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97화 (297/468)

제 98장. 아낌없이 주는 나무. -01

반호진은 미간을 좁혔다.

또 다른 세력의 등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어서였다.

하오문의 눈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개방과 금가장의 시선까지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제삼의 세력이라. 가능성은 있지. 하오문과 금가장, 개방의 시선을 동시에 피할 만한 역량이 있다면.”

“사실 말이 안 되기는 하죠. 그래서 저도 천사맹이 유력하다고 말씀드린 것이고요. 얼마 전에 들은 소식인데 장강수로채, 황하수로채, 동정수로채가 천사맹에 합류했다고 해요.”

“수적들이 합류했으니 산적들이 합류해도 이상하지는 않겠네.”

“맞아요. 게다가 쓰고 버리는 패로 딱 적당하죠. 늙은 초월경의 고수가 백도무림의 미래라 불리는 형님을 잡아 준다면 천사맹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으니까요. 마도련은 성공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기도 하고요.”

“그러면 아귀가 딱 맞지. 광살노옹의 습격이 성공해도 이득이고 실패해도 암습할 최적의 기회를 잡을 수 있으니까.”

사실 반호진도 이렇게 생각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보다 앞뒤가 딱딱 떨어지는 건 없었다.

천사맹이나 마도련이나 그가 거슬리는 건 똑같을 테니까.

“천사맹이라면 개방과 금가장의 시선을 돌리는 것도 가능하니까요. 아무리 산적들이 산길에 익숙하다고 하나 개방과 금가장의 시선에서 완벽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요. 하오문이야 정사중간의 문파이니 어찌어찌 방해한다고 해도 다른 두 곳은 다르죠. 천사맹의 압박이 통하지 않는 곳들이니까요.”

“정확한 건 광살노옹과 녹림팔노를 통해 알아내야지. 겸사겸사 산채의 위치도 파악하고. 받은 게 있으니 당연히 갚아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않겠어?”

“그보다 괜찮을까요? 하오문과의 관계가요.”

“애매하기는 하지. 천사맹에서 어떻게든 끌어들이려 할 테니까.”

사마의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까지 하오문이 천사맹에 합류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렇다고 새외무림과의 전쟁 때처럼 중립을 표할 수도 없었다.

“만약 천사맹에 합류한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싸워야겠지. 그게 서로가 선택한 길이라면.”

반호진은 고민하지 않았다.

서로의 입장이라는 게 있었고, 어른이라면 그걸 존중해 주어야 했다.

조언과 강요는 엄연히 달랐기에 반호진은 어떤 쪽을 선택하든 그 선택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싸울 일은 아마 없을 거야.”

반호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난희주였기에 섣불리 결정하지는 않을 터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또 모르니까요. 워낙에 변수가 많은 게 전쟁이기도 하고요. 일단 천사맹주가 사사혈천교주라는 것밖에는 밝혀지지 않기도 했고요.”

“우선은 살수들이 천사맹 소속인 것부터 확인하자고.”

“네. 제가 알아볼게요. 참, 이것 좀 봐 주세요.”

스윽.

야무진 표정으로 대답한 사마의성이 품속에서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상당히 큰 종이였는데 다 펼치자 탁자보다 컸다.

“그새 이걸 그렸어? 좀 쉬지.”

“어차피 해야 할 일이잖아요. 그래서 생각난 김에 준비해 봤어요.”

“구조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새로 지을 장원의 구조가 그려진 설계도를 보며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강 봐도 원래의 규모보다 더 큰 것 같아서였다.

“전체적인 틀은 비슷한데 규모가 조금 더 커졌어요. 건물도 좀 늘었고요.”

“이렇게까지 키울 필요가 있을까?”

“부족한 것보다는 남는 게 나으니까요. 어쩌면 이것도 부족할지 모르고요.”

사마의성의 두 눈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처음 설계하다 보니 은근히 미흡한 게 많았었다.

지을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거주하면서 부족하다 느낀 점이 꽤 많았기에 이번에는 그런 것들을 보완할 계획이었다.

