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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림-293화 (293/468)

제 96장. 광살노옹(狂殺老翁). -01

반호진이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흉흉한 기세로 달려드는 녹림팔노와 달리 반호진의 표정은 늘 그렇듯이 무덤덤했다.

특유의 여유도 가득했고.

한데 느리게 올라간 손에 선두에서 달려들던 녹림팔노 중 일노(一老)의 목이 붙잡혔다.

“헉!”

마치 스스로 목을 붙잡으라 내놓은 것 같은 상황에 일노가 경호성을 터트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였다.

자신은 그저 반호진을 공격하기 위해 쇄도한 것뿐인데 눈 깜짝할 사이에 목이 붙잡히자 일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후우웅!

하지만 놀란 것과 달리 반응은 기민했다.

쌍장에 막대한 기운이 순식간에 응집되며 반호진의 가슴을 후려쳤던 것이다.

터어어엉!

목을 붙잡혔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일노 역시 반호진과 가깝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거력이 담긴 쌍장이 전광석화처럼 흉부에 작렬했다.

“끄윽!”

그런데 신음은 반호진이 아닌 일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공격을 당한 건 반호진인데 말이다.

콰아앙!

그러나 일노의 수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호신강기로 일노의 쌍장을 받아 낸 반호진은 목을 붙잡은 채로 그대로 땅에 메다꽂았다.

단순무식하게 그냥 지면에 박아 버렸던 것이다.

“이놈!”

“가만 놔두지 않겠다!”

등에서부터 떨어진 일노가 입에서 시뻘건 피를 토하며 벌레처럼 몸을 떨자 녹림팔노의 눈이 돌아갔다.

일노의 처참한 몰골에 대노한 것이었다.

동시에 수백, 수천 개의 강기들이 반호진에게 쏟아졌다.

오직 그만을 노리고서 일곱 명이 파상공세를 펼친 것이다.

웅웅웅웅!

하지만 허공을 빼곡하게 채운 수많은 강기에도 반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심지어 호신강기도 일으키지 않았다.

그저 의지만 일으켰다.

한데 그로 인해 벌어진 일은 놀라웠다.

뻐어어엉!

반호진의 주변에서 생성된 일곱 개의 강환들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꿰뚫어 버렸다.

혼신의 힘을 다한 녹림팔노의 맹공을 순수하게 힘으로 찢어 버렸던 것이다.

“이, 이런!”

“제기랄!”

그 모습에 녹림팔노가 대경실색했다.

눈부신 금광을 흩뿌리며 무자비하게 쇄도하는 강환을 보고 겁에 질린 것이었다.

파바바밧!

전심전력을 다한 공격이 너무나 쉽게 파훼당하자 녹림팔노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단 일수였으나 반호진의 무시무시한 무위를 느끼기에는 충분했기에 도주를 택한 것이었다.

물론 머릿속에는 여전히 광살노옹의 지시가 남아 있었으나 결국 중요한 건 자신의 목숨이었다.

충성심도 좋지만 목숨을 바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반호진의 무공을 보니 광살노옹이 살아남을 것 같지는 않았다.

광살노옹이 전대 천하십대고수 중 한 명이라고 하나 말석이었고 전성기도 한참 전에 지난 상태였다.

반면에 반호진은 당대의 천하십대고수들 중 누구와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기에 결정은 쉬웠다.

“오는 건 마음대로지만 가는 건 아니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하던 녹림팔노들이 이를 악물었다.

반호진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였다.

그래서 더더욱 거리를 벌리기 위해 경신술을 극성으로 펼쳤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의 경신술보다 반호진이 뿌린 강환이 더 빨랐다.

뻐어어엉! 뻐엉!

전력질주하던 녹림팔노의 다리들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반호진이 일부러 다리만 노린 것이었다.

“으아아악!”

“끄윽! 내, 내 다리……!”

한순간에 두 다리를 잃은 녹림팔노들이 울부짖었다.

꼴사납게 바닥을 나뒹굴며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몇몇 이들은 엉금엉금 기었다.

고통으로 인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음에도 도주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쓸데없이 끈질기네.”

