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0장. 반격의 서막. -02
“이 대갈빡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이!”
“내 마빡에 피가 마르든 안 마르든 네놈이 무슨 상관이야!”
“인생 막장 쓰레기 주제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처럼 갑자기 쳐들어온 이들로 인해 산채가 뒤집어졌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산적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사방에서 경종이 격렬하게 울려 퍼졌지만 이미 죽은 이들이 반 가까이 되었다.
쩌저적!
그런데 시체들의 상태가 극과 극이었다.
뜨거운 열기에 익은 듯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른 시신과 냉기가 풀풀 날리는 시체가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심지어 냉기가 흘러나오는 시신에는 겨울도 아닌데 두꺼운 서리가 전신을 뒤덮은 상태였다.
“이 꼬맹이들이!”
“헹! 소리만 벅벅 지르지 말고 실력을 보여 주라고!”
기껏해야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꼬마의 도발에 전형적인 산적 얼굴을 가진 거한이 노성을 터트리며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작은 꼬마 아이의 키만 한 도끼였는데 그 큰 도끼를 거한은 가볍게 휘둘렀다.
부우웅! 부웅!
그러나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거부(巨斧)가 연신 매섭게 쇄도했음에도 소년의 몸에는 닿지 않았다.
미꾸라지처럼 얄밉게 그의 거부를 피해 갔던 것이다.
“느려, 느려!”
“이 쥐방울 같은 놈이!”
“싸움에서 중요한 건 키가 아냐. 실력이란 말씀!”
뻐억!
여유롭게 도끼를 피한 백휘경이 다람쥐 같은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거한에게 접근했다.
도끼가 지나간 틈을 이용해 옆구리로 파고들어서는 그대로 일권을 꽂아 넣었다.
“커헉!”
거한에 비하면 작디작은 주먹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게다가 서조운에 비하면 약하다고 하지만 백휘경이 품고 있는 기운 역시 극양지기였다.
그렇다 보니 가격당한 옆구리를 통해서 어마어마한 열기가 전해졌다.
치이익!
마치 뜨겁게 달군 쇠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거한의 옆구리에서 새하얀 연기가 나며 늑대 가죽으로 만든 옷이 타들어 갔다.
그뿐만 아니라 구릿빛 피부가 벌겋게 변하며 물집이 잡혔다.
“뭐 해? 한 방에 보내지 않고. 이왕 죽일 거 깔끔하게 보내 버려. 이런 녀석들한테는 숨 쉬는 공기도 아까워.”
멀지 않은 곳에서 산적 두 명을 깔끔하게 처리한 백휘성이 백휘경을 보며 말했다.
쉽게 끝낼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않은 게 못마땅해서였다.
“이놈들도 고통을 느껴 봐야지. 사람을 아주 가축으로 아는 놈들인데. 그러니 지들도 짐승임을 알게 해 줘야지.”
빠각! 뻑!
동생의 생각도 백휘경은 충분히 이해했다.
어느 정도는 동의하기도 했고.
하지만 고통 없는 죽음은 너무 편안한 죽음이었다.
지은 죄가 있다면 그걸 다 받고 가는 게 백휘경은 맞다고 생각했다.
“니미럴!”
“이깟 애송이들한테……!”
사지를 부러뜨린 후 내장을 파열시켜 천천히 죽게 만든 백휘경이 한줄기 질풍처럼 움직였다.
첫 실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백휘경은 산적들을 쓰러뜨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예유화도 마찬가지였다.
간접적으로나마 전투를 한 번 겪어 봐서 그런지 예유화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산적들의 협공에도 당황하지 않고 극음지기를 이용해 하나씩 차근차근 얼려 죽였다.
스극. 슥.
그러나 가장 큰 활약을 선보이는 건 모용척이었다.
무자비한 검세에 수십 명의 산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예유화와 백휘경, 백휘성 형제가 지금처럼 편안히 싸울 수 있는 건 전부 다 모용척 덕분이었다.
“거, 검귀다!”
“으아아악!”
우직하게 정면으로 쳐들어온 모용척의 모습에 처음에는 비웃으며 달려들었던 산적들이 이제는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
뒤늦게 모용척을 알아보고는 싸울 생각을 버린 것이었다.