“어째 신나 하는 것 같다?”

“지어 놓고 보니까 설계 당시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좀 있어서요. 그걸 이번에는 보완해서 지을 거예요.”

“신나 하는 거 맞네.”

“하하하.”

“예산도 꽤 많이 나올 것 같고.”

따로 예산을 적어 놓지는 않았지만 딱 보는 순간 반호진은 느꼈다.

꽤나 큰 금액이 들어갈 거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사마의성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최대한 금액과 타협을 보면서 지어 볼게요.”

“아니야. 이왕 짓는 거 확실하게 지어야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 청림표국에서 받은 금액이 꽤 되잖아? 그걸로 짓는다고 생각하지 뭐. 부족하면 내 사비를 더하고.”

“저도 보탤게요.”

“괜찮아. 나도 내 돈으로만 복구할 생각은 없어. 우선은 내 사비로 복구하고 쓴 돈은 녹림십팔채에서 받을 거야.”

“아.”

사마의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인지 단박에 이해해서였다.

그러나 강탈은 절대 아니었다.

반호진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니까 예산은 걱정하지 말고 너 짓고 싶은 대로 한번 지어 봐. 나중에 사마세가도 네가 직접 설계할 거 아냐. 그거 연습한다고 생각해.”

“연습이라기보다는 본가라고 생각하고 짓겠습니다.”

“뭐, 편한 대로 해.”

하지 말라고 해도 할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반호진은 더 말리지 않았다.

열심히 하면 그에게 좋은 일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번에는 진짜 튼튼하게 지을 거예요. 웬만해서는 무너지지 않게요.”

“그래. 근데 이왕이면 무난하게 지어 줘. 이상한 건 싫어.”

“참고할게요.”

“오늘 하루 피곤했을 텐데 이만 가서 쉬어. 내일부터 복구하려면 정신없을 테니까.”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기에 반호진은 자리를 파했다.

사마의성도 사마의성이지만 그도 오늘은 좀 푹 자고 싶어서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평안한 밤 보내세요.”

“너도 잘 자고.”

“네.”

표정을 보아하니 절대 잠자리에 들 표정이 아니었으나 여기서 뭐라 하는 건 잔소리밖에 되지 않았기에 반호진은 말을 아꼈다.

대신 손을 흔들며 인사만 받아 주었다.

***

끼이익.

녹슨 경첩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반호진이 지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벽의 중간중간에 놓인 횃불 덕분에 아주 컴컴하지는 않았는데 일렁이는 불꽃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뇌옥 특유의 싸늘하고 서늘한 분위기라고 할까.

“괜찮네.”

뇌옥을 만들기는 했으나 들어온 건 처음이었기에 반호진이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방으로 향했다.

덜컹.

단단한 철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어제 생사결을 펼쳤던 광살노옹이었다.

최소한의 응급조치만 했는지 배 부분에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제야 왔군.”

“약속은 지켜야지.”

“하! 약속?”

반호진이 봉합하기는 했으나 선천진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신모공을 통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때문에 광살노옹의 피부는 시체처럼 푸석푸석했다.

생기가 거의 없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두 눈빛만은 여전했다.

“내가 다시 보자고 했잖아. 우리는 나눠야 할 대화가 있고.”

“크큭!”

광살노옹이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자신도 미친놈이지만 반호진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 하나 더 약속하지. 순순히 협조하면 고통 없이 보내 주마.”

“그걸 조건이라고 씨부리는 게냐? 네놈이 뭘 어떻게 하든 난 어차피 죽을 목숨이다. 그런데 내가 왜 협조해야 하지?”

“마지막 가는 순간은 편안히 가야지. 고통스럽게 가면 얼마나 한탄스럽겠어. 안 그래?”

“네놈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난 협조할 생각 없다.”

더 이상 대화하지 않겠다는 듯이 두 눈을 감아 버리는 광살노옹의 모습에 반호진은 입맛을 다셨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으나 그래도 아쉬워서였다.

