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장. 모두 함께. -04
사형의 권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방현승의 모습에 방일석이 다시 한번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권위를 살리기를 바라며 말이다.
굳이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아도 방일석은 자신들이 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존심이라도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방현승은 그런 방일석의 마음도 모르고서 연신 웃기 바빴다.
“제가 실수한 게 있습니까, 방 사형?”
“아니. 너는 실수한 거 없어. 실수는 우리 사촌형이 하고 있지.”
“어허. 너는 깍듯하게 대해야지!”
사촌형이라는 호칭에 방현승이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혈육이라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무상문주와 청림표국주가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 소림사의 속가제자들이 모인 자리인 거 아닙니까? 그럼 저도 자격이 있지요.”
“흐음.”
방현승이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따지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일단 한 잔씩 받으시죠.”
“고마워.”
“별말씀을.”
슬쩍 도끼눈을 뜨고서 쳐다보는 방현승의 시선에도 방일석은 태연했다.
꿀릴 게 없었기에 기죽을 이유도 없었다.
“방현승 사형도 한 잔 받으시죠.”
“허허허. 고맙네.”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요. 서로 바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두 사람에 이어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른 반호진이 바로 용건에 대해서 물었다.
대략적으로 알고 있지만 확실하게 듣기 위해서였다.
“대사형께 얘기를 어느 정도 들은 것으로 알고 있네.”
“맞습니다.”
“나는 사제가 일급표사들과 쟁자수들을 훈련시켜 주길 바라네.”
언제 채신머리없는 모습을 보였냐는 듯이 방현승이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말했다.
적당히 편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해야 할 말을 명확하게 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보던 방일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급표사와 쟁자수들이라.”
“현재 직급은 일급표사지만 표두 자리를 앞두고 있는 표사들이네.”
“절정의 벽에 막혀 있는 이들이로군요.”
“정확하네.”
방현승의 눈동자에 의외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표국계에 대해서 꽤나 많이 알고 있어서였다.
그가 알기로는 주변 사람들 말고는 딱히 다른 곳에 무관심한 걸로 알고 있는데 표국 쪽에 제법 상세히 알고 있자 방현승은 살짝 놀랐다.
그리고 그건 방일석도 마찬가지인 듯 두 눈이 약간 커져 있었다.
“원하시는 건 절정의 벽을 넘는 겁니까?”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네. 고수의 조언으로 넘을 수 있었다면 벽을 넘지 못해 좌절한 이들이 없었겠지. 다만 나는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이고 싶은 걸세. 반 사제의 도움으로 절정에 닿을 수 있다면 정말 기쁠 테고.”
“이건 장담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보수도 책정하기 애매하고요.”
“보수는 걱정하지 말게. 절대 섭섭한 수준이 아니니. 우리도 염치가 없지는 않아. 다른 이도 아니고 소림검신이지 않나. 더욱이 대사형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자리인데. 막말로 사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 않나.”
“그렇긴 합니다.”
반호진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계약이 성사되지 않으면 앞에 앉아 있는 방현승은 아쉬울지 모르나 그는 아니었다.
더구나 소림사의 제자가 세운 표국은 청림표국만 있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읍소할 수밖에 없지.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말이야.”
“읍소까지야.”
시종일관 저자세를 유지하는 방현승의 모습에 반호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청림표국의 사정이 결코 나쁘지 않아서였다.
반호진이 거절한다고 해서 망하거나 휘청거릴 일은 절대 없었다.
“쟁자수들은 알겠지만 청림표국의 미래이네. 쟁자수 아이들이 삼급표사가 되고, 그중에는 대표두까지 올라가는 아이들이 있지.”
“조금 의문이 듭니다. 청림표국만의 독자적인 체계가 있을 텐데요.”
“물론 있네. 그런데 너무 오래된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 말일세. 새로운 방식이 더 낫다면 당연히 바꿔야 하지 않겠나.”
“일리는 있네요.”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바꾸는 게 맞았다.
그리고 반호진에게도 나쁘지 않은 게 오랫동안 개선되어서 전해져 내려온 청림표국만의 안정적인 훈련방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괜히 전문가가 있는 게 아니니.’
