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장. 아낌없이 주는 나무. -02
“많이 시끄러우시죠?”
“어쩔 수 없지. 언제까지 다 무너진 곳에서 생활할 수는 없으니까.”
방 안으로 들어온 서조운의 시선이 활짝 열린 창문으로 향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창문을 닫는 것으로 소음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겠지만 반호진에게는 무의미했다.
청각이 예민했기에 고작 창문을 닫는 것으로는 소음을 차단할 수 없었다.
“제가 슬쩍 물어봤는데 소리가 안 나게 공사를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가능하겠어? 그리고 나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고생이지. 하루아침에 집이 사라졌는데.”
안 그래도 당장 급한 숙소부터 짓는다고 하더라고요.”
“의성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이번에도 산적들은 저희에게 무공비급을 주고 갔네요.”
“녹림팔노에게서 나온 걸 제외하면 다 별 볼 일 없지만.”
탁자 위에 제법 쌓여 있는 서책들을 보며 서조운이 피식 웃었다.
어째 만날 때마다 선물을 주고 가는 것 같아서였다.
“궁금하네요. 그래도 나름 녹림도 중에서는 손꼽히는 고수들이잖아요.”
“보고 싶으면 봐.”
“제가 봐도 돼요?”
“안 될 건 없잖아? 어차피 이번에 얻은 무공서들은 판매하지 않을 거야. 나중에는 팔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안 팔아. 대신 좀 더 의미 있게 사용할 거야. 산적들이 나쁜 거지 무공이 나쁜 건 아니니까.”
스윽.
반호진이 따로 빼놓은 녹림팔노의 무공비급을 서조운에게로 밀었다.
비록 초월경에는 닿을 수 없는 무공비급이었으나 그럼에도 상승절학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초절정이나 최절정의 경지도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무공이 죄가 없기는 하죠.”
“지금껏 나쁘게 사용되었다면 앞으로는 좋게 사용되는 게 이 무공들에게도 좋지 않겠어? 너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걸 봐도 되나 싶습니다.”
“왜 아무것도 안 해? 우리 식구들 지켰잖아. 설마 남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럴 리가요!”
서조운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맹세컨대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서였다.
단지 염치가 없어서 선뜻 무공비급을 받지 않은 것이었다.
“그럼 봐. 본다고 해서 닳는 건 아니잖아. 지금 너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주는 것이기도 해. 당장 네가 알고 있는 건 내공심법과 검법이 다잖아? 꼭 애들 때문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무공을 연구해서 나쁠 건 없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 너만 보라는 건 아냐. 방이나 척, 의성이한테도 보여 줘. 아마 벽을 뚫는 데 도움이 될 거야.”
“순서는 제가 정해도 되죠?”
서조운이 히죽 웃었다.
순서를 가지고 일행들에게 장난칠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너 알아서 해.”
“흐흐흐! 알겠습니다!”
“참, 척이는 어때?”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데, 속은 좀 안 좋은 거 같아요. 말은 안 하는데 자존심이 많이 상한 것 같더라고요. 폐관수련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진즉에 들어갔을 분위기예요.”
“척이 성격상 그럴 만하지.”
많이 겸손해졌다고 하나 본래 성격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척이 형은 괜찮겠죠? 경지가 높아질수록 심마를 조심해야 한다고 형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지금은 약이 될 거야. 너나 방이도 간접적으로 느꼈을 거 아냐? 예전에 비해 독기나 간절함이 사라졌다는 걸.”
“그렇기는 하죠.”
“척이라면 이겨 낼 거야. 이 정도도 못 이겨 낸다면 안타깝지만 여기까지인 거지.”
아무리 반호진이라도 다른 사람의 경지를 높여 줄 수는 없었다.
그저 약간의 도움만 줄 수 있을 뿐.
결국 벽을 뚫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본인이었다.
“다 큰 형을 챙기게 되었네요.”
“서로 도와 가면서 사는 거지. 그게 인생이고.”
“제가 얼른 자라서 형님을 보필하겠습니다.”
“나도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구나.”
