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86화 (286/468)

제 93장. 결국 만류귀종(萬流歸宗). -01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문주님!”

적당한 거리를 벌리고 집결한 아이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다들 지친 기색이 완연했지만 그럼에도 얼굴은 밝았다.

무상문에서 생활한 지는 꽤 됐음에도 이렇게 반호진을 마주한 게 드물었기에 모두 눈빛들이 초롱초롱했다.

“다들 오랜만이라고 서운해하지는 않는 것 같네.”

반짝이는 눈빛들을 마주하며 반호진이 씨익 웃었다.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일급표사들만 신경 쓴다고 섭섭해할 수도 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는 없는 듯했다.

“서운하기는요! 잘 배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주님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누가 사회생활 하는 아이들 아니랄까 봐.”

아부가 그냥 철철 흐르는 몇몇 대답에 반호진이 실소를 흘렸다.

반대로 모용척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첨이나 아부는 그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에헤헤헤.”

“솔직히 말해 봐. 힘들지?”

“어…….”

아이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어색한 미소가 맺혔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고나 할까.

“원래 체력을 키우는 게 힘들어. 노력한 만큼 팍팍 늘지를 않으니까. 더구나 지루하기까지 하지. 나도 해 봐서 잘 알아. 너희들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진부하게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말은 안 하마. 이미 수도 없이 들었을 테니까. 대신 이렇게 해 보자.”

“어떻게요?”

“이왕 하는 거 재미있게 하면 좋잖아? 더구나 인원도 많고. 숫자도 딱 떨어지게 오십 명이니까.”

아이들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서렸다.

재미라는 두 글자에 이미 넘어간 것이었다.

그리고 모용척도 짐짓 궁금하다는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스물다섯 명씩 나누면 되나요?”

“응. 그래서 한 조는 군졸, 다른 한 조는 도둑이 되는 거지. 여기에 일정 구역을 뇌옥으로 지정해서 군졸은 도둑들 잡아 가두는 거야. 물론 가둔다고 해서 끝이 아니야. 뇌옥을 지키는 군졸을 피해 동료를 구출할 수도 있지. 군졸이 도둑을 다 잡아서 가두면 군졸의 승리, 도둑이 약속된 시간까지 한 명이라도 버티면 도둑의 승리. 물론 역할은 바꿔 가면서.”

“일종의 술래잡기네요?”

“그렇지. 근데 그냥 하면 또 재미가 없으니까 내기를 걸어야겠지? 돈이나 물건은 좀 그렇고, 이마에 꿀밤을 놓는 거야. 일종의 벌칙으로.”

“오오오!”

술래잡기에서 이미 마음이 홀라당 넘어간 아이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트렸다.

확실히 꿀밤 정도라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평소에 얄미웠던 녀석을 정당하게 때릴 수 있기도 했기에 아이들은 묻기도 전에 다들 하겠다는 얼굴로 반호진을 바라봤다.

“다들 나쁘지 않은 모양이네?”

“할게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예상했던 것 이상의 열광적인 반응에 반호진은 씨익 웃었다.

확실히 놀이를 접목시키니 반응이 완전히 달랐다.

“다만 조는 날이 바뀌면 섞는 걸로 하자. 매번 같은 사람들과 조를 이루면 편이 나뉠 수도 있으니까. 이건 전쟁이나 싸움이 아냐. 놀이 겸 체력단련이지. 이걸 명심해야 해.”

“예!”

“자, 그럼 조를 나눠 볼까? 오늘은 가볍게 나를 중심으로 조를 나누자.”

자기들끼리 조를 짤 수 있게 하면 알게 모르게 소외당하는 아이도 있을 수 있었기에 반호진은 자연스럽게 자신을 중심으로 조를 나누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벌써부터 놀이에 심취했는지 승부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상대 쪽 진영을 노려봤다.

“제한 시간은 반 시진. 그럼 어디가 군졸을 할래?”

“저희요!”

“너희는?”

“그럼 저희는 도둑을 할게요.”

