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303화 (303/468)

제 100장. 반격의 서막. -03

“형님. 여기인 것 같습니다.”

“열어 봐.”

“예!”

다른 곳과는 확연히 다른 소리에 서조운이 히죽 웃으며 양손을 벽돌 사이의 틈에 꽂았다.

진기를 이용해 단순무식하게 뚫어 버리고는 벽돌의 양쪽을 잡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그그긍.

부숴도 되지만 그렇게 하면 계단을 내려갈 때 거치적거릴 게 분명하기에 서조운은 일부러 벽돌을 들었다.

이윽고 힘에 의해 벽돌이 들리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히이익!”

동시에 지하 깊은 곳에서 질겁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어 있던 누군가가 깜짝 놀라는 소리였다.

“좋은 말로 할 때 나올래, 아니면 강제로 끌려 나올래?”

이미 숨어 있는 걸 들켰음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대답을 안 하는 게 대답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서조운은 극양지기를 끌어 올리며 천천히 지하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후 작은 석실에 찌그러져 있는 채주를 서조운이 가볍게 제압해서 질질 끌고 나왔다.

“제, 제발 살려 주십시오! 저는 그저 노옹께서 시킨 대로 한 것밖에 없……!”

“그게 죄야.”

환한 밖으로 끌어내서 다시 한번 용모파기와 채주의 얼굴을 확인한 후 서조운은 가볍게 목을 부러뜨렸다.

더 이상 무의미한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챙길 거 다 챙기고 여기 붕괴시켜. 다른 산적들이 터를 잡지 못하게.”

“알겠습니다.”

“여길 망가뜨리면 다른 곳에 산채를 만들겠지만 그래도 시간은 벌 수 있겠지.”

주인만 바뀌었을 뿐 이곳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보수를 해도 오랜 시간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에 반호진은 아예 터를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도 잡초처럼 다시 생겨나겠지만 그래도 남겨 두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불을 확 지르고 싶은데 그건 안 되겠죠?”

“안 돼. 여기는 다른 곳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어. 그냥 부수는 걸로 만족해. 아직 갈 곳이 많기도 하고.”

“알겠습니다.”

서조운이 입맛을 다셨다.

가장 좋은 건 불을 지르는 것이고, 서조운은 그 일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나 욕심으로 산 전체에 불을 지르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이었기에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대신 어떻게 확실하게 망가뜨릴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두 개의 천막 가운데에서 모닥불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을 때 반호진은 모용척을 따로 불렀다.

잠시 후 천막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에 도착한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지?”

“……예.”

“독기나 근성. 좋아. 게으른 것보다는 훨씬 낫지. 척이 네가 흘려보낸 시간을 아까워하고 있는 것도 알고. 또 이번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는 것도 알아.”

“…….”

모용척의 눈매가 살짝 꿈틀거렸다.

질책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아니어서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반호진은 지금까지 딱히 잔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근데 독기에 매몰되어서는 안 돼. 광기의 끝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꿀꺽!

모용척이 마른침을 삼켰다.

광기의 끝이 주화입마임을 모르지 않아서였다.

“분노를 성장의 원동력으로 삼는 거, 나쁘지 않아. 근데 중요한 건 치우치지 않는 거야. 내가 한 가지 물어볼게. 지금처럼 하면 강해질 수 있을까?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물을게. 지금처럼 해서 네가 원하는 경지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해?”

“…….”

모용척의 동공이 흔들렸다.

방법이 틀리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확실하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만약 스스로에게 확신이 있었다면 이렇게 고민하는 게 아니라 바로 대답이 나왔을 것이었다.

그걸 모용척은 깨달았다.

“서두르지 마. 조급해할수록 시야가 좁아져. 더불어 사고의 폭도 좁아지고. 확신이 과하면 고집이 되고, 거기서 더 가면 아집이 돼.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냐. 다만 난 네가 중심을 확실하게 잡았으면 해. 검은 이성으로 휘두르는 거지 감정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야. 그 말로는 너도 많이 봤을 거라고 생각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형님.”

“내 말이 꼭 정답은 아니니까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어. 그렇지만 한 번 정도는 곱씹어 볼 만하다고 생각해.”

표정이 한결 풀어진 모용척의 모습에 반호진도 빙긋 웃었다.

다행히 조언과 충고가 적절히 통한 것 같아서였다.

“아닙니다. 형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제가 지금 걸어가는 길을 형님께서 먼저 걷지 않으셨습니까. 지금까지 형님이 하신 말씀 중에 틀린 것도 하나 없고요. 또 저를 위해서 이런 조언을 해 주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죄송합니다. 제가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못난 모습까지는 아니고. 누구나 한 번씩 겪는 과정이니까. 근데 조금 의외이기는 했어. 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다를 줄 알았거든.”

“하하하…….”

모용척이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만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 그이지만 반호진 앞에서는 달랐다.

천재라고 해도 각자가 지닌 재능의 크기는 각기 달랐고, 반호진은 그중에서도 최고였다.

모용척도 어디 가서 절대 꿀리지 않는 재능이지만 그렇다고 반호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람다워서 좋네. 너에게서 인간미를 봤어.”

“저도 사람인걸요.”

“맞아. 너도 사람이지.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고. 근데 뭐가 그리 급해? 넌 이미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어. 누구보다 노력하고 있고.”

“……!”