푸푸푸푹!

하나 그 발악도 얼마 가지 못했다.

반호진이 지풍으로 마혈을 점혈해서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예 도주를 원천봉쇄하겠다는 듯이 지강(指罡)으로 단전을 파괴했다.

“끄으으으!”

“으흐흑!”

단전이 파괴되는 선명한 느낌에 녹림팔노가 피눈물을 흘렸다.

평생을 쌓아 온 공력이 밑 빠진 독의 물처럼 몸에서 빠져나가자 엄청난 공허감이 엄습해서였다.

덜덜덜!

“사, 살려 다오.”

한편 반호진의 발밑에 깔려 있던 일노는 몸을 떨며 목숨을 구걸했다.

보이지는 않아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동생들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일노는 전신의 뼈가 부러졌음에도 어떻게든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걱정하지 마. 아직은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꿀꺽!

일노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아직은 죽이지 않겠다는 말이 당장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죽일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였다.

“근데 좀 더 살아남을 수 있느냐, 그러지 않느냐는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어.”

“…….”

이어지는 반호진의 말에 일노가 눈을 감았다.

눈빛을 보는 순간 그는 알 수 있어서였다.

결국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과는 같았다.

“감히!”

그때 멀리서 광살노옹의 노성이 들려왔다.

녹림팔노를 시간벌이용으로 던지고 일행들에게 달려들었던 그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노성에는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원래의 계획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초조해하는 것이었다.

꽈앙! 꽝! 꽈과과광!

“꺼져라!”

연달아 들리는 폭음과 함께 광살노옹이 대성일갈했다.

동시에 쌍장을 폭풍처럼 내질렀다.

그를 천하십대고수로 만들어 주었던 성명절기가 극성으로 펼쳐졌지만 안타깝게도 소천검을 잠시 밀어낼 뿐이었다.

산산조각 낼 기세로 거력을 내뿜었으나 소천검에는 작은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이제 당신 하나 남았군. 아, 수족 하나가 더 있기는 한데 전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지.”

휘이익!

광살노옹에게 다가가던 반호진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자 홀로 조용히 서 있던 흑의복면인이 몸을 날렸다.

세가 기울었음을 느끼고 도주를 택한 것이었다.

“저, 저놈이……!”

그런 흑의복면인의 모습에 광살노옹의 두 눈에서 살광이 번뜩였다.

하지만 아무리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걱정하지 마. 나도 순순히 보내 줄 마음은 없거든.”

“억!”

어느새 원래 있던 제자리로 돌아온 반호진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두둥실 떠 있던 소천검이 한줄기 빛살이 되어 도망치던 흑의복면인의 머리를 잘라 냈다.

쿠웅! 쿵.

머리와 몸이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소천검이 유유히 허공을 날아 반호진의 오른손에 착지했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

“네놈……!”

눈알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광살노옹이 두 눈을 부라렸다.

그뿐만 아니라 전신에서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얼마나 내공이 심후한지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유형화되어 아지랑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러나 광살노옹의 가공할 살기에도 반호진의 표정은 태연했다.

“아니면 준비한 게 더 있나? 있으면 꺼내 보고. 이왕 가는 거 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보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 마지막 가는 길, 아쉬움은 없어야지?”

“닥쳐라!”

온몸을 파르르 떨던 광살노옹이 달려들었다.

과거 광살녹왕(狂殺綠王)이라 불리던 시절에는 작지만 강인한 체구로 유명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근육은 사라졌고, 감각은 무뎌졌다.

하지만 그 대신 심후한 공력이 그의 전신을 가득 채웠고 지금은 사방을 휩쓸어 버릴 정도였다.

쑤아아앙!

인간의 몸으로 폭풍을 일으키며 쇄도하는 광살노옹의 모습에도 반호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짓에 수십, 수백 개의 강환이 솟구치며 쏘아져 왔는데도 말이다.

“시대가 바뀌었어, 늙은이.”

“뒈져라!”

조롱하는 듯한 반호진의 한마디에 광살노옹은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주먹을 쥐었다.

