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장. 광살노옹(狂殺老翁). -02
광살노옹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한 수가 너무나 허망하게 파훼되어서였다.
“어떻게?”
“고수에게 하수의 수법은 훤히 보이기 마련이지. 그리고 너무 뻔하잖아? 처음부터 인질을 노렸는데 대비를 안 하는 게 병신이지 않을까?”
“이노옴!”
대놓고 자신에게 병신이라 말하는 반호진의 발언에 광살노옹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지금이야 나이 때문에 조금 점잖아졌지만 원래 그의 성격은 흉포하다 못해 광포했다.
괜히 별호에 미칠 광(狂)자가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더욱이 반호진은 제자를 죽인 원수였기에 광살노옹은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던 한줄기 이성을 놓아 버렸다.
웅웅웅웅!
흉악한 표정만큼이나 광살노옹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 역시 달라졌다.
원래도 살기와 광기로 뒤범벅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수준이 달랐다.
마치 같이 죽자는 듯이 광살노옹은 자신의 모든 걸 끌어올렸다.
“호오.”
“네놈만은! 네놈만은 반드시 죽이리라!”
무시무시한 기운을 흩뿌리는데도 전혀 긴장하지 않는 모습에 광살노옹의 두 눈이 벌게졌다.
끝까지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였다.
쑤아아앙!
살기와 광기에 이어 분노까지 섞은 광살노옹이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방어 따위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겠다는 듯이 광살노옹은 저돌적으로 짓쳐 들었다.
당장 양손으로 잡아 반으로 찢어 죽이겠다는 기세로 말이다.
“진즉에 이렇게 나왔어야지.”
“사지를 뜯은 다음에 네놈이 아끼는 이들을 한 명 한 명 죽여 주마!”
“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살기 가득한 광살노옹의 포효가 사방을 짓눌렀지만 반호진은 여유로웠다.
분명 가공할 살기지만 그뿐이었다.
그를 억압할 정도는 절대 되지 않았다.
“크아앙!”
어깨를 으쓱거리는 반호진의 행동에 광살노옹이 짐승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아니, 이미 짐승이었다.
이성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눈빛과 표정으로 광살노옹의 양손이 반호진의 양쪽 어깨를 노렸다.
공언한 대로 반호진의 두 팔을 잡아 뜯으려는 것이었다.
탁!
그리고 그 목표는 딱 절반만 성공했다.
반호진의 양쪽 어깨를 잡기는 했으나 뜯어내지는 못했다.
움켜쥔 어깨가 꿈쩍도 하지 않는 모습에 광살노옹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부르르르!
그러나 아무리 두 손아귀에 힘을 줘도, 진기를 더욱더 집중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뭉개지기는커녕 찌그러지지도 않는 모습에 광살노옹의 광기 어린 두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생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선천진기까지 사용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자 믿기지가 않은 것이었다.
“으아아아!”
하지만 생각은 짧았다.
고민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광살노옹은 거칠게 울부짖으며 민머리를 찧었다.
두 손이 안 통한다면 박치기를 해서라도 목을 부러뜨릴 생각이었다.
쩌어어엉!
하지만 눈에 훤히 보이는 수법에 당해 줄 반호진이 아니었다.
애초에 처음 공격이 실패했을 때부터 광살노옹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한정적이었다.
그래서 반호진은 어렵지 않게 광살노옹의 박치기를 호신강기로 막아 내고는 그대로 왼손을 들어 올렸다.
붙어 있는 상태였기에 검 대신 손을 택한 것이었다.
뻐어억!
그런데 똑같은 공격이었는데 결과는 천양지차였다.
전혀 통하지 않은 광살노옹과 달리 반호진의 손바닥은 정확히 턱을 가격해서는 날려 버렸다.
“커헉!”
물론 광살노옹이 순순히 당해 준 건 아니었다.
반호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호신강기를 극성으로 일으켰다.
다만 문제는 반호진의 일격에 실린 힘이 그의 호신강기를 깨부술 정도로 강력했다는 것이었다.
쿠웅!
저돌적인 기세에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무력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광살노옹이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입에서는 피분수를 흘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광살노옹은 고통보다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멍해졌다.
분명 반호진이 자신보다 윗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무림에서 검신이라 불리지 못했을 테니까.
또한 천하십대고수들이 인정하지도 않았을 테고.
하나 격차는 그리 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제대로 붙어 보니 그는 알 수 있었다.
‘……나보다 더 강하다.’
이번 격돌로 광살노옹은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미세한 차이가 아니라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말이다.
심지어 그는 목숨까지 걸고 선천진기를 사용했다.
그런데도 결과는 그의 완패였다.
“눈빛이 풀린 걸 보니 이제야 좀 느낀 모양이야? 근데 어쩌지? 난 봐줄 용의가 전혀 없는데.”
“나 역시 네놈을 죽이기 전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잠시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깐일 뿐이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제자의 복수였기에 광살노옹은 피로 흥건한 입가를 소매로 거칠게 닦은 후 다시 반호진에게 달려들었다.
쉬이익!
“뒈져랏!”
방어를 도외시하고서 광살노옹이 모든 걸 쏟아부었다.
경지는 반호진이 높았지만 그렇다고 싸움에 절대적인 건 없었다.
하수가 고수를 잡는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있기도 하기에 광살노옹은 자신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반호진은 지켜야 하는 이들이 있기에 상황은 그에게 유리했다.
꽈앙! 꽝! 꽈과과광!
그 이점을 광살노옹은 십분 활용했다.
회피가 여의치 않은 점을 이용해 파상공세를 펼친 것이었다.