다행히 선택이 갈리자 반호진이 중재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반호진은 소천검을 뽑아서 바닥에 원을 그렸다.

스물다섯 명이 다닥다닥 붙어야 겨우 들어갈 크기였는데 일부러 작게 그린 것이었다.

아무래도 공격하는 쪽보다 지켜야 하는 쪽이 힘든 게 당연하기에 일부러 살짝 비좁게 만들었다.

“우와!”

“이기어검을 직접 목도할 줄이야…….”

그런데 아이들은 뇌옥이 될 공간보다 원을 그리는 소천검에 시선을 빼앗겼다.

반호진이 이기어검으로 뇌옥을 그리자 다들 눈이 몽롱해졌던 것이다.

보고 싶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기에 몇몇 아이들은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아깝다는 듯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도둑들에게는 반 다경의 시간이 주어질 거야. 도망치거나 숨을 시간이 필요하니까. 단, 범위는 지정할 거야. 도둑에게 너무 유리해지면 안 되니까. 도둑들이 도망치는 사이 군졸들은 뇌옥을 지킬 간수를 좀 뽑아 놓고. 아니면 전략을 짜도 되고.”

도둑이 된 아이들이 도망치는 걸 지켜보던 군졸 역할의 아이들이 눈을 빛냈다.

단순히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작전을 짤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집중도가 달라진 것이었다.

게다가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만큼 맞춤 작전을 짜기도 수월했다.

타다다닷!

잠시 후 반 다경이 지나자 스물다섯 명의 아이들이 일제히 땅을 박찼다.

도둑들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해 질주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모용척이 실소를 흘렸다.

“아주 목숨 걸고 하네요.”

“이겨야 하니까. 벌칙도 확실하고. 맞는 것보다는 때리는 게 낫잖아?”

“진짜 묘안인 것 같아요. 군졸은 도둑을 잡기 위해 미친 듯이 뛸 테고, 반대로 도둑은 안 잡히기 위해서 계속 도망칠 테니까요. 숨거나 뇌옥에 갇히면 적당히 쉴 수도 있고. 또 조로 나뉘어져 있으니 협동심도 길러질 테고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모용척은 정말 체력을 기르기에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릇 어떤 일이든 강제로 하는 것보다는 자발적으로 하는 게 효율이 훨씬 좋았다.

더구나 사내아이들인 만큼 한창 놀이와 승부에 목숨을 걸 때였다.

“내 생각은 그런데, 며칠은 지켜봐야지. 효과가 있나 없나. 또 남자애들만 있으니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야. 여자애들한테는 적용할 수 없어.”

“그렇긴 하겠네요. 근데 쟁자수는 전부 다 남자아이들이니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우아아악!”

“잡아! 길목을 막아!”

대화하는 사이 본격적으로 추격이 시작되었다.

처음 하는 놀이이지만 아무래도 기본 틀이 술래잡기라서 그런지 아이들은 순식간에 적응하는 걸 넘어 응용했다.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도망치거나 추격했다.

“집중력이 완전히 다르네요.”

“놀이도 잘 쓰면 훈련이 되기도 하니까. 더욱이 확실한 포상도 있고. 과열되지 않게만 만들어 주면 돼.”

“하루에 두 번 정도 하면 체력훈련은 끝나겠는데요.”

승부욕의 화신이 되어 날뛰는 아이들의 모습에 모용척이 씨익 웃었다.

일단 지금까지의 결과만 보면 대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심지어 딱히 농땡이를 피우는 애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알아서 잘 뛰어다녔기에 반호진의 말대로 분위기만 잡아 주면 될 듯했다.

“두 번으로 끝내면 안 되지. 체력은 좋으면 좋을수록 이득이니까.”

“열심히 굴리겠습니다!”

“다른 방법도 생각해 보고. 이 방법은 딱 저 나이대에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너도 나중에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가르쳐야 할 테니 고민해서 나쁠 건 없을 거야.”

“예!”

