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96화 (296/468)

제 97장. 이중흉계(二重凶計). -02

백휘경의 어깨를 붙잡고서 손을 천천히 오므리던 수하가 갑자기 돌이 된 것처럼 굳어 버리자 복면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명령을 이행하지 않자 짜증이 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살벌한 시선에도 수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얼굴 중 유일하게 드러난 눈가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은 상태에 백휘성을 붙잡고 있던 복면인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었다.

“초월경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경지가 아니란다, 버러지들아.”

퍼석!

고요한 장내에 반호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백휘경을 붙잡고 있던 복면인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정말 뜬금없이 혼자 폭발하며 쓰러졌던 것이다.

그 광경에 남은 두 명의 복면인들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서걱.

하지만 놀랄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당한 눈으로 죽은 동료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 두 명의 양팔이 떨어졌다.

예리한 소성과 함께 잘렸던 것이다.

얼마나 깔끔하게 베어졌는지 팔이 잘려 나간 절단면에서는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끄으윽!”

“크흡!”

대신 억눌린 신음 소리만이 두 명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극한의 훈련을 받은 이들임에도 지금과 같은 고통은 익숙하지 않은지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그중 한 명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가장 상급자였던 복면인이 제일 먼저 상황을 인식하고는 모용척을 확보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었다.

후우우웅!

그러나 그보다 반호진이 한발 빨랐다.

복면인이 움직이기 전에 이미 모용척과 백휘경, 백휘성을 무형지기로 끌어왔다.

“으흑!”

“감사합니다, 문주님!”

심지어 세 사람을 데려오면서 반호진은 점혈도 풀어 주었다.

정체불명의 복면인들이 고유의 방식으로 점혈해서 다른 사람이 쉽게 해혈할 수 없게 조치했으나 반호진에게는 무의미했다.

아무리 특이하고 교묘한 수법을 사용해도 반호진 정도쯤 되면 그냥 보면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사과할 거 없어. 누구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이니까.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 보겠어?”

“…….”

모용척이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반호진의 말도 맞았다.

지금과 같은 경험은 정말 흔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모용척은 자괴감이 들었다.

“기죽지 말고. 오늘의 일을 양분 삼아 더 강해지면 돼. 아직 끝나지 않기도 했고.”

“예?”

파아앗!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근처 시체 더미에서 두 개의 인영이 솟구쳤다.

그러더니 서조운과 선우방을 향해 쇄도했다.

동귀어진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듯이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모용척은 물론이고 일행들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터엉.

그러나 두 명의 기습은 실패로 돌아갔다.

선우방과 서조운이 반응을 하기도 했지만 반호진이 일으킨 호신강기에 막혀 튕겨졌다.

휘이익!

그런데 그다음 행동이 놀라웠다.

실패하자마자 두 명의 암살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튕기는 반동까지 이용하는 영악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말이다.

스극.

하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도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앞서 당한 복면인들과 마찬가지도 두 명의 암살자들 역시 사지가 잘린 채로 허무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역시 더 있었네요.”

“목표는 나였을 거야.”

“형님께서 심리적으로 흔들렸을 때를 노렸을 거예요.”

“맞아.”

모두가 놀라서 얼이 나가 있을 때 유일하게 사마의성만이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그뿐만 아니라 광살노옹과 살수들의 관계를 의심했다.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살수들이 등장한 시기가 너무나 절묘해서였다.

마치 광살노옹의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타났기에 사마의성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팔꿈치와 무릎에서부터 잘려 나간 암살자들을 노려봤다.

쿵. 쿠쿠쿠쿵.

그사이 반호진은 완벽하게 제압한 살수들을 허공섭물로 끌어왔다.

겸사겸사 모용척과 쌍둥이 형제들이 놓친 녹림팔노도 같이 데려와 따로 내려놓았다.

“천사맹이냐?”

“…….”

반호진은 가장 상급자로 보이는 복면인 앞에 쪼그려 앉아서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할 뿐 복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역시 대답할 생각이 없나 보군.”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주르륵.

입에서 검은 피를 흘리며 살수가 입을 열었다.

조롱 가득한 비웃음을 머금으면서 말이다.

“그건 모르는 거지.”

“저승에서 기다리겠다.”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 후 살수는 두 눈을 부릅뜨고서 죽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반호진이 가장 상급자라고 짐작했던 이가 독단을 깨물자 다른 살수들도 일제히 뒤를 따랐다.

“처음부터 실토할 생각이 없었을 거예요. 그 어떤 것도 말하지 말라고 명령을 받았을 테고요.”

“나도 알아. 애초에 기대도 안 했고. 그냥 찔러본 거야. 어떤 반응이 나오나. 일단 저 늙은이들은 뇌옥에 가둬 놔. 물어볼 게 많으니까.”

“네.”

“그나저나 웃기네. 다른 건물들은 죄다 무너졌는데 뇌옥이 멀쩡한 게.”

사마의성도 그게 신기하다는 듯이 반호진을 따라 실소를 흘렸다.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해서였다.

그리고 한숨도 나왔다.

대부분의 건물이 박살 났기에 다시 지을 걸 생각하자 막막했던 것이다.

“자자. 이제 정리 시작하자. 부지런히 하면 정오 전에는 끝낼 수 있을 거야. 유화랑 휘경이, 휘성이는 부모님 모셔다드리고.”

“저희도 금방 돌아올게요!”

