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림-284화 (284/468)

제 92장. 내 사람. -03

곽춘과 한륭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본능적으로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임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너는…….”

“야야. 오랜만에 봤는데 인상부터 쓰는 건 너무하지 않냐? 그래도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찍.

곽춘의 앞으로 허우대가 큰 소년 한 명이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 뒤로 하나같이 불량해 보이는 패거리가 따라왔다.

땅바닥에 침을 찍찍 내뱉으며 포위하듯 둘러싸자 한륭과 황동오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고 지낸 지는 꽤 돼도 친하지는 않은 걸로 아는데?”

“허어. 많이 컸다? 내 앞에서 이렇게 말대꾸를 하는 걸 보면. 눈도 똑바로 마주 보고. 이야~! 역시 뒷배가 든든하니까 겁도 사라지는 모양이야?”

“대단하다, 대단해!”

“부럽다! 나도 무상문에 들어가고 싶다!”

촉새처럼 나불거리는 소년의 말에 뒤에 있던 패거리가 이죽거리며 소리쳤다.

마치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말이다.

동시에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던 행인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패거리와 엮이기 싫다는 듯 멀찍이 떨어져서 걸어갔다.

“무슨 짓이지?”

“오랜만에 봤는데 왜 그렇게 날이 서 있어? 네 말대로 우리가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먹다짐을 할 사이는 아니잖아? 아, 말이 조금 헛나왔네. 나는 때려도 되지만 넌 안 되지. 내가 맞아 줄 생각도 없지만. 아차차. 무상문에서 무공을 배웠으니 좀 다르려나? 나같이 어설프게 무공을 익힌 놈팡이하고는 다를 거 아냐? 근데 좀 의문이 드네. 천하의 소림검신이 왜 네놈들한테 무공을 가르치지? 잡것들에게 말이야.”

소년이 얄미운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어떻게 하면 속을 살살 긁을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아는 듯했다.

“믿고 싶지 않으면 안 믿으면 되지. 그보다 비켜 줬으면 하는데. 우리는 할 일이 있어서.”

“아, 심부름? 그렇다면 당연히 비켜 드려야지. 다른 곳도 아니고 무상문의 일인데. 우리도 막을 생각은 없다고. 까딱 잘못해서 소림검신이 나서면 어떡해? 우리는 그냥 손짓 한 방에 뒈질 거 아냐?”

“이마에 구멍이 뚫리겠지.”

“근데 보고 싶기는 하다. 난 검강도 못 봤는데.”

패거리들이 맞장구를 쳤다.

근데 그게 곽춘에게는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여기서 무슨 꼴을 당해도 반호진이 나서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할 말 다 했으면 이제 비켜 줬으면 좋겠는데.”

“미안하지만 아직 본론은 꺼내지도 않아서. 나도 모르게 네놈들이 반가웠나 봐. 미운 정도 정이라고 하더니.”

“…….”

곽춘은 입을 다물었다.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진짜 많이 컸다니까. 예전에는 내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었는데. 그래서 손이 자꾸 움찔거리네. 서열정리를 다시 해야 하나 싶어서.”

“그것도 나쁘지 않지.”

“원래 개새끼는 때려야 말을 듣거든.”

“좀 고분고분하게 만들 필요가 있지.”

비슷한 또래이지만 하는 짓과 말투는 뒷골목 흑도무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위협하듯이 품속의 단검을 슬쩍슬쩍 내보이는 모습에 황동오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껏 보아 온 이들이라면 충분히 검을 휘두르고도 남아서였다.

“뒷감당, 할 수 있겠어?”

“네놈들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잡놈은 잡놈일 뿐이지. 신분상승은 개뿔. 개나 소나 신분상승이 가능한 줄 알아? 버러지로 태어나면 죽을 때도 마찬가지야.”

“웃기네.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얼른 용건이나 꺼내시지. 어쭙잖게 가식 떨지 말고.”

“이 새끼가.”

