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장. 관점의 차이. -01
왠지 모르게 정감 가는 이름에 정이륭이 미소를 지었다.
촌스럽다기보다는 직관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귀엽네요.”
“사연이 있는 아이들인데, 어쨌든 잘 컸지. 목장도 잘 지키고.”
“목장까지 만드실 줄은 몰랐어요.”
“관리는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반호진은 정이륭의 저의를 귀신같이 읽어 냈다.
그렇기에 인정하듯 대답했다.
“형님께서 이렇게 나와 주시는 것도 관리죠. 일단 가축들이 낯설어하지 않잖아요.”
“사람에 길들여져서 그래. 그보다 남쪽으로 가다가 들른 거야?”
반호진의 시선이 정이륭을 지나 늘 그렇듯이 담담한 얼굴로 묵묵히 서 있는 상일기에게로 향했다.
때마침 가는 길목에 남창이 위치했기에 가다가 들른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아직 따로 결정한 건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도 이제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좀 쉬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문주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무상문에서 조금 머물고 싶습니다.”
“저야 언제든 환영이지요.”
“감사합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락해 주는 반호진의 모습에 상일기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모습에 반호진도 마찬가지로 답례를 표하듯 마주 허리를 숙였다.
“다만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것이 있습니다. 최대한 서둘러 건물을 짓고 있기는 한데 완성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괜찮습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으니까요.”
“또 노숙은 익숙합니다. 하하하.”
정이륭이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했다.
사실 반호진의 허락이 중요하지 방이 편안하느냐, 불편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손님이신데 그럴 수는 없지.”
“손님이라니요. 저 섭섭합니다. 사부님과 저는 반은 가족 아닙니까?”
“가족은 아니지.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빈객과 가족 사이의 어디쯤이라고 해 두자.”
“아직 갈 길이 멀군요.”
“이상한 데에 꽂히지 마.”
짐짓 서운하다는 듯이 말하는 정이륭의 모습에 반호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상일기는 조용히 지켜봤다.
반호진의 말마따나 가족이 아닌데도 이상하게 만나면 편한 분위기가 있었다.
또 느끼는 것도 많았고.
‘더 강해졌어.’
반호진을 보는 순간 상일기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랐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참 놀라웠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특별했기에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워낙에 상상 이상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크게 놀랍지가 않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했다.
더 높은 경지에 대한 간절함이나 절박함이 없는데도 반호진은 단 한 번도 막힘없이 꾸준히 성장했다.
‘보통은 이룩한 힘에 취하든 성장세에 취하든 둘 중 하나인데 말이지. 근데 그 어느 쪽도 아니니.’
더구나 반호진은 중견고수도 아니고 겨우 스물두 살의 후기지수였다.
절정고수만 되어도 귀재이니, 천재이니 추켜세워 주기에 기고만장하기 마련인데 반호진은 달랐다.
아무리 주변에서 치켜세워 주고 받들어 줘도 거만을 떨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은 오만하다고 하는데 상일기가 보기에는 오만한 게 아니라 자신감이 있는 것이었다.
‘나이를 떠나서 대단한 무인이지.’
한때는 상일기도 아주 잠시 반호진을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쌓아 온 수행이 높기도 했지만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어 갈수록 자신의 끝이 어느 정도 보였다.
또 개왕의 부상이 그에게도 많은 생각거리를 주었다.
절대고수라도 세월을 피해 갈 수 없음을 몸소 보여 주어서였다.
그래서 요즘 상일기는 생각이 많았다.
“가자. 식구들을 소개시켜 줄게.”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구가 엄청 늘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재능 있는 아이들도 있다고.”
“긴장이 좀 될 거야.”
“조운이만 해도 무서운데 말이죠.”
상일기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정이륭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말과는 다르게 전혀 긴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말이다.
그런 정이륭의 모습에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새롭게 지어진 응접실이었으나 정작 난희주는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머리에 오만가지 생각이 가득했기에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옆에 앉아 있는 하오문주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다르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하오문주는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끼이익.
따뜻한 차가 찻잔을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두 사제는 좀처럼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난희주와 하오문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아니에요.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걸요.”
한눈에 봐도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는 하오문주와 묘하게 경직되어 있는 난희주의 모습에 반호진이 옅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반호진의 미소에도 두 사람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 나한테 죄라도 지은 것처럼.”
“오빠 입장에서는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배신을 했다면 이곳이 아니라 천사맹으로 갔을 것 같은데.”
“내 말을 믿어 줄 수 있어?”
난희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직전에 헤어졌을 때가 아니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난희주는 긴장한 모습이었다.
“나도 자세하게는 모르는 상태라 설명을 해 주었으면 하는데. 믿을지 말지는 들어 보고 결정해도 되니까. 그리고 제대로 설명하려고 너와 문주님이 직접 온 거 아냐?”
“맞아.”
난희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럼 말해 봐.”
“본문에 분열이 일어났어. 정확하게는 반역이라고 해야 하나. 장로들 중에서 영향력이 제법 큰 이들 몇몇이 천사맹으로 넘어갔어. 그래서 내부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야. 문주님을 따르는 이들과 천사맹에 붙은 장로들을 따르는 이들로 나누어져서 현재 싸우는 중인데 천사맹에 넘어간 이들이 광살노옹의 정보를 차단했어.”
“역시 한통속이었구나.”