“사손이 걱정되지 않나?”

“내가 협조한다고 네놈이 과연 살려 줄까?”

“역시 이렇게 되는군.”

“시끄럽고, 죽여라.”

“천사맹에 당한 걸 갚아 주고 싶지 않나?”

반호진이 슬쩍 떠봤다.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모든 걸 내려놓은 듯이 행동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건 불가능했다.

특히나 광살노옹 같은 인물은 더더욱 그러지 못했다.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군?”

“난 그냥 순수하게 물어보는 거다.”

“복수라. 어차피 죽을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광살노옹이 비릿하게 웃었다.

절대 반호진이 원하는 대답은 해 주지 않겠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늙은이가 잔머리만 밝아서는.”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너도 곧 나를 따라 뒈질 테니까.”

“아직은 죽을 생각 없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손주는 보고 죽을 거야. 그리고 당신은 내일 해가 지기 전에 죽겠지. 물론 편안한 죽음은 아니겠지만.”

푹.

반호진의 손가락이 광살노옹의 어깨에 닿았다.

딱히 혈도를 짚은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찌른 것이었다.

한데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손가락이 닿은 순간 광살노옹의 눈에서 검은자위가 사라졌다.

“끄으으으!”

극도의 고통을 느끼는 모양인지 광살노옹의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온몸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다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다.”

다른 이가 봤다면 지독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반호진의 생각은 달랐다.

만약 그가 광살노옹보다 약했다면 이보다 더한 일을 겪었을 게 분명했다.

그것도 그 하나에서 그치지 않고 식솔들 전부가 죽었을 터였다.

때문에 반호진은 미련 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광살노옹을 놔두고 몸을 돌렸다.

크그긍.

어깨를 찌르면서 아혈도 같이 점혈했기에 통로에서 광살노옹의 신음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반호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옆방의 철문을 열었다.

“히익!”

횃불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석실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녹림팔노와 달리 비교적 멀쩡한 모습으로 벽에 기대서 앉아 있는 일노가 보였다.

그런데 반응이 광살노옹과는 완전히 달랐다.

반호진이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자 대경실색했다.

“확실히 사지가 붙어 있어서 그런가. 겉보기에는 멀쩡하네.”

두 다리가 찢겨 나간 다른 이들과 달리 일노의 다리는 멀쩡히 몸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기에만 그랬다.

실제로는 전신의 뼈가 으스러져 혼자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는 상태였다.

거기에 마혈까지 점혈당해 꼼짝도 못 했다.

“사, 살려 다오. 나는 노옹이 시킨 대로 한 것밖에 없다!”

“없다?”

“없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체면도 잊은 채 일노가 목숨을 구걸했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일노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이나 어린 반호진에게 빌었다.

“살고 싶다라.”

“이렇게 살려 둔 건 제게 원하는 게 있어서이지 않습니까?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지나치게 협조적이라 오히려 의심이 드는데.”

반호진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일노를 응시했다.

너무 협조적으로 나오니 되레 의심이 들어서였다.

묻고 싶은 건 많지만 그게 신뢰할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였기에 반호진은 일노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을 휘저었다.

“컥! 왜……?!”

“생각해 보니까 굳이 너희들한테서 정보를 얻을 필요가 없더라고. 광살노옹을 압박할 용도로도 쓸 수 없고. 그러니 정리할 수밖에.”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일노가 굳어졌다.

두 눈을 훤히 뜬 채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남은 녹림팔노도 마찬가지였다.

***

탕탕탕탕.

처소 겸 집무실 겸 응접실로 사용하는 방 안으로 별의별 소음이 다 들려왔다.

바로 장원을 복구하는 소리였다.

고용한 인부들의 숫자가 상당한지 창문 밖에서 온갖 소리들이 다 들어왔다.

“얼마나 쏟아부은 거야.”

싸우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고함을 질렀는데 신기한 건 진짜 싸우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었다.

똑똑똑.

“형님. 저 조운입니다.”

“들어와.”

29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