“그래그래.”

언제 겁먹었냐는 듯이 다시 활발해진 쌍둥이 형제의 모습에 반호진은 피식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새로 지은 장원이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지만 반호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람이 죽지 않았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해서였다.

살아만 있으면 어떤 일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었기에 반호진은 일행들을 다독이며 손수 시체를 옮겼다.

***

또르륵.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반호진이 차를 따랐다.

그러자 그윽한 차향이 실내를 서서히 채우기 시작했다.

똑똑똑.

“문주님. 매향이옵니다.”

“들어와.”

“네.”

차향을 음미하던 반호진이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황매향의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이윽고 처소의 문이 열리며 황매향과 여인들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응접실이 아니다 보니 의자가 부족하네. 피곤하면 바닥에라도 앉을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들 피곤할 텐데 불러내서 미안해. 근데 지금 꼭 물어볼 게 있어서 말이야.”

황매향과 함께 방 안에 들어온 여인들이 눈을 껌뻑였다.

자신들에게 꼭 물어볼 게 있다고 하자 다들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저희에게요?”

“응. 오늘 일 많이 놀랐지?”

반호진은 황매향을 시작으로 여인들과 차례대로 눈을 마주했다.

거의 매일 같이 보는 사이지만 이렇게 직접 눈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일은 드물었기에 다들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놀라긴 했는데, 믿었어요. 문주님께서 지켜 주실 거라고요.”

“저도요. 실제로 문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도 했고요.”

“그렇게 생각해 준다니 고맙네. 근데 솔직히 말해서 너희들이 오늘처럼 굳이 위험을 감내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원한다면 떠나도 괜찮다는 말을 해 주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만들었어.”

여인들의 두 눈이 서서히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다들 놀란 것이었다.

“떠나라고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떠나고 싶으면 떠나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거야. 나한테 말을 꺼내기가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가장 맏언니인 황매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반호진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결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고 말이다.

“저는 단 한 번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요.”

“저도요. 물론 문주님께서 나가라고 하시면 나갈 수밖에 없지만요.”

“저, 저도 언니들이랑 생각이 같아요. 단 한 번도 떠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는걸요.”

“문주님께 가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각오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지옥은 이미 한 번 겪어 보기도 했고요.”

이번에는 반호진의 동공이 커졌다.

보은하고 싶다는 말을 직접적으로 듣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라서였다.

의리나 충성심을 넘어 순수하게 믿고 의지하는 모습에 반호진은 가슴이 순간 울컥했다.

“문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희는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함께하고 싶어요. 그러려고 문주님께 온 것이고요.”

마지막으로 황매향이 단단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모든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말이다.

“너희들 생각은 잘 알았어. 그리고 고마워. 이렇게 생각해 줘서. 그러니 너희들 결혼은 내가 책임질게.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시집갈 수 있도록.”

“시, 시집요?”

“어머.”

여인들은 물론이고 아직 소녀라는 말이 어울리는 아이들도 얼굴을 붉혔다.

시집이라는 두 글자에 설렘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황매향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가장 서둘러야 하는 처지가 황매향이었기에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당연히 시집가야지. 혼자서 느낄 수 있는 행복도 있지만 함께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도 있으니까.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질 자격이 있고. 더구나 너희들은 내 식구들이잖아. 그러니 내가 책임져야지. 아니면 직접 데리고 와도 좋고.”

따뜻한 반호진의 말에 여자들의 얼굴이 전부 다 빨개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 하나 고개를 들기는커녕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어라? 이미 다들 상대가 있는 건가?”

점점 숙여지는 고개에 반호진이 살짝 놀랐다.

반응이 어째 다들 짝이 있는 것 같아서였다.

“다 그런 건 아니에요!”

“허어. 다가 아니라는 말은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렷다?”

“헙!”

찔러보는 말에 무심코 대답했던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뭐 어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좋은 사람이 있으면 만나 보고 그러는 거지. 대신 아니다 싶으면 얼른 헤어져. 시간 낭비하지 말고. 더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네에.”

이제 겨우 스물두 살이 하는 말이지만 이상하게 신뢰가 가는 느낌에 여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대답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반호진을 걱정했다.

자신들만큼이나 젊은 반호진이 정작 여자를 만나지 않아서였다.

그렇다고 주변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좀처럼 교제를 하지 않자 다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반호진을 바라봤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난 알아서 잘할 테니까. 내가 능력이 없는 건 아니잖아?”

“그렇죠.”

“때가 되면 만날 테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푹 쉬어. 다들 힘들었을 텐데.”

“네.”

반호진의 축객령에 황매향이 대표로 대답하고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사마의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얘기가 잘 풀린 모양이네요?”

“응. 의외로 날 많이 의지하더라고.”

“그럴 수밖에 없죠. 어찌 보면 조운이랑 같은 경우니까요.”

“그런가. 그보다 분위기는 어때?”

“형님이 예상하신 대로 아홉 명 전부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어요.”

사마의성의 대답에 반호진이 탁자를 두드렸다.

이미 반응을 확인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사마의성에게 부탁했었다.

뇌옥으로 가는 동안에 아홉 명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지켜봐 달라고 말이다.

“네가 생각하기에는 어디일 거 같아?”

“형님께서 짐작하신 대로 천사맹이 가장 유력하죠. 천사맹이 아니라면 하오문 이상 가는 정보력을 지닌 새로운 세력이라는 뜻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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