쓸데없이 비장한 서조운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여전히 소년 같은 면모가 있는 것 같아서였다.
똑똑.
“문주님. 매향이옵니다.”
“들어와.”
“네.”
서조운과 담소를 나누는데 문 너머에서 황매향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황매향이 안으로 들어왔는데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무슨 일이야?”
“하오문에서 문주님께 서신을 보냈습니다.”
“나에게 서신이라.”
“소문주의 직인이 찍힌 서신입니다.”
황매향이 공손히 대답하며 두 손으로 밀봉된 서신을 내밀었다.
그러나 반호진은 서신을 받았음에도 곧바로 뜯지 않았다.
단순히 안부 인사를 하려고 서신을 보낸 게 아님을 알기에 지그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서조운과 황매향 역시 눈치가 있었기에 조용히 있었다.
지이익.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밀봉되어 있던 사신을 쳐다보던 반호진이 느릿하게 봉투를 뜯었다.
그러고는 묘한 눈으로 정성스럽게 쓴 글을 읽어 내려갔다.
***
꼬오옥! 꼬꼬꼬고!
목장에 도착한 반호진은 뒷짐을 지고서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다.
광살노옹의 습격이 있었음에도 목장의 상태는 양호했다.
거의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바로 이 목장이어서였다.
“평화롭구나.”
닭들은 모이를 쪼아 먹고 오리는 뒤뚱거리며 돌아다녔다.
가끔 연못에서 수영 연습을 하는 새끼 오리도 있었는데 그 모습조차도 반호진은 아름다워 보였다.
헥헥헥!
“그래그래. 너희들이 고생하는 것도 알지.”
어떻게 아는 건지 밖에만 나오면 귀신같이 따라붙는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의 머리를 반호진은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같이 있는 시간으로 따지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이 훨씬 더 많음에도 삼형제는 이상할 정도로 반호진을 따랐다.
정작 챙겨 주고 애정을 주는 이들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발라당!
다른 사람이었다면 간식을 주어야 겨우 볼 수 있는 배를 까는 애교도 반호진은 예외였다.
그냥 머리만 살짝 쓰다듬어 주어도 삼형제는 좋다고 배를 뒤집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부터 만져 달라는 듯이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난 간식 없다, 이 녀석들아.”
부담스러울 정도로 애교를 부리는 삼형제의 모습에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애교를 떨어도 그에게는 줄 간식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반호진은 몰랐다.
처음부터 그에게 간식이 없다는 걸 삼형제는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워오올! 워올!
“아, 아예 없지는 않네. 싱싱한 계란이랑 오리 알이 있으니.”
곽춘이 가끔 계란과 오리 알을 삼형제에게 간식으로 준다는 걸 떠올린 반호진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목장 한쪽 구석에 지어져 있는 닭장에서 계란 세 개가 두둥실 떠올라 반호진의 앞으로 날아왔다.
툭. 툭. 툭.
난데없이 계란이 날아오자 삼형제의 새카만 눈동자들이 동그래졌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것이었다.
그런데 놀랄 일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세 마리가 놀라서 몸을 일으키자 코앞으로 다가온 계란이 반으로 갈라지며 안에 담고 있던 내용물을 드러냈다.
헤엑?!
삼형제의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다시 한번 커졌다.
계란이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도 놀라운데 저절로 반 토막이 나며 내용물을 드러내자 삼형제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고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셋 다 경계하는 것이었다.
크릉! 크르릉!
그러면서도 도망치지는 않았다.
반호진이 곁에 있기도 하거니와 계란에서 흘러나오는 향긋한 냄새가 삼형제를 붙잡았기에 조심스럽게 코를 킁킁거렸다.
“먹어도 된다. 너희들 주려고 가져온 거니까.”
스윽.
경계하는 삼형제의 모습에 반호진이 옅게 웃으며 무형지기를 조절했다.
다른 이가 봤다면 쓸데없이 능력을 낭비한다고 말했을 광경이었다.
그러나 반호진에게는 결코 낭비가 아니었다.
