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4장. 풍운무림(風雲武林). -01
“고맙구나. 그리고 미안하다. 너희들도 고생했는데…….”
서운했을 법도 하건만 도리어 씩씩하게 대답해 주는 쟁자수들의 모습에 방일석은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래서 더더욱 강하게 아이들의 손을 잡아 주었다.
“힘들긴 했는데, 재미있었어요.”
“진짜 좋은 추억이었어요.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그래?”
짧게나마 아이들과 대화하던 방일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호진의 성격을 생각하면 힘든 건 당연했다.
그런데 재미있었다고 하자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매일 지루한 기본기 훈련과 체력단련만 했을 텐데 재미있었다고 하니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또 오고 싶어요. 일급표사가 되어서요.”
“녀석들.”
나이는 어려도 엄연히 청림표국에서 일하는 만큼 아이들도 알고 있었다.
절정의 벽을 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이런 결과는 말이 안 되는 것이기에 방일석은 아이들의 욕심을 이해했다.
또한 욕망이 있어야 발전도 있는 만큼 이 정도 욕심은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그래.”
아이들에게 사과 겸 독려를 마친 방일석을 데리고 반호진은 응접실로 향했다.
결과를 보여 주었으니 이제는 성과급에 대한 얘기를 할 차례였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방일석이 누가 봐도 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호진아. 우리 장기계약 맺자!”
“우선 차부터 드시죠.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안 급할 수가 있겠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냈는데?!”
점점 더 높아지는 방일석의 목소리와 달리 반호진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칼자루를 그가 쥐고 있기에 급할 게 없었다.
“운이 좋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다음에도 이럴 거라고 장담 못 합니다.”
“맞아. 쉽지 않은 일이지. 근데 중요한 건 이미 한 번 해냈으니 다음번에도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는 거 아냐?”
“초일류의 경지에서 끝에 다다른 표사들이 많으십니까?”
“어…….”
반호진이 따라 준 차에 시선도 한 번 주지 않고서 말을 잇던 방일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너무 결과에만 빠져 허우적거렸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절정고수도 드물지만 벽을 마주한 일급표사들의 숫자도 그리 많지 않았다.
현재 무상문에 있는 서른세 명도 겨우겨우 모아서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전 또 하겠다고 말한 적 없습니다.”
“알지. 나도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이렇게 말을 꺼낸 것이고. 결정권은 너에게 있으니까.”
“표국주님과는 논의가 안 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모르지. 예상도 못 하고 있을 테고. 나도 아마 직접 보지 못했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거야. 절정고수가 뉘 집 똥개 이름도 아니고. 근데 선 조치 후 보고라는 게 있잖아. 내가 그 정도 할 수 있는 위치는 돼. 그러니까 사제만 수락하면 된단 말이지.”
방일석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수락만 한다면 당장 계약서를 쓰고 싶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반호진은 급할 게 없었다.
“천천히 생각해 보죠. 시간은 많지 않습니까.”
“역시 당장은 생각이 없나 보구나.”
“예. 저나 방이, 그리고 동생들에게 좋은 경험이 된 건 맞습니다만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지.”
방일석은 입맛을 다셨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반호진은 급하지 않았다.
굳이 청림표국과의 계약이 아니더라도 반호진이 축적한 재산은 상당했다.
아무렇지 않게 무상문을 개파할 정도로 말이다.
“청림표국도 신경 쓸 일이 많지 않습니까. 절정고수가 되었다고 끝이 아니니까요. 그저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맞는 말이기는 한데, 막 발을 디뎠다고 해도 절정고수는 절정고수야. 고급인력이란 말이지. 너에게 배웠으니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가 되기도 하고.”
“그만큼 계속 붙잡고 있기도 힘들 테고요.”
“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설마 하니 우리가 그 정도 안전장치 하나 안 해 두었을까. 너에게 보내기 전에 다 계약서 다시 썼어. 앞으로 십 년 동안은 청림표국에서 일해야 해.”
“하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십 년이라는 시간이 상당히 길어 보이지만 청림표국의 입장을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었다.
잘 키워서 남에게 주면 그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었다.
그렇다고 일급표사들이 손해인 것도 아니었고.
절정고수가 된 만큼 대우를 받을 것이고, 직위도 오를 터였다.
“맞아. 게다가 가르쳐 주는 무인이 보통 무인이야? 아마 네가 문도를 받겠다고 하면 중원 전역에서 수천 명이 몰려들걸?”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글쎄. 난 그럴 거라고 보는데. 아마 나이, 성별을 막론하고 엄청 올 거야. 무인뿐만 아니라 표사들과 어린애들, 상단에 소속되어 있는 무사들까지. 거기에 이번 일까지 알려지면 더할걸?”
방일석 역시 절정의 벽에 막혀 몇 년간 정체되어 있던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절박한 그 심정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천재들이야 절정의 벽 따위 느끼지도 않고 그냥 지나친다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은 평범한 무재를 가지고 있기에 모두가 한 번씩은 좌절했다.
“저에게는 썩 좋지 않은 이야기네요.”
“우리에게도 말이지. 이 소식이 알려지면 우리도 좋을 게 없어. 경쟁보다는 독점이 훨씬 좋으니까. 사제의 입장에서는 경쟁이 좋겠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하긴. 사제의 성격을 생각하면 뭐. 돈이 궁한 것도 아니니까. 근데 얼마 안 가 알려질 거야. 갑자기 절정고수 서른셋이 뚝 하고 떨어졌는데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지.”
“그렇겠죠.”
반호진도 알고 있었다.