거기다 모용척의 뒤에는 서조운과 선우방, 정이륭도 있었기에 산적들은 싸울 마음을 버렸다.
“내가 할 게 없네.”
“당연히 없으셔야죠. 호랑이 잡는 칼로 지렁이를 잡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애들도 경험을 쌓아야 하고요.”
“많이 늘기는 했네.”
“죽음을 직접 보고는 다들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형님도 아시겠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직접 느껴 보는 건 다르잖아요.”
서조운의 대답에 반호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세 사람이 무공에 입문한 시간을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특히 진짜 살기에도 아무렇지 않게 달려드는 것에 반호진은 높은 점수를 주었다.
“맞아.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고 침이 마르도록 말하는 거지. 그나저나 척이는 섬뜩할 정도인데.”
“좀 과한 것 같습니다.”
“나도.”
서조운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러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선우방도 슬그머니 동조했다.
수련에 집중하는 건 좋지만 요즘 너무 많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존심에 금이 간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것이 있는데 모용척은 그 정도를 넘어선 느낌이었다.
“살짝 위태로워 보이기는 하는데 아직은 괜찮아. 어떨 때는 저게 돌파구가 되기도 하고.”
“그건 안 좋은데요. 갑자기 팍 치고 나가면 좀.”
“너도 참.”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지금의 말이 진담임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사, 살려 줘!”
“악마 같은 놈! 지옥에 떨어질 거다!”
세 사람이 잡담을 하는 사이에도 모용척은 무서운 속도로 산채를 가로질렀다.
광살노옹과 녹림팔노가 녹림십팔채의 산적들 이천 명을 데려갔다가 몰살을 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져서 그런지 대부분의 산채는 가급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
상대가 반호진이기에 다들 몸을 사렸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산채에는 꼭꼭 숨은 산적들로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퍼퍼퍼퍽!
돌격대장처럼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는 모용척을 피해 산적들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애초에 충성심 같은 게 없었기에 너나 할 거 없이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 챙겼다.
저벅저벅.
앞장서서 날뛰어 주는 모용척 덕분에 반호진은 뒷짐을 지고서 편안하게 산채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 산채의 심처에 도달했던 것이다.
콰아앙!
문짝을 부수고 들어갔던 모용척이 내부를 박살 내는 소리를 들으며 반호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예유화와 백휘경, 백휘성 형제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산채를 습격한 게 처음이기에 셋 다 모든 게 궁금한 것이었다.
“우리도 들어가자.”
“예.”
단층 건물임에도 크기가 꽤 커서 그런지 모용척이 방이란 방은 다 뒤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문이 보이면 다 부수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반호진은 느릿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서조운과 일행들이 뒤따랐다.
“채주는 도망친 것 같습니다.”
가장 안쪽의 방에 도착하자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모용척이 들어왔다.
두 눈에서 흉흉한 기세를 풍기면서 말이다.
“금고는?”
“확인했는데 그대로입니다. 무언가를 챙겨 간 흔적도 없습니다.”
모용척이 이 방 다음으로 찾은 게 금고였다.
산적은 기본적으로 재물을 밝히기에 도주할 때 가장 먼저 챙기는 게 바로 금과 보석류였다.
크기는 작지만 가치는 커서였다.
그런데 금고 어디에서도 급하게 챙긴 흔적은 없었다.
“빈 몸으로 떠났을 리가 없는데.”
“돈보다 자기 목숨이 더 소중하니까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 우리가 왔는데 재산을 챙길 정신이 있었겠어?”
의문을 드러내는 서조운과 달리 선우방은 몸만 내뺐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채주였어도 일행을 알아본 순간 그대로 도망쳤을 것이었다.
싸움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거지 패배가 확실한데 싸우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네 생각은?”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습격을 파악하자마자 도망쳤거나 산채 어딘가에 숨어 있거나. 쥐 잡듯이 잡기만 했지 구석구석 살펴보지는 않았으니까요.”
“자, 그럼 살펴볼까? 어차피 쓸모 있는 게 있나 뒤져 보긴 해야 하니까. 단, 너희 셋은 조운이와 함께 움직여. 아직 정리가 끝난 게 아니니까.”
첫 실전이자 처음으로 본 산채라는 걸 알기에 반호진은 예유화와 쌍둥이 형제를 보며 명확하게 지시했다.
