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장. 내 사람. -02
스윽.
자리에서 일어난 반호진은 서랍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그리고 그걸 유호량의 앞으로 내밀었다.
“호천심공(護天心功)?”
“추후 본문의 호법이 되실 몸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본문의 무공에 대해 알고 계셔야지요. 물론 지금까지 익힌 무공을 버릴 수는 없으니 필요한 부분만 참고해서 흡수하시죠.”
“감사합니다.”
“제가 검객이라서 그런지 아직 도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은 심법과 경신술부터 확인하시죠. 경신술은 현재 익히고 있는 내공심법과 반발이 없다면 그대로 익히면 되고,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지금 익힌 경신술에 접목해서 발전시키면 될 겁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유호량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었는데 그게 바로 이것이었다.
자신이 없는 그와 달리 반호진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저는 좋은 사부도, 특별한 재능도 없는 사람이니까요. 열심히 노력하기는 했지만, 세상은 단순히 노력한다고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요.”
“맞습니다. 노력과 결과는 절대 비례하지 않지요. 그런데 혹 이렇게는 생각 안 해 보셨습니까? 아무것도 없이 검기성강의 경지에 오른 게 유 소협입니다. 혼자의 힘으로 지금의 경지를 이룩했지요. 그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고요.”
“……!”
유호량의 두 눈에 힘이 서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반호진이 그의 노력을 인정해 주자 감격한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말일지 모르나 적어도 지금의 그에게는 달랐다.
그 어떤 칭찬보다 크게 다가왔다.
“스스로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아마 모든 무인들이 마찬가지일 겁니다. 성장세가 완화되며 언젠가는 정체기가 오지요. 혹은 퇴보하는 경우도 있고요. 아마 그걸 걱정하시는 거라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나이는 그보다 한참 어릴지 모르나 반호진은 천하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그것도 향후 십 년 안에 천하제일인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무인이 바로 반호진이었다.
그런 반호진의 말이었기에 유호량은 눈곱만큼도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듯이 말하기도 했고.
“그럼에도 무인은 나아가야 합니다. 정체된 것 같아도, 퇴보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포기하는 순간 거기가 끝입니다. 시작하는 것도, 마무리를 짓는 것도 결국 본인이거든요. 그리고 노력은 언제나 바라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배신하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유 소협은 이제 혼자가 아니지 않습니다.”
“아!”
“유 소협은 혼자서도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제가 있고 상승의 무공이 있습니다. 한데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꾸욱!
유호량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말을 듣는 순간 본능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최선을, 아니. 죽어라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 보겠습니다.”
“그 각오면 뭐든지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저를 믿어 주셔서, 그리고 손을 내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한 가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궁금한 게 있어서요.”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표정으로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유호량의 모습에 반호진이 운을 띄웠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이고 궁금한 건 궁금해서였다.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이라면 다 하겠습니다.”
“조금 늦은 감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궁금해서요. 사실 많이 놀랐거든요. 본문에 들어오겠다고 하셔서.”
“말이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오늘 시간 많습니다. 저 없다고 해서 본문이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요.”
규모는 작았지만 나름 알찬 곳이 바로 무상문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말하며 어느새 다 비어 있는 유호량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이십 대 때는 혈기가 왕성해서 그런가. 그냥 강호를 돌아다니는 게 좋았습니다. 비무도 하고, 세상도 보고. 경험도 쌓고요. 그게 낭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고요. 그런데 서른 살이 넘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흘러간 청춘이 아쉽지는 않지만 현재가 너무 외롭다고요.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연락을 주고받는 이는 있지만 친우나 벗이라고 할 만한 이들은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제가 강호명숙인 것도 아니고, 무명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딱히 갈 수 있는 곳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외로움이 마음의 병이 된 것 같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무작정 무림을 배회하다가 남창까지 흘러왔고, 문주님께서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소식을 저잣거리에서 우연히 들었습니다.”
미리 예고한 대로 유호량의 말은 길었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호량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깊게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으셨던 모양이네요.”
“예.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시는 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도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랬었고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정착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저에게 이 책을 주셨을 때요.”
“지금도 가지고 계시는군요.”
반호진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유호량의 품속에서 그가 준 책이 나와서였다.
얼마나 보고 또 봤는지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많이 닳아 있었다.
“저에게는 보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막막한 저에게 한 줄기 빛이기도 했고요. 그래서인지 욕심이 조금씩 생겼습니다. 문주님께서 받아 주신다면 정착하고 싶다고요. 이게 얼마나 주제넘은 생각인지 알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말을 꺼내고 싶었습니다. 말도 꺼내 보지 못하고 떠나면 그게 더 후회될 것 같았거든요.”
“잘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절대 문주님과 본문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려면 진짜 많이 노력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에게 자주 찾아오셔야 하고.”
결연한 표정의 유호량을 바라보며 반호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이제는 한 식구이지 않습니까. 물론 준비는 철저하게 해 오셔야 합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 꿈 중 하나가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이거든요.”