모용척이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노력을 알아준다는 말에 감복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눈가가 촉촉해졌지만 사내대장부이기에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 무엇을 걱정하는지 아는데, 그럼 어때? 원래 경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거야. 나도 그랬고, 너희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너무 집착하지 마.”

“예.”

올라오는 감정의 파도를 가까스로 억누른 모용척이 후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반호진의 말이 맞았다.

지금 당장 죽어라 노력한다고 해서 그가 원하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도리어 스스로를 망칠 뿐이었다.

‘생각해 보니 진짜 편협했었네.’

모용척은 실소를 흘렸다.

자신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자각할 수 있어서였다.

동시에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도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추월당하는 게 뭐라고. 결과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나오는데.’

문득 서조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반호진이 먼 훗날 귀천을 하게 되면 공석이 된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겠다고 말이다.

그땐 참 얼토당토않은 소리라고 말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명한 계획이었다.

또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나도 가능하다.’

모용척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분명 서조운의 재능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 역시 꿀린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또 재능을 만개하는 건 다른 문제였기에 모용척은 자신도 충분히 최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방이 형 같은 경우도 있고. 재능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가진 바 재능을 전부 이끌어 내는 것이니까.’

꾸욱!

분노와 조급함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삽시간에 맑아지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목표가 떠올랐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이제야 평소의 척이로 되돌아왔네.”

“다 형님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도편달은 무슨.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네가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아닙니다. 형님이 계시기에 제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형님께서 저를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전 착각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러니 평생토록 형님께 은혜를 갚으며 살겠습니다.”

“됐다. 은혜는 무슨. 차기 모용세가의 가주가. 너는 그저 너 자신과 네 가문, 그리고 가족만 신경 쓰면 된다. 나는 내가 알아서 살 테니까.”

반호진이 팔을 휘휘 저었다.

무슨 마음인지는 알았으나 이 또한 너무 과했다.

이미 지긋지긋하게 들은 말이기도 했고.

그가 바라는 건 모용척이 잘 성장해서 무림의 평화에 일조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형님께 받은 도움이 얼마인데 어찌 제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게 날 도와주는 거야. 그보다 오랜만에 대련이나 하자꾸나. 머리가 복잡할 때는 땀을 시원하게 빼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니까.”

“예.”

반호진의 말에 모용척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 오랜만의 일대일 대련이었기에 기대하는 것이었다.

“좋아. 와라.”

“가겠습니다!”

여전히 뒷짐을 지고 있었으나 모용척은 망설이지 않았다.

검의 유무가 대련의 승패에 전혀 연관이 없음을 너무나 잘 알아서였다.

검객이지만 검이 없을 때도 반호진은 강했기에 모용척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사마의성은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있는 다섯 명의 아이들을 지켜봤다.

천자문을 가르칠 때 가장 습득이 빠르기도 했지만 그게 선택의 이유는 아니었다.

사마의성이 본 건 딱 하나.

바로 인성과 충성심이었다.

‘이 아이들이 사마세가의 주춧돌이 될 거야.’

사마의성의 목표는 누가 뭐래도 사마세가의 재건이었다.

그러나 사마세가를 다시 일으키는 건 절대 혼자서 할 수 없었다.

반호진을 만나고 방계 출신의 가솔들이 제법 찾아오기는 했으나 그중에 진짜 혈연인 이들은 소수였다.

그래서 사마의성은 생각을 달리했다.

살아남은 사마세가 출신들을 계속 모으되 자신이 직접 사람을 키우기로 말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다섯 명이 그 시작이었다.

“어렵거나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으면 언제라도 나한테 물어봐.”

“네!”

“힘든 건 없고?”

“없어요! 오히려 공부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곽춘 또래임에도 조숙한 대답에 사마의성이 빙그레 웃었다.

나중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다.

“무공수련도 빼먹지 말고 해. 체력을 길러서 나쁠 건 없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하던 일도 잘해야 하고. 요령을 부릴 거면 들키지 않게 부려.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하지 말고.”

“네.”

언제 웃었냐는 듯이 서릿발 같은 표정으로 경고 아닌 경고를 하자 아이들이 바짝 얼었다.

조숙해도 아이는 아이였기에 사마의성의 한마디에 긴장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만을 품는 이들은 없었다.

자신들이 잡은 기회가 얼마나 큰 기회인지 본인 스스로가 잘 알아서였다.

“대신 열심히 노력하면 그만한 대가가 있을 거야. 나는 상벌이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할게요!”

우렁찬 아이들의 대답에 사마의성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다.

“이 마음가짐이 오래갔으면 좋겠네.”

“저기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나이는 비슷하지만 가장 연장자라 할 수 있는 소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사마의성은 그런 소년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원을 더 뽑으실 계획이 있으신가요, 가주님?”

“있어.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일단 너희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에 증원할 거야. 인재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처음에는 밝아졌던 아이들의 표정이 뒤로 갈수록 어두워졌다.

인재라는 두 글자에 마음이 무거워져서였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아니었다.

능력이 안 된다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추천은 언제라도 환영이야. 다만 아무나 거둘 수는 없다는 거 다들 알지?”

“네.”

“우선은 현재에 집중해. 아직 너희들은 다른 아이들을 걱정해 줄 때가 아니야.”

사마의성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아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다시 무섭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무재는 부족할지 몰라도 그 대신 똑똑한 아이들이었기에 사마의성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이 아이들이 쑥쑥 자라서 사마세가의 대들보가 되기를 말이다.

‘나도 하나씩 준비해 나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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