괜히 혼자 움직이다가 사고를 당할 수도 있어서였다.
또 첫 실전이라 지금도 흥분 상태이기에 그걸 잡아 줄 사람이 필요했다.
“네.”
“알겠습니다!”
“예!”
“좋아.”
지시를 내린 반호진은 뒷짐을 진 채로 널찍한 실내를 찬찬히 둘러봤다.
가장 상석에 커다란 호피로 덮여 있는 큰 의자가 있었지만 앉지는 않았다.
딱 봐도 상태가 더러웠기에 반호진은 서 있는 걸 택했다.
“호오. 요즘에 활동을 제대로 못 했을 텐데 쌓아 놓은 재화가 상당하네?”
“저희야 좋죠. 복수도 하고, 재산도 늘리고.”
“솔직히 남는 게 많긴 하지. 근데 호진의 몸값을 생각하면 헐값이기도 하고.”
“그건 그렇죠.”
정이륭이 곧바로 수긍했다.
이렇게 편안하게 산채를 털 수 있는 것도 다 반호진 덕분이었다.
그나 선우방, 서조운, 모용척도 어디 가서 꿀리는 후기지수는 아니지만 반호진과는 비교불가였다.
반호진은 그 어떤 후기지수도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아이들이 좋아하겠네. 호진이 성격상 인원수대로 나눌 테니까.”
“고생했는데 당연히 가져가야죠. 저희가 왈가왈부할 자격도 없고.”
“또 보상이 있어야 의욕도 생기니까.”
“저희도 그렇게 길들여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이륭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그 말에 선우방은 씨익 웃었다.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요. 다다익선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좋은 건 많을수록 좋지요.”
두 사람이 금고로 사용하는 방을 나와 다른 곳들을 살펴봤다.
모용척이 방문을 죄다 박살을 내 놓았기에 살펴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기. 추격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도망친 산적들이 많은데…….”
한편 반호진의 지시에 서조운과 함께 채주의 처소를 살펴본 후 다시 대전처럼 널찍한 집무실로 돌아온 백휘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모용척의 활약과 세 사람의 분전으로 산적들을 많이 처치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도망친 이들이 꽤나 많았다.
근데 그들에 대해서 너무 무신경한 것 같았기에 백휘성은 물론이고 백휘경도 의아했다.
“이곳을 알려 준 게 어디지?”
“금가장이요.”
“또 다른 질문. 여기 흑두채에게 가장 많이 피해를 입은 곳이 어디일까?”
“아!”
백휘경과 백휘성이 동시에 탄성을 터트렸다.
이제야 일행들이 도주한 산적들을 신경 쓰지 않는지 이해가 되어서였다.
“일은 능률 있게 해야지. 우리는 수뇌부를 잡고, 잔챙이들은 금가장에 맡기면 돼. 오히려 너무 많이 잡으면 서운해할걸. 피해 입은 이들도 복수할 기회는 줘야지.”
“그러네요.”
“즉 우리는 우리가 할 일만 제대로 하면 돼.”
“알겠습니다.”
쌍둥이 형제는 물론이고 조용히 서 있던 예유화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시에 눈을 반짝였다.
그냥 이유를 말해 줘도 되지만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 주는 게 세 사람은 좋았다.
이해가 쏙쏙 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어서였다.
“음?”
설명을 마친 서조운은 매의 눈으로 실내 곳곳을 살펴봤다.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어서였다.
분명 평범한 방이었는데 묘한 위화감이 그의 직감을 톡톡 건드렸다.
“뭔가 이상하지?”
“형님도요?”
“바닥을 봐. 너무 인위적이지 않아? 여기가 그렇게 추운 지역도 아닌데.”
“아!”
반호진의 말에 서조운이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단숨에 바닥 전체에 깔려 있는 융단을 확 잡아당겼다.
“헐.”
“이런 수법도 쓰는구나.”
다른 방들과 달리 큼지막한 벽돌로 이루어진 바닥에 쌍둥이 형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벽돌의 크기가 딱 장정 한 명이 비집고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기 때문이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어떤 목적을 위해서인지 알 수 있었기에 쌍둥이 형제는 신기한 표정으로 서조운이 발꿈치로 바닥을 두드리는 걸 지켜봤다.
퉁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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