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장. 내 사람. -01
신중한 예유화와 달리 쌍둥이 형제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내공 사용을 금제당했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씩 다 쓰러뜨리기도 했고.
“그때 가서 생각해 본다고? 이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예유화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대책도 이런 무대책이 없어서였다.
자신감이 있는 건 좋았으나 그게 자만으로 변해서는 안 되었다.
분명 두 형제는 재능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기고만장할 정도는 아니었다.
“산술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누나.”
“각자 열일곱 안팎만 맡으면 돼. 우리는 충분히 할 수 있어.”
긴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는 두 형제의 모습에 예유화는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그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더라도 두 사람이 듣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대신 예유화는 관리감독 하듯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는 서조운과 선우방을 바라봤다.
“내기할까?”
“좋지.”
“진 사람이 하루 종일 하인이 되는 거야.”
“남아일언?”
“중천금이지.”
예유화가 한심하게 쳐다보는 걸 느끼지 못하는 모양인지 쌍둥이 형제는 시시덕거렸다.
벌써부터 다 이긴 것처럼 말이다.
그런 둘의 모습에 예유화의 표정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져 갔고, 멀리서 지켜보던 선우방과 서조운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공격해!”
잠시 후 포위망을 구축하고서 서서히 공간을 좁히던 쟁자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런데 움직임이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절대 혼자 싸우려 하지 않았다.
또한 덩치가 있는 이들이 가장 먼저 쇄도했다.
스으윽!
체격이 큰 만큼 상대적으로 속도가 둔할 수밖에 없었다.
그 약점을 쌍둥이 형제는 자연스럽게 이용했다.
이미 이 방법으로 재미를 보기도 했고.
다만 문제는 아까 전과 달리 일대일 승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응?”
그리고 처음부터 덩치 큰 아이가 노린 건 백휘경을 쓰러뜨리는 게 아니었다.
아이의 목적은 단 하나.
백휘경의 이동을 최대한 봉쇄하고 더 나아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덥석!
공격하는 척 접근한 아이가 백휘경의 허리를 감싸 안는 데는 실패했지만 대신 다리 한쪽을 붙잡았다.
원래 목적의 반 정도는 성공했던 것이다.
“나도 있다!”
거기에 함께 덮치던 다른 아이가 반대쪽 다리를 온몸으로 껴안았다.
기동력을 원천봉쇄한 것이었다.
그러자 백휘경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협공에 당황한 것이었다.
“큭!”
그리고 그건 동생인 백휘성도 마찬가지였다.
형과 달리 두 다리는 물론이고 두 팔이 붙들린 백휘성이 어떻게든 네 명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을 거칠게 흔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빠져나오는 데는 실패했다.
“덮쳐!”
“눕혀 버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움직임이 봉쇄당했다.
쟁자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자 짓누르자 순식간에 깔려 버렸다.
“으음!”
그나마 예유화는 상황이 두 사람보다 좀 더 나았다.
그러나 말 그대로 조금 더 상황이 나을 뿐이었다.
쫓기는 건 예유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쌍둥이 형제를 도와주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으득!
자신만만하던 것과 달리 순식간에 파묻혀서 제압당한 두 형제의 모습에 예유화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전형적인 자만의 말로를 두 사람이 보여 주어서였다.
열일곱 명을 상대하니 마니 했던 녀석들이 반절도 채 상대하지 못하고 제압당했기에 그만큼 예유화가 쓰러뜨려야 하는 숫자가 늘었다.
그렇다 보니 제아무리 예유화라도 시간이 갈수록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했네.”
몰리고 몰리다 끝내 억울함 가득한 얼굴로 패배를 시인하는 예유화를 지켜보던 서조운과 선우방이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와서였다.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못 올 곳에 온 건 아니잖아?”
“표사분들은?”
“다 뻗어 있지.”
“어후. 다들 죽어 있겠구만.”
선우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서른세 명의 상태가 어떠할지 짐작이 가서였다.
“저와 비슷하더라고요. 성격은 셋 다 다르지만.”
“재능만 믿고 날뛰던 시절은 누구나 있으니까.”
“그걸 형님께서 바로잡아 주셨지요.”
서조운이 쓴웃음을 지었다.
반호진의 말대로 그 역시 재능을 믿고 설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반호진의 눈높이 교육에 늦지 않게 제정신을 차렸다.
“천재가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는 법이거든. 세상을 구성하는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또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하셨죠.”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알아야 해. 자신의 재능을 썩혀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맹신해서는 안 되지.”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으니까요. 물론 그걸 느끼려면 지금 있는 세상에서 최고가 되어야 하지만요.”
서조운이 냉정한 눈으로 백휘경, 백휘성 형제를 바라봤다.
쌍둥이 형제의 재능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뛰어난 정도이지 비교 대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막말로 지금 같은 편을 이루었던 예유화만 하더라도 순수하게 재능만 따지면 두 형제보다 위였다.