숨기고 싶다고 해서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만 이로 인한 여파가 크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래도 거절은 아니지?”
“예. 나름 저에게도 이득이었거든요. 일행들도 마찬가지고. 방이나 척이, 의성이는 향후 일가의 수장이 될 사람들이라.”
“그러네.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됐겠어. 모용 공자는 조금 의외지만. 자기만 안다고 알려졌는데.”
“아직 성격이 충분히 바뀔 수 있는 나이이니까요.”
“천만다행이지. 그렇게 따지면 사제는 모용세가의 은인이고.”
방일석은 절대 서두르지 않았다.
처음의 성급한 모습도 어느 정도 진심이긴 했으나 반은 계획적이었다.
자신을 비롯해서 청림표국이 이렇게나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걸 표현한 것이었다.
이왕이면 다른 곳보다 청림표국을 먼저 기억해 달라고 말이다.
“제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철이 들었을 겁니다.”
“십 대 후반의 일 년과 이십 대 후반의 일 년은 완전히 다르잖아. 몸 자체가. 경지가 아무리 높아져도 육신이 젊어지지는 않으니까. 감각도 그렇고. 둔해지는 건 금방이지만 예민해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까.”
“그렇긴 하지요.”
“그러니까 사제가 은인이지. 모용 공자의 삶 자체가 달라진 거니까. 그보다 소식은 들었어?”
“어떤 소식요?”
너무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좋지 않았기에 방일석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개인적으로 반호진에게 알려 주고 싶기도 했고.
“남쪽에 대한 소식.”
“사도문파들의 수장들이 자주 모인다는 소식요?”
“역시 알고 있었네?”
“자세히는 모르고 지나가는 식으로 몇 번 듣기는 했습니다.”
“그럼 천사맹(天邪盟)이 발족한 건 모르겠네?”
반호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사도무림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말은 들었지만 천사맹이라는 이름으로 뭉칠 줄은 몰랐기에 반호진은 진심으로 놀랐다.
“천사맹이요?”
“그래. 사사혈천교(邪邪血天敎)를 중심으로 중원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사도문파들이 모였다고 해. 그런데 문제는 천사맹만이 아니야. 이 녀석들이 미리 말을 맞췄는지 마인들도 마도련(魔道聯)이라는 이름하에 집결했어.”
“천하삼분지계인가요.”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백도무림을 견제하기 위해 천사맹, 마도련을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그게 꼭 위, 촉, 오의 천하삼분지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제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새외무림과의 연이은 전쟁으로 백도무림의 힘이 약화된 건 사실이니까. 솔직히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어?”
“노릴 만한 시기이기는 하죠.”
방일석의 말대로였다.
새외무림을 상대로 승리하긴 했으나 백도무림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다.
단순히 숫자로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니 사도무림과 마도무림이 놓치기는 아쉬웠을 터였다.
“백도무림이 힘을 축적한 만큼 마도무림과 사도무림도 마찬가지니까. 다만 백도무림의 힘이 강성해서 쥐 죽은 듯이 있었던 건데 그 힘이 약해졌으니 이제는 싸워 볼 만하다는 거지. 영악한 녀석들.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들도 골치를 썩고 있어. 말이 통하는 녀석들이 아니니까.”
방일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확 늘어난 절정고수들로 인해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래서 더 기뻐하셨군요.”
“엄청난 전력상승이니까. 아마 표국주님도 이 소식을 들으면 덩실덩실 춤을 추실걸. 절정고수면 표두급의 실력자니까. 절정의 초입이긴 해도 절정고수는 절정고수지.”
“천사맹과 마도련의 총본영은 어디입니까?”
“광서성과 광동성이야.”
“자리를 잘 잡았네요.”
반호진의 중얼거림에 방일석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중원의 최남부라 할 수 있는 성이기에 변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연히 중원이라 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또한 백도무림의 영향력이 미약한 곳이기도 했다.
“내가 그래서 영악하다고 한 거야. 아주 계획적이거든. 분명 새외무림과 싸우고 있을 때부터 물밑작업이 들어갔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할 수 없어.”
“또 전쟁이군요.”
반호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전쟁이 발발하자 반호진은 머리가 아팠다.
“그러게나 말이다. 평화롭게 살면 얼마나 좋아? 그놈의 욕심은…….”
“장문인들과 가주님들의 머리가 복잡하겠네요. 천사맹과 마도련의 등장으로.”
“넌 알고 있는 게 전혀 없나 보네?”
“전 그럴 만한 급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방일석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력으로 따지자면 무상문은 무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명의 무인으로 따지면 현재 무림에서 반호진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존재는 몇 없었다.
현재도 강하지만 앞으로 더욱 강해질 무인이 반호진이었기에 방일석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직 중원무림에 대해 논의할 만한 배분은 아니라는 거죠.”
“위상은 충분하게 있지. 근데 네가 관심이 없는 거지.”
“사실 제 나이면 그냥 어르신들에게 맡기는 게 맞지 않습니까.”
“뭐, 그렇기는 하다만.”
방일석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기도 애매모호했다.
“중원무림을 늘 걱정하시는 분들이시니 좋은 방안을 찾아낼 거라 생각합니다.”
“자기는 안 나서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선배들도 계시는데 제가 주제넘게 나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참나.”
방일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새외무림과 싸울 때 보여 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발언을 해서였다.
그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새외무림을 쓸어버린 게 반호진이었다.
가장 큰 활약을 하기도 했고.
‘근데 그게 비정상이기는 하지. 원래 이런 반응이 정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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