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92화 (292/468)

제 95장. 은원은 돌고 도는 법. -02

서조운의 전신에서 시뻘건 불꽃이 치솟았다.

암살자처럼 은밀하게 다가와 일격을 날리고 다시 숨은 적의 행동에 흥분한 게 아니라 식구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적들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서조운은 극양지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장기전에 대비해 진기의 사용을 최소화하는 게 맞았지만 서조운도 아무 생각 없이 공력을 끌어올린 건 아니었다.

퍼퍼퍼펑!

수적 차이가 압도적이라고 해서 효율만 따지면 전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소극적으로 대응하면 오히려 상대의 기세만 살려 줄 뿐이었다.

그래서 서조운은 기선제압을 위해 초반부터 강하게 나갔다.

“크아악!”

“커헉!”

서조운의 검세에 담겨 있는 극염(極炎)의 강기에 전방이 불바다로 화했다.

검과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극양지기에 달려들던 적들이 불꽃에 휩싸였다.

까아앙! 까가가강!

그러나 수십 명이 화마에 집어삼켜져 고통스럽게 죽어 갔음에도 흑의인들은 달려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그들의 임무는 서조운이나 다른 일행들을 죽이는 게 아니었다.

최대한 물고 늘어져 힘을 빼놓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이 빌어먹을 놈들이!”

“차하압!”

“진영을 유지해! 단 한 명도 전선을 넘게 해서는 안 돼!”

하나하나는 감히 서조운이나 모용척, 선우방, 사마의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숫자가 수백, 수천 명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제아무리 네 사람이 대단한 실력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하나 인간의 체력과 공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흑의인들은 바로 그 점을 물고 늘어졌다.

쉬이익!

거기다 간간이 숨어 있는 절정고수들의 암격은 일행들을 더더욱 짜증 나게 만들었다.

차라리 정면에서 달려들면 시원스럽게 싸우기라도 할 텐데 절정고수들은 그러지 않았다.

철저하게 하수들이 만들어 준 틈을 타 암습했다.

절정고수로서의 자존심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흐읍!”

“큭!”

그래도 서조운이나 선우방, 모용척은 상황이 조금 나았다.

각자가 완숙의 경지에 다다른 절정고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호량이나 사마세가의 무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무경이 낮았기에 방어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스극. 슥!

그렇다 보니 몸에 상처가 점점 더 늘어 갔다.

가까스로 버티는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쌔애애액!

거기에 흑의인들은 단도와 비수, 손도끼들을 무식하게 던져 댔다.

맞으면 좋고, 빗맞아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근데 그게 일행들에게는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등 뒤에는 보호해야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일행들로서는 오로지 받아 내거나 튕겨 낼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이 지쳐 간다!”

“계속 두들겨!”

“저 녀석들이 구멍이다! 저기를 집중 공격해!”

유호량과 사마세가의 무인들이 이를 악물었다.

교활하게도 반호진이 있는 곳을 슬금슬금 피해 자신 쪽으로 흑의인들이 몰려와서였다.

“슬슬 끝내 볼까.”

그때 유호량의 귀에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방에서 비명과 신음 소리가 비산하고 폭음과 굉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음에도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동시에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파아아앗!

더불어 기이한 감각이 그의 기감을 건드렸다.

흉포하면서도 절대적인, 그러면서도 익숙한 기운이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아니, 정확하게는 집어삼켰다.

쿵! 쿵! 쿵! 쿵! 쿵!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는 기운에 동귀어진의 기세로 달려들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언제 사납게 공격했냐는 듯이 전부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크윽!”

“으으으……!”

그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타격도 받은 모양인지 하나같이 눈빛이 멍했다.

반호진이 흩뿌리는 존재감에 심혼(心魂)이 굴복당한 것이었다.

“으아아악!”

“이깟 기도에 굴복하지 않는다……!”

물론 전부 다 무릎을 꿇은 건 아니었다.