“이제는 알겠지. 자신의 재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걸. 또 쟁자수 아이들도 알았겠지. 혼자서는 힘들지만 함께라면 더 높은 곳에 갈 수 있다는 걸 말이지.”
“다 형님께 배운 겁니다. 흐흐흐!”
“잘 배워서 동생들에게 가르치는 걸 보니 대견하구나.”
“이렇게 후대로 전수되는 거지요. 형님의 이름을 무림 역사에 새기겠습니다!”
“또 이상한 소리 하네. 내 이름 새길 생각하지 말고 네 이름을 새길 방법이나 생각해.”
꼭 막판에 이상한 곳으로 향하는 대화에 반호진은 고개를 한 차례 저으며 몸을 돌렸다.
쟁자수들의 상태도 확인했으니 다시 일급표사들에게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따로 지시할 거는 없어?”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양쪽에게 다 이득인 것 같고. 원래 체력단련과 기본기가 다 거기서 거기지.”
“그렇긴 하지.”
“이대로만 해 줘. 좀 더 굴려도 되고.”
“후후후.”
굴려도 된다는 말에 선우방이 씨익 웃었다.
안 그래도 슬슬 체력이 올라오는 기미였기에 강도를 올릴까 말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반호진도 같은 생각인 듯하자 선우방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확실하게 가르칠게요.”
“그래. 이따 저녁 먹을 때 보자.”
“옙!”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이들이었기에 반호진은 말했던 대로 진짜 구경하러 온 것이었다.
그래서 한 번 쓱 본 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
유호량은 긴장한 얼굴로 응접실의 문 앞에 섰다.
평소에는 반호진이 그를 찾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가 먼저 보자고 했기에 심호흡을 하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들어오시죠.”
“예.”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방 안에서 들려오는 반호진의 목소리에 유호량은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편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서 있는 반호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앉으시죠.”
“갑자기 뵙자고 청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하루 일과가 그렇게 빡빡하지는 않아서요. 제가 원체 바쁜 걸 싫어하기도 하고요.”
한눈에 봐도 긴장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반호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차를 따라 주었다.
동시에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
엄청 친해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간간이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 또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아니면 따로 할 말이 있는 건가?’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반호진은 유호량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폈다.
의외로 행동은 많은 걸 간접적으로 알려 주었기에 반호진은 그 부분에 집중했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유 소협은 본문의 유일한 빈객이시지 않습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명소졸에 불과한 저를 빈객으로 받아 주셔서요. 거기다 조언도 아낌없이 해 주시고.”
“유 소협께 도움이 꽤 된 모양이네요.”
“정말,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런 걸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반호진에게는 별거 아닐지 모르나 유호량에게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가치가 있었다.
때문에 유호량은 고민을 많이 했다.
이걸 아무 대가 없이 받아도 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받아도 됩니다. 저의 첫 번째 빈객이시지 않습니까. 만약 받은 게 크시다면 나중에 본문이 어려울 때 도와주시죠.”
“안 그래도 그걸 생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기약이 없지 않습니까.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문주님께서 받아 주신다면 문도가 되어서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흐음?”
반호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조금 놀란 것이었다.
애초에 반호진은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조언을 주는 것으로 후에 천하십대고수가 될 유호량과 좋은 인연을 맺으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문도로 들어오고 싶다고 하자 반호진은 눈을 반짝였다.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진심이십니까?”
하지만 반호진은 곧장 수락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한 번 더 물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유호량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것이었다.
겸사겸사 반호진도 유호량의 마음을 확인할 겸.
“그렇습니다만…….”
유호량의 목소리가 점차 흐릿해졌다.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유 소협께서 함께해 주신다면야 저야 든든하지요. 사실 이제 막 체계를 잡아 가는 중이라 정식 문도가 단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유 소협께는 일반 문도보다는 다른 걸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본문의 호법이 되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제가요?”
허락한다는 말에 점차 어두워졌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유호량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상도 못한 말에 당황한 것이었다.
“예. 유 소협은 호법 자리에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유호량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호법이라는 직위는 문도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무상문은 강호의 그저 그런 문파가 아니라 검신이라 불리는 반호진이 세운 곳이었다.
그런 대단한 문파의 호법은 그보다 더 명망 높은 이가 앉는 게 옳았다.
“지금은 부족하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달라질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
유호량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를 수가 없어서였다.
또한 궁금하기도 했다.
대체 자신의 무엇을 보고 반호진이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지가 말이다.
“참고로 이건 명령이 아닙니다. 부탁입니다.”
“……제가 어울리는 무인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예. 지금처럼 노력하신다면요. 그리고 제가 있지 않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저는 무림에 증명해 보였으니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주님.”
고민을 끝낸 유호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호진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반호진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었다.
그 모습에 반호진이 흡족하게 웃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주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정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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