소년이 으르렁거렸다.

방금 전까지 이죽거리던 모습은 사라지고 얼굴 가득 표독한 기색이 서렸다.

열세 살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두 눈에 독기가 가득했으나 곽춘도 만만치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똥을 피하는 심정으로 대충 숙이고 들어갔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제야 좀 본심이 나오는 모양이네. 그러니까 얼른 말해. 이러는 거, 너답지 않잖아? 피차 꼴 보기 싫은데 빨리 끝내자고.”

“무상문에서 일한다고 겁을 상실했군.”

“반대로 너희들은 겁을 먹었고. 예전이었다면 뒤는 생각지도 않고 달려들었을 텐데 주둥이만 터는 걸 보니 무상문이 무섭기는 한가 봐. 하긴. 꼭 문주님까지 갈 필요 없지. 서 공자님이나 모용 공자님, 선우 공자님만 나서도 네놈들을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니까.”

“…….”

소년은 물론이고 포위하고 있던 패거리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하지만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곽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였다.

괜히 분풀이를 했다가 염룡과 검룡, 비룡이 뛰쳐나오면 죽음밖에 없기에 다들 죽일 듯이 쏘아보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얼른 말해. 시간 많이 흘렀다. 너희야 빈둥거려도 상관없지만 우리는 아니야. 늦으면 혼난다고.”

“……우리도 소개시켜 줘.”

“뭐라고?”

곽춘은 물론이고 한륭과 황동오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뜬금없이 소개를 시켜 달라고 하자 이제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였다.

“나도 무상문에서 일하고 싶다. 정확하게는 문도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곽춘이 실소를 흘렸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였다.

“왜 말이 안 되지? 네놈들이 하인이라면 나는 당연히 정식 문도로 들어가야지. 솔직히 무재는 네놈들보다 우리가 훨씬 나은데. 경험도 많고.”

“맞아 맞아!”

패거리들이 격렬하게 동조했다.

머리는 나쁠지 모르나 몸을 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게다가 잡일만 할 줄 아는 셋과 달리 그들은 나름 피 튀기는 실전도 겪은 인재들이었다.

“네놈들이 되는데 우리가 안 될 이유가 없잖아?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자리 좀 만들어 줘.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어처구니가 없네.”

“왜?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무상문 소속이니까.”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를?”

소년의 속내를 알게 된 곽춘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물론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굳이 남창으로 한정할 것 없이 중원 전역을 놓고 보더라도 반호진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을 테니까.

다만 곽춘이 어이가 없는 건 소년과 패거리가 뻔뻔해서였다.

“이것 참. 그래도 아는 사이라 좋게 좋게 하고 싶었는데. 역시 이렇게 되네.”

스슥!

달라진 소년의 분위기에 곽춘의 곁으로 한륭과 황동오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주먹을 쥐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 예상을 해서인지 둘 다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너에게나 좋게겠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말하마.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그러면 앞으로는 절대 너희들을 건드리지 않으마.”

“네놈 말을 믿을 바에는 지나가는 똥개를 믿겠다.”

“알량한 실력을 너무 믿는 것 같은데. 뭐, 좋아. 그럴 수 있지. 기본공이라고 해도 무상문의 무공이니까. 근데 동생들은?”

움찔!

소년의 마지막 말에 곽춘은 물론이고 한륭과 황동오가 몸을 떨었다.

빈말이 아님을 장담할 수 있어서였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분노가 치솟았다.

“이 새끼야! 우리 동생들이기도 하지만 네 동생들이기도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는데 왜 내 동생들이야? 어렸을 때 같이 자라면 다 형제인가? 그럼 여기 있는 형, 동생들도 내 형제겠네? 지금 같이 지내고 있으니까.”

부르르르!

평소답지 않게 흥분한 한륭이 잡아먹을 것처럼 소년을 노려봤다.

