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89화 (289/468)

제 94장. 풍운무림(風雲武林). -02

그뿐만 아니라 다들 잠시 깜빡하는데 반호진의 나이는 이제 스물두 살이었다.

후기지수 중에서도 어린 축이라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런 만큼 원래 이런 말을 하는 게 당연한 건데 말하는 이가 반호진이라서 괴리감이 있는 것이었다.

“장유유서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저는 당연히 기다려야지요.”

“그 말을 이렇게 사용하는 사람은 사제밖에 없을 거야. 만약 도와달라고 한다면?”

“고민해 봐야지요.”

“역시.”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방일석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사실 반호진 정도쯤 되면 가능한 말이기도 했고.

담현을 제외하면 반호진에게 강요할 수 있는 이는 무림에 없었다.

“저는 정도무림의 힘을 믿습니다. 전쟁으로 입은 피해가 상당하지만 그럼에도 백도는 강합니다.”

“저력이야 있지. 근데 저쪽은 사도와 마도가 힘을 합쳤잖아. 절대 만만한 전력이 아니야. 더 위험한 건 백도무림의 전력이 꽤 많이 드러났다는 거고. 게다가 백도무림은 정보가 너무 부족해. 우리도 알아낸 걸 최대한 본사에 알리고는 있는데 개방이 파악한 것과 큰 차이는 없을 거야.”

“위험하지 않습니까?”

“깊게 파는 건 아니고, 표행을 하면서 들리는 것만. 물론 우리가 판단하기에 확실한 것들만. 괜히 정확하지 않은 걸 보고했다가 오판할 수도 있으니까. 개방이나 하오문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알게 모르게 듣는 것들이 꽤 많거든. 금가장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다양한 곳에서 정보를 취합하면 교차검증은 할 수 있으니까.”

방일석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했으나 표국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들도 상당했다.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따로 정보조직을 두지 않았음에도 강호 정세에 대해 꽤 상세히 알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래서였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도는 몰라도 사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요.”

“천사맹이 이기면 더 문제야. 우리에게 가장 좋은 건 백도무림이 이기는 거야. 그래야 사도무림과 마도무림이 지금처럼 숨죽이고 살 테니까. 그래서 말인데 방장께서 별다른 말씀 없으셨어? 전언이라던가. 최근에 대사형과 함께 오셨었다며.”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연맹이 만들어지길 바라시는 겁니까?”

에둘러 물어봤음에도 반호진은 귀신같이 방일석의 속마음을 꿰뚫어 봤다.

그러자 방일석이 머쓱하게 웃었다.

“정도무림도 대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마도무림과 사도무림이 하나로 뭉쳤으니 정도무림도 집결하는 게 낫지 않겠어?”

“논의 중일 수도 있습니다. 사형 말씀대로 상황이 썩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요. 과거 정사대전이나 정마대전이 벌어졌을 때 뭉치기도 했고.”

“이번에는 무려 두 곳이 힘을 합쳤으니까.”

반호진만큼이나 중원의 평화를 바라는 게 방일석이었다.

무인이지만 그 전에 표사였기에 방일석은 평화롭게 표행을 하고 싶었다.

“근데 저보다는 사형이 아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개방과 하오문, 금가장과 인연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이지 상하관계가 아니라서요.”

“역시 그런가.”

혹시나 따로 아는 게 있을까 싶어 넌지시 물었는데 반호진도 딱히 알고 있는 게 없는 듯하자 방일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탁하지는 않았다.

금가장과 하오문에 부탁하는 것 자체가 빚을 만드는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설사 부탁한다고 해도 반호진이 들어줄 리도 없었고.

“죄송합니다.”

“아냐아냐. 죄송은 무슨.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아, 그리고 사제에게 말해 줄 게 한 가지 더 있어. 정확한 건 아닌데 또 아예 신빙성이 없는 소문은 아니라서 사제도 조금은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오문이 내부적으로 조금 문제가 있는 모양이야. 나야 외부인이니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돌아가는 사정을 보면 얼추 짐작은 할 수 있거든.”

“하오문이요?”

반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후계자인 난희주의 위치도 견고할뿐더러 하오문주가 건재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고 하자 반호진은 의아했다.

“응. 아무래도 하오문은 정사중간이잖아. 사제와 친분이 있다고 하나 근본은 사파에 가깝지. 사실 대부분이 정사중간이라기보다는 사파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데 천사맹이 발족했잖아. 천사맹 측에서 가만히 있겠어? 모든 사파를 규합하겠다고 천명했는데 당연히 하오문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게다가 하오문의 규모가 오죽 커? 분타들도 수백 개나 될 테고. 하오문주가 건재하다고 하나 영향력이 절대적인 건 또 아니야. 정확하게는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뭉친 조직이니까. 다른 문파에 비하면 하오문주의 권력이 절대적이지는 않지.”

“확실히 상황이 애매하기는 하네요.”

“애매한 수준을 넘어 난감할걸. 천사맹이 집요하게 휘하로 거두려고 할 테니까. 하오문의 전력이 몇 년 사이에 급격하게 강해진 건 맞지만 천사맹에 반기를 들 정도는 아니야.”

반호진은 턱을 쓰다듬었다.

듣고 보니 하오문의 상황이 상당히 좋지 않을 듯해서였다.

그런데도 난희주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간간이 건강에 대한 내용이나 사소한 것들만 물었다.

“천사맹이라.”

“마도련도 만만치 않아. 중원의 마도문파 거의 대부분이 집결하고 있어. 두 곳 다 전력은 포달랍궁이나 북해빙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막상 전투가 벌어지면 상당히 까다로울 거야.”

“전장이 모두에게 익숙하니까요.”

“맞아.”

