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95화 (295/468)

제 97장. 이중흉계(二重凶計). -01

반호진이 다가오자 넋을 놓고 있던 예유화의 양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마주 잡고 있는 두 손이 피가 안 통해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다, 다 끝난 건가요?”

“예. 다 끝났습니다. 많이 힘드셨죠?”

“아아.”

예유화의 모친이 긴 날숨을 쉬었다.

다 끝났다는 반호진의 말에 바짝 조여졌던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예유화의 부친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이 턱 밑까지 다가온 것만 같았던 시간이 끝났다고 하자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보다는 문주님께서 고생하셨지요. 저희는 한 것도 없는데요.”

“같이 있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제 지시에 잘 따라 주시기도 했고요. 사실 난리 통에 그러기가 쉽지 않거든요. 두 분과 쌍둥이 어머님 덕분에 기습 공격을 잘 막아 낼 수 있었습니다.”

반호진의 시선이 백휘경, 백휘성 형제의 모친에게로 향했다.

혼자이기에 더더욱 두렵고 무서웠을 게 분명했기에 반호진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고서 진기를 흘려보냈다.

쌍둥이 형제의 모친이 긴장을 풀 수 있게 도와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반호진의 진기 덕분인지 쌍둥이 형제의 모친이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흔들리는 눈으로 자식들을 찾았다.

전투가 끝났다고 하나 주변에 시체들이 가득했기에 자연스레 걱정이 되어서였다.

“야, 그쪽은 상태 어때?”

“피를 좀 흘린 것 같기는 한데 당장 죽을 것 같지는 않아.”

“문주님께서 점혈과 동시에 지혈을 해 놓은 거 같아.”

“으으으!”

두 다리가 짓이겨져 있었음에도 쌍둥이 형제는 거칠게 녹림팔노를 한곳에 모았다.

상처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짐짝 다루듯이 던졌던 것이다.

그로 인해 녹림팔노가 하나같이 억눌린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거친 모래와 축축한 흙이 상처 부위에 닿자 엄청난 고통이 엄습해 와서였다.

“아이들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후우.”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 어머님.”

평소와 다름없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녹림팔노를 어깨에 짊어지고 오는 아들들의 모습에 중년여인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예유화도 다가와서 손을 잡아 주었다.

시기적절하게 반호진을 대신해 손을 잡고서는 다독여 주었던 것이다.

스슥!

그런데 그때 시체가 들썩이더니 세 개의 인영이 솟구쳤다.

모두가 안심한 순간을 노리고 또 다른 습격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모두 멈춰라!”

“여길 봐라, 반호진!”

부지불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벼락같이 세 사람을 낚아챘다.

녹림팔노를 짊어지고서 돌아오던 모용척과 백휘경, 백휘성의 뒷목을 붙잡고는 단검을 들이밀었다.

“으음!”

“윽! 뭐, 뭐야?!”

창졸간에 일어난 기습에 세 사람은 아무것도 못 한 채 사로잡혔다.

기습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단검에 마비독을 발라 놓았는지 몸이 빠르게 경직되었다.

“이 새끼들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야. 목에 구멍에 나는 걸 원치 않는다면.”

꾸욱!

쌍둥이 형제와 달리 백독환을 먹어 독에 내성이 있는 모용척이 시뻘게진 얼굴로 움직이려 하자 복면인이 단검을 움직이며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조금이라도 더 움직인다면 목을 찌르겠다고 말이다.

그게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는 듯이 복면인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단검을 점점 눌렀다.

“내가 죽으면 네놈도 죽어.”

“비룡과 동귀어진이라면 나쁘지 않지. 인질이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형님이 목표구만?”

“당연한 거 아닌가?”

모용척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어마어마한 분노가 치솟았다.

반호진을 도우기는커녕 발목만 붙잡은 꼴이 되어서였다.

특히 한낱 살수에게 사로잡혔다는 게 모용척은 자존심이 상했다.

부르르!

“마지막 경고다. 허튼짓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인질은 너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분노로 몸을 떠는 모용척의 목에 다시 한번 단검을 찌르며 복면인이 말했다.

친히 고개를 돌려 그와 똑같은 꼴을 하고 있는 백휘경과 백휘성을 보여 주면서 말이다.

까드드득!

자신과 마찬가지로 목을 찌르는 단검으로 인해 새빨간 피가 흘러나오는 쌍둥이 형제의 모습에 모용척은 어금니가 부러져라 악물었다.

반호진도 반호진이지만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두 형제가 사로잡히자 모용척은 자책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서 왔느냐.”

“지시는 우리가 한다. 넌 우리의 지시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입을 앙다문 모용척의 마혈을 짚고서 복면인이 고개를 돌렸다.

반호진의 목소리에 시선을 옮긴 것이었다.

“보아하니 광살노옹과 아는 사이는 아닌 듯싶은데.”

“말했을 텐데. 너에게 질문할 권리는 없다고. 아니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건가?”

꾸욱.

모용척과 쌍둥이 형제가 사로잡혔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자신과 광살노옹을 번갈아 쳐다보는 반호진의 모습에 복면인이 미간을 좁히며 단검을 눌렀다.

여유로울 상황이 아닌데도 여유를 부리는 게 거슬려서였다.

그러자 모용척은 물론이고 백휘경, 백휘성 형제의 목을 적시는 피의 양이 많아졌다.

“휘경아! 휘성아!”

그 모습에 두 형제의 모친이 절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아들들의 모습에 그녀는 피를 토하듯이 자식들을 불렀다.

반면에 세 사람을 붙잡고 있는 복면인들의 눈매는 호선을 그렸다.

