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90화 (290/468)

제 94장. 풍운무림(風雲武林). -03

선우방이 코웃음을 쳤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아서였다.

동시에 그는 이런 말이 나올 거라 이미 예상하기도 했다.

“사람인 이상 외모는 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 애들도 마찬가지야. 외모를 안 볼 수가 없으니까.”

“유화가 보통 미모는 아니지 않습니까. 당장 지금만 하더라도 독봉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데.”

“그렇긴 하지. 근데 남자가 미녀를 좋아하는 게 욕먹을 일은 아니잖아?”

“끄응!”

모용척이 앓는 소리를 냈다.

끝내 패배를 선언한 것이었다.

“다들 잘 가고.”

“나중에 볼 수 있으면 보자고.”

“다음에 만났을 때는 나도 많이 성장해 있을 거야!”

“어쩌면 일급표사가 되어서 무상문으로 돌아올 지도 모르지!”

예유화가 철벽을 치는 사이 백휘경, 백휘성 형제도 나름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나마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것이다.

“한참 먼 것 같은데.”

“일단 표사부터 되면 말해, 되면.”

툴툴거리면서도 무운을 빌어 주는 쌍둥이 형제의 모습에 아이들이 코를 슥 훔쳤다.

그리 긴 시간도 아니건만 동고동락을 해서 그런지 이상하게 정이 든 것 같았다.

“자! 출발하자!”

“예!”

은근히 잔정이 많은 방일석은 표사들과 아이들이 충분히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제법 긴 시간을 함께했던 만큼 정이 들었을 게 분명해서였다.

또 급하게 복귀해야 하는 게 아니었기에 시간도 많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일급표사들과 아이들이 다시 한번 반호진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은 가벼운 묵례로 답례했다.

잠시 후 방일석의 지휘하에 여든세 명이 무상문을 떠났다.

“묘하게 시원섭섭하네.”

“너도 정이 좀 들었지?”

“안 들었을 리가. 너만큼 매일 대련했는데.”

선우방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다들 원하는 걸 얻고 떠났으니 잘된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조금은 아쉬웠다.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거야.”

“당분간은 장원이 좀 휑할 것 같아요.”

“그럴 때는 빡시게 수련하면 돼. 그럼 잡생각이 사라지거든.”

“으윽!”

대화에 끼어들었던 서조운이 장난스럽게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였다.

처음 무공에 입문했을 당시 서조운은 건강해졌다는 사실에 행복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옥도 맛봤다.

반호진이 마음먹고 굴리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 겪어 봤기에 서조운은 이런 말이 나오면 반사적으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추가 인원은 없는 거지?”

“당분간은?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기도 하고. 또 이만큼 일했으면 당연히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어?”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또 틀린 말은 아니니.”

“아버님께서는 별말 없으셔?”

“연락은 꾸준히 주고받고 있는데 아직은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네. 근데 혹시 몰라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게 준비는 해 두고 있어. 네 말대로 강호 정세가 심상치 않으니까.”

반호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우방 역시 현재 강호 정세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선우방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본가도 마찬가지예요. 아버지께서 생각이 복잡하신 것 같더라고요.”

“천사맹과 마도련이 나타났으니까. 하나만 등장해도 문제인데 두 곳이 동시에 나타나서 힘을 합쳤으니.”

“우리도 모여야지요. 마도련과 천사맹을 상대하기 위해서. 지금이 딱 무림맹이 나타나야 하는 시점이지 않을까요.”

심각한 선우방과 달리 모용척의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사맹과 마도련의 등장이 예상 밖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크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서였다.

백도무림의 힘이 약해졌다고 하나 대신 새외무림과의 전쟁으로 살아남은 무인들은 백전노장이 되었다.

그렇기에 모용척은 사도무림과 마도무림이 연합했다고 해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무림맹이라.”

“공식적으로 모이지는 않았어도 비밀리에 논의는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상황이 제법 심각하니까요.”

반호진의 중얼거림에 모용척은 확신하듯 말했다.

천사맹과 마도련이 나타났는데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너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선우방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반호진에게 집중되었다.

말은 안 했지만 다들 반호진의 의중이 궁금했기에 귀를 기울였다.

“난 좀 쉬고 싶은데. 장기업무가 이제 끝나기도 했고.”

“새외무림과 전쟁할 때와는 너무 다른 거 아냐?”

선우방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새외무림이 쳐들어 왔을 때 관심 없는 척하면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게 반호진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때와 행동이 너무나 달랐다.

“다를 수밖에.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니까. 일단은 좀 지켜보려고.”

“신중하게 움직이겠다라.”

“난 움직이겠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만약 무림맹이 창설되고 소집령이 떨어지면 어떡할 거야?”

“그건 그때 가 봐서.”

심드렁한 대답에서 선우방과 서조운, 모용척은 반호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실망하지 않았다.

반호진은 충분히 이럴 자격이 있었고, 지금 한 말처럼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방이 형이나 척이 형과 달리 저는 언제나 형님의 결정에 따를 생각입니다. 지금 당장은 저도 할 일이 있고요.”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때 서조운과 사마의성이 선수를 쳤다.

선우방과 모용척은 언제 불려 가도 이상하지 않지만 두 사람은 달랐다.

오고 가라 할 사람이 없었기에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반호진의 곁에 있을 수 있었다.

또한 이제는 예전과 달리 지켜야 하는 장소도 생겼고.

