 있다고나 할까.”
“처음에 봤을 때도 그래 보이기는 했어. 되게 순수한 청년이었는데.”
“세속에 물들었다는 말로 들리는데?”
“나이도 먹고, 경험도 그만큼 쌓였으니까.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이기도 하고. 근데 오빠도 알고 있는 모양이네?”
난희주가 훅 치고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에 흔들릴 정도로 반호진의 평정심은 얕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겠단 말이지?”
“무엇을 묻는 거야?”
반호진이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런데 그 반응에 난희주는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원하는 걸 알아내기는 충분해서였다.
찰나지만 그녀는 반호진의 눈빛을 스치고 지나갔던 동요를 읽었다.
“더 이상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까 나도 묻지 않을게. 근데 조금 놀랍기는 하네. 남자들은 눈치채기 힘들 텐데. 그렇다고 밝힌 것 같지도 않은데.”
“선은 지키는 게 좋아.”
“경고 안 해도 잘 알고 있어. 여기까지만 말하고 나도 잊을 거야. 오빠랑 적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 이건 사부님도 마찬가지고, 다른 하오문도들도 같은 마음이야.”
난희주는 양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굳이 반호진이 경고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발설할 마음이 절대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반호진과 적이 되는 건 너무 극심한 손해였다.
그리고 은혜를 모르면 짐승과 다를 게 없기에 난희주는 이 사실을 기억 깊은 곳에 꼭꼭 담아 두었다.
“다행이네.”
“내 눈치가 빠른 건 알고 있지?”
“똑똑하기도 하지.”
“칫! 채찍 다음에는 당근인가?”
“어쨌든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교관으로 부탁해. 시국이 시국인지라 선별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사마의성과 선우방, 모용척은 곧바로 훈련에 들어가길 바랐으나 현실적으로 힘들었다.
정사마(正邪魔)가 전쟁 중이기에 어느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그걸 난희주도 알고 있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그래서 더 신중하게 찾고 있어. 교차 확인도 할 생각이고. 정 안 되면 내가 직속으로 부리는 이들 중에서 차출해 줄게.”
“그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고. 한 명이 아쉬운 상황인데. 괜히 의성이가 현역에서 물러난 이를 찾는 게 아니지. 오래 걸려도 되니까 확실한 사람들로 보내 줘.”
“알았어.”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린 반호진은 교관 말고도 다른 주제로 담소를 이어 갔다.
정세가 정세이니만큼 대화거리는 많았다.
***
똑똑똑.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문주님.”
집무실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유호량이 공손히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방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예.”
“앉으시죠.”
방으로 들어가자 의자에서 일어난 반호진이 자리를 권했다.
이윽고 유호량의 앞으로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이 놓였다.
“감사합니다.”
“진전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반호진이 부드럽게 웃었다.
기도가 정제된 것이 유호량에게 좋은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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