“오빠도 예상했겠지만 천사맹 입장에서는 잘만 하면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일이라 적극적으로 지원했어. 우리는 내전 중이라 미처 그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고.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오빠가 습격을 받은 뒤였어.”
난희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미안함에 반호진을 마주 볼 수가 없는지 시선도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네가 미안할 거는 없어. 공격한 건 광살노옹과 천사맹이지 하오문이 아니니까. 그리고 네가 정말 천사맹에 붙었다면 고작 광살노옹과 녹림팔노만 보내지는 않았겠지. 나에 대해서 꽤 많이 알고 있는 게 너인데.”
“……믿어 주는 거야?”
“전부는 아니고 어느 정도는?”
지나칠 정도로 주눅 들어 있는 난희주의 모습에 반호진이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난희주는 좀처럼 웃지를 못했다.
“다행이네. 사실 나는 문전박대도 생각하고 왔거든.”
“상황이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네. 문주님의 표정도 그리 좋지 않고.”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던 하오문주가 지금만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서 반호진은 하오문의 내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분이 일어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거든. 사부님도 그렇고 나도 하오문을 나름 잘 이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야.”
“꼭 능력이 없어야지만 반기를 드는 건 아니니까. 수장의 능력 유무에는 상관없이 반골들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지. 트집을 잡으려면 어떻게든 잡을 수 있다는 거, 너도 알잖아?”
“맞아. 근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라서.”
난희주가 분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실수는커녕 그 어떤 시기보다 하오문을 잘 이끌고 운영한 게 사부와 자신이었다.
심지어 자칫 잘못했으면 멸문지화를 입을 뻔한 것도 탁월한 선택으로 막아 내었다.
만약 하오문이 중립이 아니라 새외무림에 합류했다면 결코 지금처럼 멀쩡히 있지는 못했을 터였다.
“원래 욕심에 눈이 멀면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힘드니까. 사실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어. 아무리 녹림십팔채가 산에 익숙하다고 하나 개방과 금가장의 눈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니까. 그런데 천사맹과 마도련으로 시선을 확 끌어당기면 불가능하지는 않겠더라고. 아무래도 전쟁이니만큼 대부분의 시선이 마도련과 천사맹으로 향할 테니까. 다만 내분은 생각지 못했어. 난 천사맹을 선택한 건 아닐까 싶었거든. 얘기를 듣자 하니 천사맹 쪽에서 강력하게 하오문을 원한다고 했고.”
“그건 맞아. 개방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본문이니까. 천사맹으로서는 당연히 탐을 낼 수밖에 없지. 실제로 휘하로 들어오라고도 협박했고. 근데 거절도 아니고 고민해 보겠다고 했는데 배신자가 나온 거야.”
“애초에 패를 두 개 가지고 있었군.”
“나와 사부님은 그렇게 생각해. 아니면 빠르게 방향을 틀었거나.”
불안감이 조금은 가셨는지 난희주의 목소리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오문주는 여전히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고 해서 결과가 꼭 좋게 나오는 건 아니었다.
또한 지금까지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하오문의 입장이었기에 그대로 받아들일지, 곡해해서 받아들일지는 반호진의 마음에 달렸다.
“네 생각은 어떤 거 같은데?”
“천사맹 쪽에서 바람을 넣었을 것 같아. 원래부터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워낙에 인원이 많은 만큼 나나 사부님께 불만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없지는 않거든. 생각 외로 문파 내의 지배력이 절대적이지도 않고. 어떻게 보면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맺어진 관계이기도 하니까. 정사중간이라지만 성향은 사파에 더 가깝기도 하고.”
“확실히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있다니까.”
“오빠에게 도움을 받은 건 생각지도 않고 너무 정파와 가까워지는 건 아니냐고 떠드는 이들도 있어. 그들 대부분이 현재 천사맹주에게 붙었고. 거기다 유언비어까지 퍼트리고 있어서 오빠를 찾아온 거야. 현재 하오문의 상황도 설명해 줄 겸 결백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난희주가 반호진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후자였다.
현재 그녀와 하오문주의 처지는 사면초가였다.
천사맹이라는 나름 든든한 배경을 둔 배신자들과는 달리 난희주와 하오문주는 사방에 적이 있었다.
배신자들은 어떻게든 그녀와 하오문주를 제거해서 하오문을 집어삼키려 했고, 천사맹이 그걸 지원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백도무림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상황이 아주 난처했다.
“결백이라.”
“다른 이들은 아예 듣지조차 않을 테지만 오빠는 다르니까. 또 말할 곳이 오빠밖에 없기도 하고.”
난희주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충격이 더욱더 컸다.
“앞으로의 계획은? 이대로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마음은 없을 거 아냐?”
“당연하지. 배신자의 말로는 죽음뿐이야. 그런데 당장은 힘들어. 장로들이 머리를 잘 썼어. 완전히 외통수에 빠진 상태라.”
“나도 그래서 신기하기는 해. 천하의 난희주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줄이야.”
“천사맹이 발족할 줄은 몰랐으니까. 이렇게 대놓고 탐욕을 부릴 줄도 몰랐고. 사방에서 일이 터지니 나도 별수 없더라고. 사부님께서 받은 충격도 크고.”
난희주의 시선이 하오문주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말대로 배신에 대한 충격이 상당한 모양인지 처음의 인사 말고는 아예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이번 사태로 적아를 확실하게 구분했다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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