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장. 내 사람. -04
무미건조한 목소리였지만 소년은 느낄 수 있었다.
음성 저변에 깔려 있는 분노를 말이다.
평범한 무인이라 하더라도 끔찍한데 그에게 분노한 이는 천하십대고수에 비견되는 반호진이었다.
향후 십 년 안에 천하제일인이 될 거라고 예상되는 무인인.
그렇기에 소년은 오금이 저려 왔다.
동시에 곳곳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
“헙!”
든든하게 그의 뒤를 지켜 주었던 패거리들이 하나둘 바닥에 주저앉는 소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억눌린 듯한 신음 소리도 들렸다.
반호진이야 원래부터 무표정했기에 딱히 특별할 게 없었지만 선우방은 달랐다.
곽춘보다 더 어린 애들을 인질 삼아 협박하는 모습에 격노하며 무시무시한 기세를 흩뿌리고 있었다.
덜덜덜……!
살기는 아니었으나 소년에게는 살기나 다름없었다.
그 정도로 선우방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흉포했다.
“하오문이 청소를 덜 했을 리는 없으니 내가 다시 해야겠어.”
“아직 아이들인데? 개과천선의 여지가 있지 않겠어?”
소년 일당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개과천선이라는 말에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더욱이 반호진과 선우방은 엄연히 백도무림에 속해 있는 무인들이었다.
그렇기에 소년들은 진심으로 기대하고 기원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미 글러 먹었어. 그리고 고쳐 쓰는 것보다는 버리고 새로 사는 게 훨씬 낫다.”
“그렇긴 하지.”
소년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지금의 한마디로 자신들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어서였다.
“이런 악질들이 개과천선할 것 같지도 않고. 앞에서나 질질 짜고 굽실거리지 다른 곳에 가면 지금보다 더할 거야. 안 그래?”
선우방의 시선이 모여 있는 곽춘, 한륭, 황동오 삼인방에게로 향했다.
비록 두들겨 맞을지언정 함께하겠다는 듯이 뭉쳐 있던 세 아이가 고개를 동시에 끄덕였다.
셋 다 선우방과 같은 생각이었다.
“거기다 어린애들을 인질로 잡을 생각까지 한 녀석들이야. 죄질이 아주 더러워.”
웬만해서는 흥분하지 않는 선우방이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리기에 더더욱 그를 분노케 했다.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어른보다 더한 짓을 저질렀기에 선우방은 더욱더 손을 확실하게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살려 주세요!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습니다!”
“워, 원하신다면 남창을 뜨겠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더러운 짓을 해 봤기에 소년 일당은 눈치챘다.
선우방의 두 눈에 찰나지만 살기가 서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낌새를 보아하니 거의 대부분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기에 일당들은 몸을 납작 엎드렸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마, 말씀하십시오! 뭐든지 다 대답하겠습니다!”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따위 짓을 하고도 내가 고용할 거라 생각한 거야?”
“그게, 그러니까…….”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는 촉새 소년이 말끝을 흐리자 반호진이 비릿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물쩍 넘어가려고 해도 그의 눈에는 다 보였다.
소년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내가 잡것들에게는 신경 안 쓸 것 같아서? 그럼 너한테도 신경을 안 쓸 텐데 왜 무공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도대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거야?”
“어…….”
“이미 흑도에 물들 대로 물든 건 같은데 백도에 들어오려는 것도 웃기고.”
고저 없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소년이 벌벌 떨었다.
무덤덤한 게 더욱 섬뜩하게 다가와서였다.
“저는, 그저…….”
“적당히 연기하면 신분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야? 날 대체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절대 아닙니다! 맹세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으려 했겠지. 아니면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는 머리일 수도 있고. 그런데 중요한 건 네 말마따나 현재이지. 지금 이 상황 말이야. 날 만만하게 봤고, 내 가솔을 겁박했지. 감히 목숨까지 위협하면서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쿠웅!
점점 더 싸늘해져 가는 눈빛에 소년은 오체투지 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마가 깨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연신 땅바닥에 박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촉새 소년을 시작으로 패거리 전부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반호진의 마음을 돌려 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간절한 소년들의 외침에도 반호진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너까지 나설 필요는 없어. 내 선에서 정리하마.”
“문주인 내가 나서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나는 뭐 식구 아니냐? 그리고 네 이름값을 생각해야지. 이런 자잘한 일까지 네가 할 필요는 없어. 사문도 생각해야지.”
“그건 신경 안 써도 되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선우방의 말에 반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좀 그래서였다.
진짜로 선우방이 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대협! 검룡 대협!”
“저희는 그냥 겁만 준……! 흐읍!”
소년 일당의 입이 한순간에 닫혔다.
더는 지껄이는 걸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선우방이 무서운 얼굴로 마혈과 아혈을 짚은 것이었다.
그러고는 노새가 끌고 온 짐수레에 패거리를 차곡차곡 쌓았다.
“이따 보자고.”
“응.”
삽시간에 일당들을 짐짝처럼 쌓은 선우방이 저잣거리를 가로질렀다.
반호진에게 말한 대로 확실하게 뿌리 뽑기 위해 조용히 대화를 하러 떠난 것이었다.
“화를 내시는 모습은 처음 봐요.”
“원래 착한 사람이 흥분하면 더 무서운 법이야.”
쌩하고 사라진 선우방의 모습에 곽춘이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한륭과 황동오도 마찬가지였다.
저렇게나 화를 내는 선우방의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둘 다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너희들이 알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좋아하기도 하고. 또 본보기로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있고.”