강환은 그저 견제일 뿐이라는 듯이 오랜만에 진신절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광살노옹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단순히 많은 강환으로는 반호진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말이다.

콰콰콰쾅!

그 사실을 증명하듯 광살노옹이 뿌린 수백 개의 강환들은 반호진이 일으킨 호신강기를 뚫지 못했다.

뒤에 있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반호진은 반구형의 호신강기가 아닌 벽 형태의 호신강기를 일으켰는데 얇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광살노옹의 강환들을 완벽히 막아 냈다.

“초월경의 경지라고 해서 다 같은 경지가 아니지.”

“이노옴!”

비아냥거리는 반호진을 향해 광살노옹이 일권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벽 앞에 도달해서는 그대로 때렸다.

터어어엉!

강환과는 비교도 안 되는 폭음과 함께 벽이 출렁거렸다.

그런데 제대로 일격을 날린 것과 달리 호신강기는 부서지지 않았다.

마치 물주머니를 때린 것처럼 출렁이기만 할 뿐 멀쩡했다.

그 모습에 광살노옹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저놈들이 계획대로만 해 주었어도!’

광살노옹의 얼굴이 악귀처럼 변했다.

만약 계획대로만 되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호신강기에 막혀 전전긍긍할 리가 없어서였다.

반대로 반호진이 전전긍긍하고 자신은 목줄을 쥔 채로 온갖 치욕을 주었어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빌어먹을!’

지금 이 순간의 분노까지 담아 광살노옹은 재차 반대쪽 주먹을 내질렀다.

계획이 어그러졌지만 그렇다고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실패는 생각지도 않았고,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목적을 이룰 작정이었다.

즉 반호진을 죽이기 전까지, 제자의 복수를 이루기 전까지 떠날 생각은 없었다.

‘한 명만, 한 명만 잡으면 되는데!’

살기와 광기로 번뜩이는 광살노옹의 시선이 반호진의 어깨 너머에 모여 있는 일행들에게로 향했다.

자기 사람을 아끼는 걸로 유명한 반호진답게 인질은 많이도 필요 없었다.

딱 한 명.

어중간한 애들 말고 의형제나 마찬가지인 셋 중에서 한 명만 사로잡으면 되었다.

‘이왕 인질로 잡을 거면 저놈이 좋은데…….’

노구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광살노옹이 한 명을 노려봤다.

셋 다 효용가치가 있지만 역시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저 녀석이었다.

한데 문제는 사로잡고 싶어도 그게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분하지만 반호진의 실력은 그보다 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새끼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건데.’

반호진과의 격차는 인정하지만 그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광살노옹은 눈을 빛냈다.

지금 위치에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이용하면 수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아니, 현재 그로서는 방법이 없어도 만들어야만 했다.

‘찰나의 시간만 만들면 된다!’

반호진보다 조금 부족하지만 그 역시 초월경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

그렇기에 광살노옹은 남은 진기를 폭사시켰다.

거기에 진각을 이용해 지면을 뒤흔들었다.

쿠아아앙! 콰앙!

폭사시킨 기세가 사납게 주변을 휩쓰는 와중에 땅이 뒤흔들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진동했던 것이다.

“어어어?!”

“조심해!”

사람이 일으킨 지진이었으나 진동은 상당했다.

괜히 탈인경이라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건지 광살노옹은 말도 안 되는 힘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가 진짜 노리는 건 따로 있었다.

우우웅.

폭풍과 지진이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사이 한줄기 암경(暗勁)이 반호진의 호신강기를 피해 멀리 돌아갔다.

지금까지는 자존심 때문에 정면승부를 했지만 그게 통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광살노옹은 자존심을 굽혔다.

자존심보다 복수가 먼저라고 생각해서였다.

성공만 한다면 결과적으로 자존심 역시 챙길 수 있기에 광살노옹은 은밀하게 암경을 조종했다.

이윽고 그의 의지를 담은 암경이 표적의 뒷목에 접근했다.

“실망이야. 그래도 전대 천하십대고수이자 무림십왕이 이런 저급한 짓을 할 줄이야.”

푸스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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