이 정도 내공 소모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할짝!
먹기 좋게 계란을 턱 높이로 맞춰 주자 삼형제가 슬쩍 혀로 핥았다.
반호진이 먹으라고 말했기에 시험 삼아 살짝 맛을 본 것이었다.
“괜찮다니까.”
마지막까지 경계심을 풀지 않는 모습에 반호진이 다시 한번 말하자 그제야 삼형제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이제는 다 커서 그런지 계란 하나가 순식간에 배 속으로 사라졌다.
“진짜 다 컸네. 조금 더 있으면 새끼도 낳겠어.”
어느새 다 먹고 다시 배를 발라당 까는 삼형제의 모습을 보며 반호진은 새삼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느꼈다.
부모를 잃고 하루를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늑대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덩치가 컸다.
실제로 가축을 사냥하러 뒷산에서 내려온 늑대를 쫓아내기도 했다.
헥헥헥헥!
배를 살살 긁어 주는 반호진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삼형제의 꼬리가 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격렬해졌다.
“다 자라서 그런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들개로 오인할 수도 있겠는데.”
삼형제와 놀아 주며 반호진이 중얼거렸다.
강아지 때야 작고 귀여워서 사람들에게 위협이 전혀 안 됐지만 지금은 달랐다.
물론 반호진의 눈에는 여전히 귀엽게 보였으나 다른 이들에게는 달리 보일 수도 있었다.
길들여진 개인지 야생의 들개인지 처음 보는 사람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끼잉?
“이참에 목걸이랑 이름표도 달자. 그럼 사람이 키우는지 알겠지.”
반호진의 중얼거림에 삼형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하지만 삼형제는 이내 다시 활발히 움직이며 몸을 비볐다.
말의 내용보다는 반호진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해서였다.
음무우우!
삼형제와 잠시 놀아 준 후 반호진은 다시 목장을 구경했다.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을 보자 반호진의 마음도 평온해졌다.
남들이 보면 지루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라고 말할 텐데도 이상하게 반호진은 이런 게 좋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이 좋다고나 할까.
“얼마나 좋아. 이 평화. 이 고즈넉함. 그런데 왜들 그렇게 욕심이 많아서.”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반호진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개인적으로 반호진 역시 욕심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욕심은 곧 향상심이며 인간의 본능이었다.
다만 문제는 욕심이 과해져 욕망이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참고 견딜 정도면 그나마 나은데 대부분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더 많은 곳에 악영향을 끼쳤다.
지금의 천사맹과 마도련처럼 말이다.
“그놈의 패권이 뭐라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반호진은 짜증이 났다.
겨우겨우 천하사패를 잠재웠더니 이제는 사도무림과 마도무림이 날뛰자 반호진은 한숨이 나왔다.
저벅저벅.
“생각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무상문주님.”
“방천문주님?”
“저도 있습니다, 형님.”
나무에 기대어 한숨을 푹푹 내쉬던 반호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두 눈 가득 반가운 얼굴이 들어왔다.
바로 숭산에서 헤어졌던 상일기와 정이륭이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두 사람의 모습에 반호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르르르.
반면에 처음 보는 삼형제는 몸을 낮추며 눈치를 봤다.
낯선 사람이기에 경계하면서도 반호진이 반가워하자 이내 드러냈던 이를 감췄다.
그러나 섣불리 경계심을 풀지는 않았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전대 총표파자의 습격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내가 당할 줄 알고?”
“그럴 리가요. 형님 실력을 제가 아는데요. 다만 복구하는데 힘을 좀 보태 드리려고 왔습니다. 친구랑 동생들도 보고, 새로운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려고요.”
“방이가 실망하겠는데.”
선우방만 쏙 빼놓고 말하자 반호진이 그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하나 정이륭은 당황하지 않았다.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선우방이 서운해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방이 형은 이해해 주실 겁니다. 친구와 달리 마음이 넓은 형이니까요. 그런데 개도 키우시는 거예요?”
“어쩌다 보니. 이름은 얘부터 일동이, 이동이, 삼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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