“나중에 감사하다고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렇게 해.”
자신들을 위해 이렇게 나서 준 게 고마운 모양인지 세 아이의 표정이 밝았다.
그러면서 내심 한숨도 쉬었다.
두 사람의 등장으로 다행히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아서였다.
“근데 문주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나들이 겸 나왔지. 너무 장원에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날도 좋아서.”
“아. 날이 좋기는 하죠.”
봄과 여름의 경계에 있는 듯한 날씨에 곽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반호진의 말대로 나들이하기에는 딱 좋은 날씨였다.
“근데 이런 꼴을 볼 줄이야.”
“죄송합니다. 못난 모습을 보였어요.”
“사과할 것까지는 아니고. 이런 일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저쪽에서 작정하고 달려드는데 어떻게 피하나. 일단 쪽수에서부터 밀렸잖아? 오히려 잘했어. 무상문 소속으로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힘이 없다고 굴복했으면 진짜 많이 실망했을 거야.”
“아.”
반호진의 말에 세 아이의 눈이 커졌다.
이렇게 말해 줄 줄은 몰랐기에 셋 다 놀란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말해 주고 싶은 건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나에게 바로 말해 줬으면 좋겠어. 괜히 마음고생하지 말고. 너희들도 무상문 소속이야. 내가 책임져야 하는 아이들이고, 내 사람이라는 뜻이지. 난 내 식구가 다른 곳에서 맞고 다니는 거 용납 못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무상문에 뼈를 묻겠습니다!”
큰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말이었지만 세 사람에게는 다른 모양인지 울먹거렸다.
가족 같은 곳이라고 말하는 곳은 많았지만 이렇게 반호진처럼 직접 보여 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가족처럼 대하겠다는 말을 악용해 막 굴리는 곳이 수두룩했다.
때문에 셋은 크게 감동한 얼굴로 반호진에게 매달렸다.
“열세 살이면 남자인데 울지 마라. 사내대장부는 꼭 울어야 할 때만 울어야 해. 그러니 다들 눈물 빨리 닦아. 울어도 남들이 못 보면 운 게 아니니까.”
“넵!”
“수레는 방이가 가져갔으니 일단 가장 중요한 것들부터 사자. 나도 도와줄 테니까.”
“아닙니다! 저희가 다 들 수 있어요! 아니면 지게를 빌리면 되고요.”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를 반호진은 아이들과 함께 가로질렀다.
그런데 분위기가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
특히 반호진을 대하는 태도가 말이다.
***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모용척이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전체적인 성장세가 나쁘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흡족한 수준은 아니어서였다.
기본기야 당연히 투자한 시간만큼 비례에서 성장세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나 체력은 예외였다.
굴리면 굴리는 대로 늘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성장세가 지지부진했다.
“헉헉헉!”
“으으! 왜 난 매일 해도 적응이 안 되는 걸까?”
“경로가 매번 다르니까. 게다가 일단 지칠 때까지 계속 뛰어야 하니 적응이 안 될 수밖에. 조금씩 거리가 길어지거나 경사가 높은 곳으로 가잖아.”
모용척이 미간을 좁힌 채로 아이들을 지켜봤다.
아이들이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건 모용척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한데 노력하는 것에 비해 체력이 좀처럼 늘지가 않았다.
“뭐가 문제지? 인원이 많아서 그런가?”
모용척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도 더 이상 제 잘난 맛에 살던 철부지가 아니었다.
반호진을 만나면서 겸손을 배웠기에 모두가 자신 같지 않다는 걸 잘 알았다.
천재보다는 범인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하지만 체력의 경우 재능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무공은 재능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체력은 재능보다는 노력과 근성, 끈기가 더 중요했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결국 돌고 돌아 모용척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고는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물론 그의 성격상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가능성은 열어 두었다.
흔히들 직접 익히는 것과 가르치는 건 영역이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오랜만이네.”
“형님!”
“답답하지?”
모용척의 옆으로 반호진이 다가왔다.
그가 자주 따라 하는 것처럼 뒷짐을 진 채 말이다.
가짜는 진짜를 따라 할 수 없다는 듯이 반호진의 자세에는 특유의 멋이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예. 이유를 모르겠어요. 애들은 진짜 열심히 따라오거든요. 대충대충 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어요.”
“그렇겠지. 그러니까 네가 답답한 거겠지. 만약 나처럼 설렁설렁 하는 애가 있으면 네 성격에 가만히 있겠어?”
“에이. 형님은 설렁설렁 하셔도 되죠. 지금까지 이룩하고 보여 주신 게 있는데. 그리고 지금도 수련할 때는 무시무시하게 하시잖아요.”
모용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말은 대충대충 살고 싶다고 했지만 거기에 무공은 논외였다.
평소에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은 거지 수련을 게을리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수련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니까. 무인으로서 최상의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그렇지요.”
“근데 저 아이들은 아니지. 표사가 되고자 하는 아이들이니까. 표사는 무공을 익혔지만 무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맞습니다.”
“그러니 조금 다르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모용척이 눈을 빛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해결책을 찾아낸 듯싶었다.
“어떻게요?”
“틀린 걸 알았으면 방향을 조정해야지.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한마디로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맞아. 그런 의미에서 애들 좀 모아 봐.”
“예! 모두 집합!”
반호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용척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그러자 체력 수준에 따라 삼삼오오 뭉쳐서 산속을 달리던 아이들이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 앞에 모여들었다.
2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