절정의 경지에 발을 디딘 이들은 어금니를 악물고서 악착같이 버텼다.

고작 존재감 따위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이 기를 쓰고 버텼던 것이다.

“그럼 어디 한번 버텨 봐.”

“커헉!”

군데군데 몸을 반쯤 구부린 상태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들을 주시하며 반호진이 비릿하게 웃었다.

어디까지 발악하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쿵! 쿠웅! 쿵!

반호진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기운이 더더욱 농밀해졌다.

더불어 절정고수들이 느끼는 중압감도 커졌다.

반호진이 강도를 더욱더 높인 것이었다.

그 결과 겨우겨우 버텨 내던 절정고수들이 무릎을 꿇었다.

“으어어어……!”

그리고 이미 두 무릎을 꿇었던 이들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점점 더 커지는 중압감에 이제는 허리조차 펼 수 없어서였다.

퍼퍼퍼퍽!

그 틈을 타 사마의성은 지풍을 날렸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절정고수들의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가 완벽히 제압당하자 지풍으로 머리를 꿰뚫었다.

퍼펑! 퍼퍼펑!

그러자 선우방과 모용척, 서조운도 따라서 공격했다.

가장 껄끄러운 절정고수들을 처리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놓치지 않고 반응한 것이었다.

스윽.

반면에 기도만으로 전장을 제압한 반호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꿇거나 엎어져 있는 이들을 무심히 둘러보기만 했다.

“우와…….”

“미쳤다. 이게 바로 절대고수의 위엄인가.”

한순간에 전장을 제압해 버리는 압도적인 모습에 백휘경과 백휘성이 입을 쩍 벌렸다.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서였다.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광경에 두 형제는 경외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반호진의 등을 바라봤다.

“이참에 잘됐어. 일일이 청소할 고생을 덜었으니.”

쩌저저적!

누구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때 반호진은 느릿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 흔한 검기도 서리지 않은 단순한 횡베기였는데 그 일격에 수백 명의 육신이 토막 났다.

몸뚱이건 병장기건 바위건 가리지 않고 모든 걸 베어 버렸다.

“으으으!”

“괴, 괴물”

“악마다! 네놈은 악마야!”

“글쎄. 네놈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단 일검으로 전방에 있던 흑의인들을 도륙한 반호진이 무심하게 말하며 다른 방향을 향해서도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결과는 지금까지와 똑같았다.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흑의인들은 그저 무력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그들이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얻을 건 다 얻었고.’

반호진은 처음부터 이렇게 할 수 있었다.

숫자가 엄청나다고 하나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절대고수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초월경의 무인뿐이었다.

그럼에도 반호진이 처음부터 나서지 않은 건 친구와 동생들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제법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이번처럼 누군가를 지키며 제자리에서 싸웠던 적은 없었다.

마음대로 날뛰면서 싸우는 것과 이동이 봉쇄된 상태에서 싸우는 건 엄연히 달랐기에 반호진은 이번 기회에 일행들이 많은 걸 느끼고 깨닫기를 바랐다.

또 목숨이 경각에 달릴 만한 상황도 없었기에 한 번쯤은 이런 악조건에서 싸워 볼 필요가 있었다.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흘흘흘!”

반호진의 시선이 향하는 끝에서 열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중 중앙에 있던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섬뜩한 괴소를 흘리며 반호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웃음과 달리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말이다.

“당신일 줄 알았지. 광살노옹(狂殺老翁).”

“호오. 꼬맹이가 날 알아볼 줄이야. 이거 놀라운데? 본좌가 알기에 우리는 마주친 적이 없을 텐데?”

“만난 적이 없다고 해서 꼭 모르는 건 아니지.”

“본좌의 용모파기를 봤나?”

광살노옹의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핏발이 가득 선 눈으로 노려보았으나 반호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늙은이의 용모파기를 내가 굳이 찾아봐야 할 이유는 없지.”