쓰레기라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기에 한륭은 대노한 표정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소년의 입가에 맺힌 비릿한 조소는 더 짙어졌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서로 좋게 좋게 가자고. 내 말대로만 하면 모두가 평안한데 왜 거절하는 거야? 내가 죽으라고 했어, 아니면 돈을 내놓으라고 했어? 그냥 노력 좀 해 달라는 거잖아? 그것도 너희들이 가장 잘하는 걸. 안 그래?”

“…….”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이참에 힘 좀 팍팍 써 줘. 이왕이면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면 좋잖아? 좋은 친구 나쁜 친구도 결국 친구야. 사이가 좋을 때도 있고, 안 좋을 때도 있는 법이지.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이지 않겠어? 잘 좀 해 줘 봐. 우리 그렇게 보답에 인색한 성격 아니다. 너희들이 잘해 주면 우리도 갚을게. 알았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는 곽춘을 향해 소년이 히죽 웃으며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점차 요구하는 게 많아졌다.

처음에는 자리만 만들어 달라고 하더니 은근슬쩍 고용이 성사되도록 힘써 달라는 말에 곽춘과 한륭, 황동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협박을 하는데 친구라고?”

“어허! 협박이라니. 그 무슨 섭섭한 소리야? 난 협박을 한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한 것뿐이지. 협박이랑은 엄연히 다르지. 내가 네 동생들을 때린다고 했어, 아니면 죽인다고 했어? 그냥 동생들 안부를 물은 게 다지. 근데 내 말을 네가 넘겨짚은 거지.”

으드득!

얄밉다 못해 교활한 소년의 말에 곽춘이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분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의도가 명백하기는 하나 어느 곳에서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아, 생각해 보니 다른 방법도 있네. 원래 일하던 이들이 일을 못 하는 상황이 되면 사람을 다시 뽑지 않겠어?”

“……그게 너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안 될 것도 없지. 원래 일하던 사람의 추천이라면.”

소년이 음흉하게 웃었다.

대놓고 곽춘과 황동오, 한륭의 전신을 훑으면서 말이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무슨 의미인지는 세 사람에게 명확하게 전달이 되었다.

“그럴 일은 없다. 소개도 해 줄 수 없고.”

“이런이런. 결국 이렇게 파국으로 치달아 가는 건가. 애석하군. 난 정말 이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는데. 우리는 충분히 서로에게 이득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데 말이지. 아니면 욕심 때문인가? 네 무리들만으로 꿀을 쪽쪽 빨겠다는?”

상대를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리는 특유의 화법이었으나 곽춘은 흥분하지 않았다.

원래 이런 성격이라는 걸 잘 알아서였다.

이미 수십, 수백 번 겪은 걸 넘어 안 좋은 쪽으로 당해 보기도 했고.

“이야. 이제는 내 말도 씹어 버리고. 무상문이라는 후광이 대단하긴 한가 보네. 아, 염룡과 비룡, 검룡도 운운했었지? 네깟 놈이 뭐라도 된 것처럼. 뭐, 이제는 상관없지만. 네 녀석들의 선택으로 아마 많은 아이들이 울게 될 거야. 그리고 모든 원망은 너희 셋에게로 향하겠지.”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대놓고 협박이라. 흑도무리를 치웠더니 별 시답잖은 것들이 날뛰는구나.”

“문주님!”

저벅저벅.

소년은 물론이고 포위하고 있던 패거리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문주님이라는 세 글자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서였다.

동시에 묘하게 선명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애들의 세계도 만만치 않다고 듣긴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가족을 인질로 잡고 협박할 줄이야.”

반호진과 함께 나타난 선우방의 눈빛이 싸늘했다.

북풍한설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차가웠는데 그 시선이 닿자 소년들은 하나같이 몸을 떨었다.

서늘한 눈빛이 목을 베고 지나가는 것 같아서였다.

“처처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닥쳐.”

“예에?!”

“귀가 먹지는 않은 것 같은데. 주둥이 닥치라고.”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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