상대 쪽 진영이 흔들릴수록 그들은 유리해져서였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면 이 셋은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거다.”

“헛소리를 참 그럴듯하게 지껄이네. 멀쩡히 돌려보낼 생각이 전혀 없으면서.”

“그럴지도 모르지. 근데 다른 선택지가 있나?”

“으흑!”

백휘성이 신음 소리를 냈다.

점점 더 깊게 파고드는 차가운 칼날에 자기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이었다.

나름 대담한 척하고 있지만 백휘성은 이제 겨우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휘성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상을 지었다.

“있지. 세 아이를 무사히 이쪽으로 보내면 나 역시 너희들을 쫓지 않겠다.”

“그걸 믿으라는 건가?”

“거봐. 너희들도 믿지 못하면서 나보고 뭘 믿으라는 거지?”

반호진이 헛웃음을 흘렸다.

예상했던 대로 대화가 평행선을 그려서였다.

그러면서 반호진은 광살노옹의 표정을 슬쩍 살펴봤는데 복면인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모양인지 지금의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군이라면 조금이라도 기대하는 기색을 띠었을 텐데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녹림팔노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세 사람이 붙잡히면서 녹림팔노는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는데 누구 하나 복면인의 등장에 반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아는 사이가 아니라는 건데 또 완전히 다른 소속이라고 하기에는 나타난 시기가 너무 절묘했다.

딱 이 순간을 노렸다는 듯이 등장했기에 반호진은 미심쩍은 표정을 감추지 않고서 복면인들을 쳐다봤다.

“우리를 믿든지 말든지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네가 우리의 지시를 따라야만 한다는 거지. 이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어디 소속이지?”

“좀 전에도 말했지만 너에게 질문할 권리는 없다.”

복면인이 매서운 눈빛으로 반호진을 쏘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다시 한번 반호진의 처지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해서였다.

더해서 대화의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특급살수가 인질극이라. 뭐, 좋아. 일단 요구 사항을 들어는 주지.”

더 이상 자신들을 자극하지 말라는 듯이 노려보는 세 쌍의 시선을 마주하며 반호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런데 그게 복면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조마조마한 모습을 보여도 모자랄 판에 여유가 가득하자 눈에 거슬렸던 것이다.

“지금 당장 오른팔을 잘라라. 그러면 이 꼬마아이를 돌려보내 주겠다.”

“싫다면?”

“너 대신 이 아이의 양쪽 팔이 잘리겠지.”

털썩!

반호진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백휘성의 모친이 허물어지는 소리였다.

“나는 왼팔이다. 절대고수이니 오른팔이 없어도 무형지기로 스스로의 팔은 자를 수 있겠지?”

반호진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이 백휘경을 붙잡고 있는 복면인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용척을 붙잡은 복면인이 얄미운 눈매로 말을 이었다.

“모용척을 구하고 싶으면 네 단전을 폐해라.”

“형님! 절대 그러시면 안 됩……! 읍!”

단전을 망가뜨리라는 말에 모용척이 소리쳤다.

무인에게 단전을 전폐하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과도 동일해서였다.

가뜩이나 일개 살수에게 사로잡힌 것도 한심한데 자신으로 인해 반호진이 협박을 당하자 더는 듣기 싫다는 듯이 모용척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보기 드문 끈끈한 의리야. 다만 좀 의외인데. 자기밖에 모른다고 알려진 모용척이 이런 말을 할 줄이야. 자기 목숨보다 네 무공이 더 소중하다는 뜻이겠지?”

복면인이 모용척의 아혈을 짚으며 비릿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스스로를 희생하려는 동생을 못 본 척할 거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너희들이라도 빌어. 제발 살려 달라고.”

“모용척이 죽어야 반호진에게 빌려나? 이거 본보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럼 일단 팔부터 잘라 낼까. 팔 하나가 없다고 목숨에 지장이 가는 건 아니니까.”

덜덜덜!

섬뜩하기 짝이 없는 복면인들의 대화에 백휘경, 백휘성 형제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무인이 될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두 형제는 이제 겨우 열세 살이었다.

피가 튀기고 시체가 쌓이는 전투를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두 아이는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툭.

굳은살로 가득한 복면인의 손이 어깨에 닿자 백휘경이 움찔거렸다.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한 것이었다.

동시에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어깨에 손을 댄 것뿐이지만 그 의도는 명백했기에 백휘경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멈춰.”

“말했을 텐데. 명령은 우리만 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검신이라고 추켜세워 줘서 그런가. 말귀를 영 못 알아듣네. 진짜 팔이라도 하나 뜯어내야 하나.”

“그 전에 네가 죽을걸.”

“크큭! 이봐. 초월경의 경지는 대단하지. 근데 절대고수라고 해서 전지전능한 건 아니야. 신이 아니라고. 네가 무형지기를 움직이는 것보다 내 손이 더 빨라. 이건 내 목숨을 걸고 장담할 수 있어.”

백휘경의 어깨에 손을 올린 복면인이 스산한 눈빛을 뿌리며 말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백휘경의 목을 부러뜨릴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 말에 쌍둥이 형제의 모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눈에는 장남이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서였다.

꾸욱!

하지만 그녀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아들이 귀하지만 반호진의 목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두 손을 맞잡고서 천지신명께 비는 것밖에 없었다.

“됐다. 그냥 잘라 버려. 아이의 팔이 떨어져 나가야 대화가 이어질 것 같은데.”

모용척을 사로잡은 이가 가장 상급자인 모양인지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백휘경을 붙잡고 있던 복면인이 복면 너머로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일부러 반호진에게 보여 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한데 그 순간 복면인이 움찔거렸다.

“뭐야? 왜 멈춰?”

297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