“근데도 이 몸을 알아봤다라.”

“그게 중요한가?”

“하긴. 그건 중요치 않지. 지금 중요한 건 본좌가 나섰다는 것이고, 네놈이 곧 죽을 거라는 사실이지.”

“계획이 실패했는데도?”

반호진이 피식 웃었다.

도발하려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웃겨서였다.

분명 이천 명에 달하는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거기에 전대 녹림십팔채주로 이루어진 녹림팔노(綠林八老)라면 어디 가도 꿀리지 않을 전력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상대가 나빴다.

“실패라니. 아직 내 계획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허어. 이 많은 녀석들이 버리는 패라니. 그걸 알고 죽었을지 모르겠군.”

“모두 알고 있다. 그리고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지.”

“내가 알기로 녹림에는 의리가 없을 텐데. 배신이라면 또 모를까.”

반호진의 비아냥거림에 광살노옹의 얼굴이 벌게졌다.

극도로 흥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건 반호진이 그를 도발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냥 툭툭 내뱉는 것이었기에 광살노옹은 속이 뒤집어졌다.

“이놈!”

“시끄럽고, 다음 계획이나 꺼내 봐. 안 그러면 내 손에 죽을 테니까.”

반호진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시산혈해가 된 장원을 가로지르며 순식간에 광살노옹에게 접근했다.

“죽여라!”

“기껏 준비한 계획이 녹림팔노와의 협공인가? 이거 시시한데.”

광살노옹의 포효에 녹림팔노가 씁쓸한 얼굴로 땅을 박찼다.

누가 보더라도 억지로 끌려 나온 모습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건성으로 움직이는 이는 없었다.

싸움은 시작되었고, 살기 위해서는 전력을 다해야 했기에 녹림팔노는 미리 약속한 대로 반호진을 포위했다.

쉬이이익!

그와 동시에 전대 총표파자인 광살노옹의 신형이 한줄기 빛살로 화했다.

녹림팔로가 반호진을 포위하기 무섭게 일행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던 것이다.

“네놈은 우리와 놀자꾸나!”

“돌아가지 못한다!”

“고작 준비한 노림수가 인질이냐.”

너무나 훤히 보이는 속셈에 반호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녹림팔노는 강했다.

한때 녹림계를 호령하던 무인들이었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겨우 초절정에 발을 디딘 노괴 여덟 명으로는 그를 붙잡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웅웅웅웅!

광살노옹은 초절정고수 여덟 명이라면, 산전수전 다 겪은 녹림팔노라면 아주 약간의 시간 정도는 벌어 줄 거라 생각했을 터였다.

찰나의 시간일지라도 그 정도의 시간만 만들어 준다면 절정고수 몇 명 정도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으니까.

근데 문제는 반호진의 무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마, 막아!”

“얼른 공격해!”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공명음과 함께 반호진에게서 무시무시한 기파가 흘러나오자 녹림팔노가 황급히 달려들었다.

딱 봐도 포위망의 한쪽을 뚫고 광살노옹에게 달려갈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반호진의 생각은 달랐다.

애초에 포위망을 찢을 생각이 없었다.

쌔애애액!

굳이 뚫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저 소천검을 날리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빌어먹을!”

한줄기 벼락처럼 순식간에 허공을 꿰뚫고 날아가는 검의 모습에 녹림팔노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보는 순간 다들 느낀 것이었다.

자신에게 날아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그래서 녹림팔노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했다.

‘잠깐만. 검이 날아갔으면…….’

‘지금은 빈손이라는 얘기!’

녹림팔노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본능적으로 같은 생각을 하고 서로를 쳐다봤던 것이다.

이윽고 녹림팔노의 신형이 반호진에게 쏘아졌다.

“어리석다니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녹림팔노의 표정에 반호진이 고소를 머금었다.

어이가 없는 게 아니라 우스웠다.

검이 없다고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게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초월경의 무인을 겪어 봤다면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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