방일석이 은근슬쩍 반호진의 표정을 살폈다.

진지한 얼굴이지만 어느 곳에서도 분노나 흥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그가 말해 준 소식이기에 곰곰이 생각하는 것 정도였다.

어디에서도 참전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사부님과 대사형의 머리가 많이 복잡할 것 같습니다.”

“너는 안 복잡한 것 같은데?”

“저야 무상문만 신경 쓰면 되지 않습니까. 딱히 권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어깨를 으쓱하는 반호진의 대답에서 방일석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반호진이 천사맹, 마도련과의 전쟁에 참전할 의사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으음! 이건 안 좋은데…….’

방일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기는 나이도 어리고 권한도 없다고 말하지만 대신 반호진이게는 절대강자라는 위치가 있었다.

강호에서의 위상도 천하십대고수와 나란히 두어도 절대 꿀리지 않았고.

한데 그런 무인이 전쟁이 일어날 게 확실시되고 있음에도 참전할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자 방일석은 속이 탔다.

반호진이 겸손하게 말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새외무림과의 전쟁을 거의 끝내다시피 한 게 바로 그였다.

때문에 반호진이 적극적으로 참여를 한다면 이번 역시 전쟁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는데 정작 당사자가 딱히 생각이 없어 보이자 방일석은 초조했다.

근데 더 문제는 방일석이 이 부분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할 자격이 없다는 점이었다.

“잘될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형. 백도에도 고수는 많습니다. 심지어 지금 살아 있는 무인들은 대규모 전쟁까지 겪은 이들입니다. 단순히 숫자와 규모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아는데 걱정이 되니까 그렇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저력을 믿으시죠. 아니면 사부님과 대사형을요.”

“……그래야겠지.”

방일석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걸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눈치가 상당히 빠른 반호진이기에 복잡한 심사를 감추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야만 했다.

“큰일인 건 사실이지만 무림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늘 있던 일입니다. 주기적으로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평화가 길면 그 끝에는 언제나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요.”

“가끔 넌 전혀 이십 대처럼 안 보여.”

“근데 진짜 스물두 살이지요.”

“기이하단 말이지, 정말로.”

신기하다 못해 이상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보내오는 방일석의 시선을 피하며 반호진은 느긋하게 차를 들이켰다.

방일석의 걱정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인간의 마음은 같은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순리에 따르되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최선이었다.

***

오랜만에 무상문의 정문이 소란스러웠다.

그동안 함께 지내던 일급표사들과 쟁자수들이 떠나는 날이어서였다.

반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절대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기에 다들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특히 오랜 시간 벽에 막혀 있다가 절정고수가 된 일급표사들이 크게 아쉬워했다.

“문주님께서 내려 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두 번째 스승이라 생각하고 꼬박꼬박 연락드리겠습니다!”

“미력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라도 연락 주십시오. 언제라도 달려오겠습니다.”

사제지간은 아니었으나 반호진에게 받은 가르침이 적지 않다는 걸 일급표사들 모두가 알았다.

자신들이 얼마나 큰 행운을 거머쥐었는지를.

반호진은 자신이 크게 한 게 없다고 말했지만 일급표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을 위해 많은 걸 고심하고, 노력한 걸 잘 알고 있었다.

“흐어어엉! 보고 싶을 거야!”

“다음에 꼭 놀러 올게! 남창을 지나가게 되면 꼭 찾아올게!”

“그동안 잘 있어!”

“저기 누나……. 이거.”

어른들의 작별인사가 상대적으로 담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이들의 이별은 격정적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쟁자수들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중 몇몇은 얼굴을 붉히며 예유화에게 연서를 건네기까지 했다.

제 딴에는 은밀하게 건네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의 눈에 훤히 보였다.

“미안.”

거기다 예유화는 철벽까지 쳤다.

또래의 소년들에게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특유의 냉랭한 표정으로 연서를 거절했다.

“어어?”

“받아도 줄 수 없어?”

“이것도 안 되는 거야……?”

정말 큰 용기를 냈음에도 거절하는 예유화의 모습에 남자아이들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면전에서 거절할 줄은 몰라서였다.

그것도 헤어질 때이기에 예의상으로라도 받아 줄 거라 생각했는데 예유화는 단호했다.

아예 여지를 두지 않겠다는 듯이 누구의 연서도 받아 주지 않았다.

“미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다시 한번 확고하게 거절하는 예유화의 모습에 연서를 내밀었던 소년들이 울상을 지으며 물러났다.

그 모습에 연서를 준비하지는 않았어도 몰래 예유화에게 연심을 품었던 이들도 절망했다.

자신들의 처지도 형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어서였다.

“짜식들.”

“청춘이네, 청춘이야.”

“벌써부터 발랑 까져서는.”

어리지만 같은 남자로서 감정이입 하는 선우방, 서조운과 달리 모용척은 혀를 끌끌 찼다.

재능이 부족하면 죽어라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여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게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가 여인을 좋아하는 게 본능이라지만 그래도 무릇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었다.

아이들은 딴 데 신경 쓰지 말고 죽기 살기로 노력해야 했다.

“척이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웃기는데?”

“적어도 저는 여자한테 빠져서 헬렐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긴 한데 너와 저 아이들은 상황이 다르지. 명문세가의 차기 후계자와 쟁자수라니. 절대 같은 선상에 놓을 수가 없지. 게다가 여동생이 백봉인데 어떤 여인에 눈에 차겠어?”

선우방의 말에 서조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말에는 십분 동의할 수 있어서였다.

“여자 얼굴 얼마 안 갑니다. 아무리 예쁜 얼굴도 시간이 흐르면 적응이 돼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넌 여자 외모 아예 안 본다고?”

“어떻게 아예 안 봐요?”

“거봐.”

29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