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장. 은원은 돌고 도는 법. -01
팔노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두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야밤의 기습이니만큼 놀라서 허둥지둥하다가 죽었을 수도 있어서였다.
게다가 무인이라고 하나 다들 서른도 넘지 못한 애송이들이었다.
물론 어리긴 해도 나름 무림에서 방귀깨나 뀐다고 하나 지금처럼 야습을 받은 경우는 없을 것이기에 당황하는 게 당연했다.
“암. 쓸데없는 걱정이야.”
“이제 막 시작하기도 했고.”
“그리고 우리가 걱정할 건 검룡도, 비룡도, 염룡도 아닌 검신이다. 나머지는 일절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번 암습에 동원한 인원만 무려 이천 명이었다.
그것도 개방과 하오문, 금가장의 눈을 피해 오로지 산길로만 이동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팔노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핏덩이라 비하했지만 반호진의 무위는 무시할 수가 없었기에 다들 긴장한 눈빛으로 무상문의 장원을 주시했다.
“우리는 계획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돼. 애송이들이 힘이 쫙 빠졌을 때, 그때 죄다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 이천 명을 데려온 거니까.”
“끄아아악!”
기문진으로 인해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습격은 계속되었다.
그걸 알려 주듯 처음으로 비명성이 들려왔다.
“시작된 모양이군.”
“밑에 애들이 최대한 진을 빼놓아야 할 텐데.”
끊임없이 입을 여는 팔노와 달리 노야라 불린 노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살벌한 안광을 토해 내며 장원을 뚫어져라 노려보기만 했다.
“모두 이곳으로 모여!”
“이쪽으로 오세요!”
난데없는 기습에 서조운과 선우방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습격에 두 사람 다 대노한 것이었다.
그러나 흥분한 것과 달리 둘의 행동은 침착하고 신중했다.
반호진의 전음을 듣기 무섭게 서조운은 예유화와 백휘경, 백휘성 형제를 챙겼고, 선우방은 황매향을 비롯해서 여자들을 데려왔다.
그리고 사마의성은 수하들을 데리고 진영을 구축했다.
고루거각을 이용해 깔아 놓은 기문진이 시간을 끌어 주는 사이 방어진을 완성했던 것이다.
“감히!”
마지막으로 모용척은 간간이 개구리처럼 튀어나오는 흑의복면인들을 처리했다.
기습한 의도가 명명백백했기에 모용척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통일성이 전혀 없는 무공과 병기라.”
지이익!
잔뜩 성난 얼굴로 날뛰는 모용척과 달리 반호진은 늘 그렇듯이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서 절명한 흑의복면인의 복면을 벗겼다.
“산적 같습니다.”
얼마나 꽁꽁 싸맸는지 순순히 벗겨지지 않는 복면을 벗기자 험상궂은 얼굴이 드러났다.
죽음 직전의 고통이 고스란히 표정에 담겨 있었으나 반호진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얼굴에서부터 시작해 상반신의 옷을 전부 찢었다.
그러자 기괴하고 조잡한 문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 의성이와 같은 생각입니다. 이 녀석들 무공이 완전 잡다합니다. 수준도 썩 높은 건 아니고요.”
어느새 주변을 정리한 모용척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죽어 있는 흑의복면인들의 옷을 거칠게 찢어 버렸다.
알아낼 수 있는 게 몸뚱이밖에 없기에 맨몸을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복수인가.”
“총표파자를 죽인 것에 대한 복수 같습니다.”
“같잖은 것들이.”
반호진과 사마의성의 대화를 듣던 모용척이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어서였다.
“아주 칼을 뽑았네. 숫자가 어마어마해. 천 명은 그냥 넘겠는데.”
“그래 봤자 산적 나부랭이들일 뿐입니다. 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자신 있어? 천 명이 넘는데?”
선우방이 씨익 웃으며 물었다.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숫자가 이 정도면 얘기가 달라졌다.
한 손으로 열 손 막기가 힘들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기는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게 다가 아닐 거야. 이렇게 나온다는 건 뒤를 생각하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저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형은요?”
“내가 선택지가 있나? 죽기 싫으면 다 죽일 때까지 싸워야지.”
선우방의 표정이 일변했다.
사람 좋은 미소는 사라지고 살기가 번뜩였다.
하지만 이곳으로 돌진하는 습격자들의 살기와는 달랐다.
습격자들의 살기에 광기가 뒤섞여 있다면 선우방의 살기에는 지키겠다는 각오가 굳게 중심을 잡고 있었다.
“저와 같은 생각이시네요.”
“다치지 마라.”
“형도요.”
“저희도 싸울게요!”
선우방과 모용척의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는 듯하자 예유화가 입을 열었다.
거기에 백휘경과 백휘성도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아무래도 아직 키가 작다 보니 행동으로 시선을 끈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너희들 장난을 받아 줄 시간 없다.”
“아서라. 실전도 안 겪어 본 애들이 전투는 무슨.”
단칼에 불허하는 모용척에 이어 서조운이 입을 열었다.
세 사람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대련과 실전은 완전히 달랐다.
아무리 실전 같은 비무를 수없이 했다고 해도 그게 진짜 실전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서조운은 단호하게 말했다.
“혀, 형!”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척이 형 말대로 너희들 어리광을 받아 줄 시간도 없어.”
“하, 하지만 우리도…….”
평소와 달리 매정하게 몸을 돌리는 서조운의 모습에 예유화와 쌍둥이 형제가 이를 악물었다.
칭찬도 많이 듣고, 성장세도 가파르다는 말을 들었기에 셋은 자신들도 어엿한 무인이라고 생각했다.