“그럼 난 간다. 수고해.”

아이들이 새로운 놀이에 잘 적응한 듯싶었기에 반호진은 몸을 돌렸다.

굳이 그가 끝까지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었기에 나머지는 모용척에게 맡겼다.

아이들에게도 신경을 쓰지만 반호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행복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

투둑. 투두둑.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정오가 다 되어 가는 시각에도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폭우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굵직한 빗줄기였는데 그럼에도 일급표사들은 연무장에 나와 있었다.

다들 비를 맞으며 묵묵히 서 있었던 것이다.

표사에게 눈이나 비는 익숙하기도 했고.

스윽.

그리고 비는 그들만 맞는 게 아니었다.

그들 앞에 서 있는 반호진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고뿔을 걱정하시는 분?”

“없습니다!”

“비나 눈은 친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반호진의 농담에 일급표사들이 씨익 웃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산적이 산적질을 하지 않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이 정도 비는 모두 익숙했다.

“오늘은 어제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 볼까 합니다. 마침 비도 오니 더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먹기에 따라 참 많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왕 내리는 비를 이용해 볼까 합니다.”

“흐으읍!”

빙긋 웃는 얼굴과 달리 반호진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는 압도적이었다.

지금까지 갈무리해 두었다는 걸 증명하듯 반호진이 제대로 기도를 개방하자 일급표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 정도로 반호진에게서 흘러나오는 존재감은 압권이었다.

단지 기도를 드러낸 것만으로 일급표사들의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말이다.

“버티세요. 오늘의 훈련은 버티는 겁니다.”

“우웁!”

“큽!”

반호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급표사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반호진의 말대로 버티는 것조차 힘겨웠다.

덜덜덜!

마치 누군가가 어깨를 있는 힘껏 찍어 누르는 듯한 중압감에 하나둘 다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버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몸은 주인의 의지를 배반했다.

아무리 다리에 힘을 줘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으드득!

몇몇 이들은 공력을 극성까지 일으켰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더 큰 좌절감만이 엄습해 올 뿐이었다.

무림에서 절대고수의 위치에 있는 반호진인 만큼 실력 차이가 어마어마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심적으로 이렇게 처참하게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이게 절대고수.’

‘이 모습이 문주님의 진짜 모습이구나.’

다들 이를 악문 상태로 감탄했다.

새삼 절대고수의 힘을 느낄 수 있어서였다.

만약 반호진이 지금 검을 휘두른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죽을 터였다.

“정신 차리십시오.”

감탄도 잠시 무지막지한 반호진의 존재감에 하나둘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체력적으로 힘든 건 하나도 없었지만 문제는 정신적인 부분의 타격이 크다는 것이었다.

사납게 찍어 누르는 존재감에 하나둘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반호진이 노리는 것이었다.

털썩. 털썩!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무릎을 꿇는 이들이 속출했다.

절정의 벽을 앞두고 있다고 해서 서른세 명 모두가 똑같은 수준인 건 아니었다.

또한 지니고 있는 공력의 총량도 각기 달랐으나 반호진에게는 거기서 거기였다.

높은 산의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웬만한 구릉들이 고만고만해 보이는 것처럼 반호진도 마찬가지였다.

“끄으응!”

점점 더 약해지기는커녕 더욱더 묵직해지는 중압감에 여기저기에서 억눌린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반호진이 극한으로 몰아붙이자 다들 정신을 반쯤 잃은 상태였다.

비가 쏟아지는 걸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반호진은 기도를 거두지 않았다.

‘슬슬 한 명 정도는 나올 때가 되었지.’

반호진이라고 해서 모든 무인들을 절정고수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런 방법을 알지도 못했고.

결국 벽을 부수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남이 부숴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인도는 어느 정도 해 줄 수 있었다.

길을 잡아 주고 도와주는 것 정도는.

“흐으읍!”

“호오.”

뒷짐을 지고 있던 반호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곳에서 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서였다.

무언가가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느낌에 반호진의 시선이 움직였다.

28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