“우와. 이런 식으로 나온단 말이지.”

“사실이니까요. 형들과는 입장이 조금 다르죠.”

당당하게 말대꾸를 하는 사마의성의 모습에 모용척이 헛웃음을 흘렸다.

한데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일단 들어가자고.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잖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고 결정을 하자고.”

“예.”

예유화와 백휘경, 백휘성이 조용히 눈치를 보고 있었기에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슬슬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기에 땡볕 아래에 너무 오래 있는 것도 좋지 않았다.

자신들이 움직여야 곽춘과 아이들도 쉴 수 있었기에 반호진은 자리를 파했다.

***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고요한 밤에 야공을 가르는 검은 인영들이 있었다.

가뜩이나 어두컴컴한 밤에 야행복을 입고 복면에 두건까지 두른 이들은 오직 두 눈만을 드러낸 채로 남창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그 숫자가 어마어마했다.

마치 개미 떼처럼 남창의 한 장원으로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스스슥.

하지만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서 모여들었던 인원은 결코 목적지라 할 수 있는 장원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미리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같이 오백 장 이상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모두 집결했습니다, 노야.”

모여든 흑의인들이 우두커니 서 있을 때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 느릿하게 걸어왔다.

나이 때문인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왔는데 노인의 등장에 흑의인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시작해.”

“알겠습니다.”

“아, 팔노(八老)들은 바로 투입하지 말고. 그 아이들도 나처럼 늙어서 뼈가 예전 같지 않아. 괜히 날뛰다가 죽으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 이제는 같이 늙어 가는 처지인데.”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공손히 대답하는 흑의복면인의 모습에 노인이 오만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에 흑의복면인 역시 기분 상해 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노인은 충분히 이럴 만한 자격이 있어서였다.

후우우웅!

그때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집결해 있던 흑의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전원 다 장원을 향해 내달렸던 것이다.

한데 신기하게도 무기가 가지각색이었다.

또한 경신술 역시 모두 달랐다.

“이제야 제자의 혈채를 받겠구먼.”

새카만 파도처럼 정문이며 담벼락이며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흑의인들의 모습에 노인이 섬뜩한 살소를 머금었다.

드디어 오랜 인고의 시간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네놈도 똑같이 소중한 걸 잃어 봐야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똑같이 뒈져 봐야지. 죽음은 오직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으니.”

콰콰콰쾅!

노인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장원의 곳곳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기천 명은 될 법한 인원이 일제히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소리였다.

충분히 넘어갈 수 있었음에도 흑의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지시받은 명령이 장원의 완벽한 파괴였기에 흑의인들은 정문과 담벼락은 물론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박살 냈다.

“흡!”

“뭐야!”

“기문진이다!”

거친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허물어지는 담벼락을 지나 장내의 고루거각들을 파괴하던 흑의인들이 당혹성을 토해 냈다.

고루거각이 무너지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달라져서였다.

그뿐만 아니라 파괴된 고루거각의 잔재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피, 피해!”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기문진에 여기저기에서 당황한 기색이 완연한 외침이 터졌다.

그러나 대책을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대규모 기문진을 겪어 본 이가 없었기에 누구도 타개책을 말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렇다 보니 흑의인들은 우왕좌왕하며 정신없이 피하기 바빴다.

“그냥 싹 다 밀어 버려!”

“생문(生門) 따위 찾지 마. 그냥 전부 쓸어버려!”

그때 어느 한 명이 소리쳤다.

피하기만 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았기에 그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고루거각이 위협적이라면 그걸 치워 버리면 된다고 말이다.

게다가 암습에서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속도였다.

들키지 않고 표적에게 닿는다면 가장 좋지만 그런 경우는 의외로 드물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접근하는 게 상책이었다.

퍼퍼퍼펑!

때로는 단순한 게 최선이라는 말처럼 무너지던 고루거각을 밀어 버리자 기문진이 흔들렸다.

누군가가 말했던 내용이 운 좋게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결과가 나오자 너도 나도 전각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흐으음.”

그런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정문이 뭉개지고 담벼락과 고루거각이 무너졌음에도 그 흔한 경종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였다.

아무리 장원 규모에 비해 상주하는 인원이 적다고 하나 그래도 엄연히 무림문파였다.

더구나 알게 모르게 적이 많은데 보초가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스스슥!

“노야.”

“왔는가.”

노인의 미간에 생긴 골이 점점 더 깊어져 갈 때 주위로 여덟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날아 온 듯 하늘에서 가볍게 착지했던 것이다.

한데 늙수그레한 얼굴과 달리 다들 덩치가 상당했다.

청년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체구였다.

“저희들을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초반에 나서지 말라고 했지. 왜? 불만 있는가?”

“그럴 리가요. 저희들은 그저 노야를 따를 뿐입니다.”

“후후후후.”

과거에는 다들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물론 건방지게 따진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여전히 그에게는 다들 애송이였다.

“조금 이상한 것 같습니다. 지금쯤이면 비명 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팔노 중 한 명이 의문을 제시했다.

현재 장원에 거주하는 인원이 오십 명이 채 안 된다고 하나 그래도 너무 조용했다.

습격한 인원이 한두 명도 아닌데 말이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뒈진 모양이지.”

“무공을 익힌 이보다 양민이 훨씬 많다며? 그런 이들이 비명을 지를 새가 있을까?”

“공포에 휩싸이면 말문이 막히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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