실전만 겪지 못했을 뿐이지 이류무사 정도는 가볍게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조금의 여지도 없는 서조운과 모용척의 말에 세 명은 분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서조운과 모용척의 말에 섭섭한 게 아니라 부족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싸우는 거 대신에 너희들이 해 주었으면 하는 일이 있어.”
“저희가요?”
분해서 눈이 붉어진 세 아이의 시선이 선우방에게로 향했다.
자신들에게 시킬 일이 있다고 하자 곧바로 반응한 것이었다.
“응. 너희도 보면 알겠지만 숫자가 많지? 그러니까 눈먼 칼이나 창, 손도끼가 날아올 수도 있어. 그걸 너희들이 막아 주었으면 해. 다른 아이들과 누나, 언니들을 지키는 거지.”
“할 수 있어요.”
“꼭 할게요!”
별거 아닌 일이지만 이 또한 엄연히 임무라고 할 수 있었다.
또한 자기보다 약자들을 지키는 것이었기에 세 아이의 눈빛이 달라졌다.
스스로의 부족함에 분노하던 기색은 사라지고 결연한 표정이 빈자리를 채웠다.
“믿는다?”
“네. 최선을 다할게요.”
“단 하나도 허락하지 않을게요!”
차분한 예유화와 달리 백휘경과 백휘성은 벌써부터 흥분했다.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것이었다.
그건 달리 말하면 선우방이 그만큼 자신들을 믿는다는 뜻이었기에 쌍둥이 형제의 두 눈은 열의로 활활 불타올랐다.
“그래. 부탁한다.”
“예!”
“저희만 믿으세요!”
급속도로 흥분한 백휘경, 백휘성과 달리 예유화는 차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가 엄청난 만큼 대답할 힘조차 아끼려는 것이었다.
“둘 다 너무 흥분하지는 말고.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옙!”
그때 사방을 포위한 흑의인들을 주시하던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둘의 상태가 어떤지 꿰뚫어 보고 조언한 것이었다.
“다른 분들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없을 겁니다.”
“맞습니다. 곧 끝날 겁니다.”
“그러니 저희들을 믿고 기다려 주세요.”
투지를 불태우는 세 아이와 달리 무공에 입문했다고 하나 범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황매향과 여자아이들이 잔뜩 굳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흑의인들이 흩뿌리는 살기에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예유화의 부모와 쌍둥이 형제의 모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진짜 양민인 세 사람은 정도가 더 심했다.
“괜찮을 겁니다. 문주님을 믿으세요.”
세 사람에게 다가간 유호량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한 명씩 손을 잡아 주면서 말이다.
그런 그의 노력 덕분인지 세 사람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스윽.
유호량이 세 명을 다독여 주는 걸 확인한 반호진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촘촘하게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는 흑의인들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준비를 제법 많이 했네.”
사방을 빼곡이 채운 흑의인들을 찬찬히 훑어보며 반호진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호진의 말에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무시무시한 살광을 토해 내며 반호진과 일행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기만 했다.
“머리도 제법 썼고.”
반호진의 시선이 곳곳에 숨어 있는 절정고수들에게 향했다.
대부분이 삼류무사와 이류무사였으나 간간이 절정고수들이 숨어 있었다.
그것도 한곳에 뭉쳐 있지 않고 사방에 퍼져 있었는데 그렇게 포진한 목적은 뻔했다.
심리적으로 그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겸사겸사 인질도 잡을 수 있으면 잡고.
어쩌면 이게 가장 큰 목적일 수도 있었다.
“애송이. 넌 오늘 이곳에서 죽는다.”
“나더러 애송이라니. 애송이라 불릴 수준은 진즉에 넘어선 것 같은데.”
“애송이는 애송이일 뿐이지.”
“그럼 애송이 손에 죽는 넌 병신인가?”
“공격해!”
반호진의 기도가 일변하자 입을 열었던 흑의복면인이 포효하듯 소리쳤다.
그러자 포위하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공격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동시에 달려들었던 것이다.
“흥.”
마치 검은 파도가 몰려오는 듯한 광경이었으나 반호진은 오히려 콧방귀를 끼었다.
인해전술은 분명 위협적이고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인해전술이 통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쩌어어억!
허리춤에 있던 소천검이 어느새 반호진의 오른손에 들려 있었다.
동시에 반호진에게 달려들던 흑의인 수십 명의 몸뚱이가 양분되었다.
검강도 아닌 검기에 육신은 물론이고 병장기도 함께 잘려 나가자 쇄도하던 이들이 움찔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동료가 한순간에 쓸려나가자 공포에 잠식당한 것이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얼른 공격해! 전부 달려들어!”
“애들을 노려!”
일격에 수십 명이 즉사했지만 집결한 인원에 비하면 소수였다.
또한 가만히 있어도 죽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죽이느냐, 죽느냐 단 두 가지의 길만 있기에 간부급으로 보이는 이들이 악을 썼다.
“시끄럽네.”
괴성을 지르듯 소리치는 이들을 향해 반호진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지시를 내린다는 건 그만한 직급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반호진은 이런 이들부터 노렸다.
투툭. 투두둑.
그 결과 또 한 번 수십 명이 육편으로 화했다.
어느 누구도 반호진의 일검을 받아 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죽어!”
“뒈져라!”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는 반호진과 달리 일행들은 고전하고 있었다.
적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다른 사람을 보호하면서 싸워야 했기에 일행들로서는 너무나 불리했다.
게다가 은밀히 숨어 있는 절정고수들의 존재도 일행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암살자처럼 파고들어서 공격했기에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큭! 이 자식들이!”
원진의 한쪽 방향을 맡고 있던 서조운이 신음을 흘렸다.
은밀하게 파고든 한 줄기 검강이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가서였다.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으면 피부가 아니라 얼굴의 반이 잘려 나갔을 것이기에 서조운은 이를 악물고서 좌장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를 공격했던 절정고수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화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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