농담이지만 진담도 어느 정도 섞여 있다는 걸 눈치챘기에 유호량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반호진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무작정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공에 관해서는 집요할 정도로 철두철미하다는 걸 알아서였다.
당장 일급표사들을 가르칠 때만 하더라도 반호진에게 대충이란 단어는 없었다.
“저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든든하네요. 도법은 완성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연구를 해야 해서 정확히 언제까지 가능하다고 말씀은 못 드리는데,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천천히 해 주셔도 됩니다. 무공을 창안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저도 이 두 무공을 연구할 시간이 필요하고요.”
막막한 가운데 빛나는 길을 발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내공심법과 경신술은 그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 게 분명했기에 유호량은 다짐했다.
반드시 해내겠다고 말이다.
자신과 무상문, 그리고 반호진을 위해서.
***
작은 수레를 끄는 노새의 고삐를 손목에 두어 번은 감은 상태로 곽춘은 저잣거리를 살폈다.
황매향이 사 오라고 했던 품목들을 곱씹으며 머릿속으로 경로를 짜는 것이었다.
최단거리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게 현재 곽춘의 목표였다.
“오늘은 사람이 많네.”
“그러게. 사람이 몰리는 때가 아닌데.”
곽춘의 좌우에서 나란히 걷던 한륭과 황동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오전부터 행인들이 많아서였다.
일부러 시전이 한가할 때를 맞춰서 나왔는데 골목을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자 둘 다 걸음을 조심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부총관님이 사 오라고 한 것만 후딱 사고 들어가자. 할 일이 많아.”
“다른 애들도 같이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간식도 좀 먹고.”
“사 가면 되지. 수레도 있잖아.”
눈치 없는 황동오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곽춘과 한륭이 황동오를 째려봤다.
“입이 몇 개인데? 우리만 몰래 먹자고?”
“어…….”
“차라리 안 먹는 게 낫지.”
“그, 그런가.”
무상문에서 하인으로 일하게 되면서 주머니 사정이 많이 나아진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버는 건 아니었다.
각자 쓰는 돈도 있고, 동생들을 위해 쓰는 돈도 있었기에 여유가 좀 생긴 거지 생활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걸 황동오도 알고 있었기에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오늘은 할 일이 많아. 병아리랑 새끼 오리들도 따로 분리해야 하고, 망아지랑 송아지도 곧 태어나니까 미리 준비해 둬야 해.”
“여름이 다가오니 할 일이 태산이네. 표사분들이랑 쟁자수들도 엄청 먹는데.”
황동오가 하소연하듯 입을 열었다.
일이 없어서 눈치 보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너무 많았다.
가장 좋은 건 일이 적당히 있는 것인데 한동안은 바쁠 수밖에 없기에 황동오는 한숨을 쉬었다.
“힘들면 그만두면 돼.”
“넌 무슨 말을 해도 그렇게 살벌한 말을 해? 무상문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다고?”
툭 내뱉는 한륭의 말에 황동오가 펄쩍 뛰었다.
힘든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남창에서 무상문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는 걸 그도 알고 있어서였다.
나가라고 해도 어떻게든 매달려야 하는 곳이 무상문이었기에 황동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알고 있으면 군소리하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해. 문주님께서도 많은 걸 안 바란다고 하셨잖아. 해야 하는 일만 잘하면 된다고.”
“근데 그럴 수가 있나. 자칫 잘못하면 짤릴 수도 있는데. 난 절대 그냥은 못 나가. 문주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면서 매달릴 거야.”
“퍽이나 가능하겠다. 문주님 근처에도 못 갈걸.”
한륭의 독설이 황동오의 심장에 박혔다.
말수는 적지만 입을 열면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게 한륭이었다.
“나도 아는데. 꼭 그렇게 말을 해야 했냐.”
“사실이니까.”
“가슴에서 피 난다. 그만해.”
“안 나는데.”
마지막까지 비수를 꽂아 버리는 한륭의 말에 황동오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곽춘이 보기에는 자업자득이었다.
“됐고, 일단 포목점부터 가자. 부총관님이 옷감을 넉넉히 사 오라고 하셨어. 이곳에서 가장 가깝기도 하고.”
“부총관님이 옷은 진짜 잘 만드시는 것 같아. 특히 무복이랑 경장.”
“이번에 문주님께서 입을 무복을 만드신다고 하시더라. 매일 흑의무복만 입으셔서 청색 중에 가장 고급스러운 옷감으로 사 오라고 하셨어.”
“거의 돌려 입는 편이시기는 하지.”
한륭이 반호진을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생각해 봐도 반호진이 늘 입는 건 흑의무복이었다.
때가 덜 탄다는 이유로 반호진은 언제나 흑의무복만 돌려서 입었다.
“푸른색이 잘 어울리실지 모르겠네.”
“우리야 시키는 대로만 사 가면 되지. 일단 점원에게 물어보자. 부총관님이 따로 옷감을 부탁해 놓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어이! 오랜만이다?”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