어차피 죽음이 정해져 있었기에 광살노옹은 전력을 모두 쏟아붓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내상을 걱정해서 힘 조절을 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네놈만은 반드시, 반드시 죽인 후에 저승에 갈 것이니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입가에 흐른 피 때문에 더더욱 악귀처럼 보이는 얼굴로 광살노옹이 쌍권을 연달아 내질렀다.
이대로 곤죽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기세였다.
그러면서도 광살노옹은 무형강기도 계속해서 쏘아 보냈다.
반호진이 아니라 너머에 있는 일행들에게 말이다.
‘네놈도 똑같이 소중한 걸 잃어 봐야지!’
핏발이 서다 못해 혈안으로 변한 광살노옹이 속으로 울부짖었다.
원래의 계획은 인질을 사로잡아서 반호진을 무릎 꿇린 후 무공을 전폐한 뒤에 지인들을 하나씩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호진의 사지를 찢은 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는데 녹림팔노가 되레 제압당하면서 모든 게 어그러졌다.
그로 인한 결과가 지금이었고.
하지만 광살노옹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건 만큼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낼 생각이었다.
“늙은이가 참 욕심이 많아. 이 모든 사태가 다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모르고. 하긴, 그걸 알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푹.
미치광이처럼 권강과 강환을 퍼붓던 광살노옹이 갑자기 멈췄다.
주먹을 내지르던 자세 그대로 석상처럼 굳어졌던 것이다.
심지어 은밀하게 운용하던 무형강기도 흩어졌다.
스윽.
광살노옹은 그 상태로 고개를 숙였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감촉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움직인 것이었다.
그러자 찬란하다 못해 성스럽게 빛나는 한 자루의 금광검(金光劍)이 눈에 들어왔다.
“이, 이건……!”
단검 정도의 크기지만 금광검을 본 광살노옹의 두 눈은 더 이상 커지기 힘들 정도로 커졌다.
이 금광검이 무엇인지 그는 한눈에 알아봐서였다.
그래서인지 악귀처럼 일그러졌던 광살노옹의 얼굴이 한순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더불어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져 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놀아 주는 건 여기까지야, 늙은이. 그러니 이제부터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 보자고. 물론 묻는 건 나고 늙은이에게 허락된 건 대답하는 것밖에 없어.”
“크흐흐흐. 본좌가 순순히 대답해 줄 것 같으냐? 본좌에게서 알아내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인데, 그게 무엇이든 네놈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거다!”
광살노옹이 이죽거렸다.
비록 패배했지만 마지막 가는 길에 반호진의 속을 뒤집어 놓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광살노옹의 이죽거림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대신 한마디를 했다.
“죽음을 막을 수는 없지만, 늦출 수는 있지.”
“어?”
미친 듯이 웃어젖히던 광살노옹이 두 눈을 부릅떴다.
전신모공을 통해 새어 나가던 선천진기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어서였다.
한 번 사용하면 절대 멈출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게 선천진기인데 그걸 가능케 하자 광살노옹은 믿을 수가 없었다.
“완벽한 건 아냐. 이틀 정도지만 그 정도면 원하는 걸 얻기에는 충분하지.”
“마, 말도 안 돼!”
반호진의 말대로였다.
제자리로 돌아가기는 하나 완벽하지는 않았다.
선천진기가 다시 미세하게 새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자신의 뜻대로 죽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툭. 툭. 투둑.
경악한 광살노옹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반호진은 손을 움직였다.
비록 말석이지만 한때 천하십대고수의 자리를 차지했던 무인이 광살노옹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확실하게 마혈과 아혈을 짚었다.
“아, 이 말을 깜빡했네. 네 사손도 가만 놔두지는 않을 거야. 은원은 돌고 도는 법이잖아? 당신이 날 노렸으니 나도 사손을 찾아가야지. 안 그래?”
“읍! 으읍! 읍읍읍!”
사손이라는 두 글자에 광살노옹의 눈빛이 달라졌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악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호진은 아혈을 풀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다행스럽게도 당신 대신 말해 줄 입이 여덟 개나 더 있거든. 거기다 충성심도 없지. 어쩌면 당신의 사손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모르고.”
부르르르!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광살노옹의 눈에 절망이 서렸다.
동시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고생하셨습니다, 형님!”
“휘유. 이거 다 언제 치우냐.”
반호진의 곁으로 서조운과 선우방이 다가왔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시체들의 모습에 둘 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녹림팔노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저도요!”
살아 있는 건 광살노옹만이 아니었다.
먼저 제압당한 녹림팔노도 아직 숨을 쉬고 있었기에 모용척과 백휘경, 백휘성이 입을 열었다.
코앞에 있는 광살노옹과 달리 녹림팔노는 도망치던 중에 두 다리가 날아갔기에 거리가 제법 있었다.
그래서 세 사람은 반호진이 번거롭지 않도록 알아서 나섰다.
“부탁해.”
“예!”
“저희에게 맡겨 주세요!”
보조하는 역할만 했기에 안 그래도 무언가를 하고 싶었던 쌍둥이 형제가 반호진의 부탁에 얼굴이 밝아졌다.
주위에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음에도 두 형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흔이 워낙에 깔끔하다 보니 시체이긴 해도 지저분한 느낌은 들지 않아서였다.
앞으로 무인으로 살아갈 것이기에 미리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신들을 치우고 있을게.”
“나도 곧 합류할게.”
“넌 천천히 합류해도 돼. 그럴 만한 자격이 있어.”
“한 손이라도 더 거들어야 빨리 끝나지.”
마다하는 선우방에게로 사마의성과 사마세가의 가솔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는 듯이 이미 소매를 잔뜩 걷은 채였다.
“일문의 수장은 안 해도 돼.”
“먼저 하고 있어.”
선우방을 향해 손을 휘휘 저은 반호진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에게 다가갔다.
“무, 문주님?”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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