단순히 무공을 봐주고 조언하는 게 끝이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관리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했다.
또한 매번 반호진이 일일이 가르칠 수도 없는 만큼 정형화해서 문서화해야 다른 사람이 훈련 도중에 합류하더라도 혼선이 없었다.
“장담컨대 서로에게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정확히 따지자면 우리의 이득이 큰 게 사실이지만 대신 우리는 보수로 그 차이를 메우겠네.”
방현승은 현재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매달리는 쪽은 엄연히 그이기에 절대 반호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다.
사촌 동생인 방일석은 사형으로서의 권위가 너무 없다고 눈치를 주었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사형으로서의 권위를 세우면 모든 건 끝났다.
“사형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너무 그냥 지나가시는 것 같습니다.”
“결과 말인가?”
“역시 일부러 거론을 안 하셨군요?”
“그만큼 사제를 믿는다는 뜻일세.”
방현승이 빙긋 웃었다.
그는 소림사의 속가제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엄연히 청림표국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청림표국에 손해가 되는 일을 할 리 만무했다.
“믿음이 꼭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건 아닙니다.”
“맞네. 그렇지만 애초에 신뢰가 없다면 그 관계는 시작되기도 어렵지. 또한 나도 나 나름대로 예상치가 있고.”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면 계약은 단발성이겠군요.”
“당연한 것 아닌가.”
“마음에 드네요.”
허술한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철저한 방현승의 대답에 반호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제라고 해서 무작정 퍼 주는 걸 그는 원하지 않았다.
가족이 아닌 이상 관계라는 건 주고받는 게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야 무탈한 법이었다.
그렇기에 반호진은 방현승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도 안전장치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엄연히 거래인데.”
“맞습니다.”
“다만 솔직하게 말한다면 기대하는 게 조금 더 크다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제는 검신이라 불리는 무인이지 않은가. 천재가 범인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나 사제는 이미 이대제자들을 가르쳐 본 경험도 있고.”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만.”
“물론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지. 그러나 사제의 가르침은 단순히 성장의 유무로 따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정신적인 부분이나 마음가짐 같은 부분에서 분명 큰 영향을 끼쳤을 거야. 나는 그 부분도 감안하고 이 자리에 온 것이네.”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방일석이 해연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푼수 같은 사촌 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라서였다.
함께 지지고 볶은 세월이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되는데도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많이 알아보셨네요.”
“당연한 일이지 않나. 우리로서도 한두 푼이 들어가는 계약이 아닌데. 그리고 사제가 거절해도 괜찮네. 솔직히 사제 정도의 무인에게 개인 수련 시간이 얼마나 중요하겠나. 또 사문을 위해서도 절대 사제의 발목을 붙잡아서는 안 되고. 그러니 편하게 고민하고 말해 주면 되네. 부담 갖지 말고.”
“그리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허. 우리는 다 한 가족 아닌가.”
방현승이 훈훈한 웃음을 흘렸다.
이 자리에서 계약을 맺는다면 더없이 기쁘겠으나 어그러져도 크게 실망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애초에 가능성이 반반 정도라 생각하기도 했고, 검신이라 불리는 반호진과 이렇게 대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남는 장사였다.
같은 사문이라 할지라도 반호진은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좋습니다. 우선은 한 번만 해 보겠습니다. 다음 계약은 첫 계약이 마무리되면 다시 논의해 보죠.”
“고맙네!”
“그럼 조건에 대해서 깊게 얘기해 볼까요?”
한가하고 여유롭게 사는 게 목표이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여유로운 자금 사정이었다.
이제는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먹여 살려야 할 식구들이 있었기에 반호진은 무상문주로서 방현승과 계약 조건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
“다시 북적북적하네.”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 그동안 너무 일이 없었잖아.”
“눈치가 보이기는 했지.”
꽤나 많은 인원이 들어와 숙소를 배치하는 광경으로 보며 곽춘과 아이들이 소곤거렸다.
특히 아이들의 시선은 어른들이 아닌 또래에게 오래 향해 있었다.
그들보다 나이 많은 소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또래였다.
“맞아. 청소도 한두 번이지.”
“거기에 매일 계란이나 오리알 등등을 주셨으니까.”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모용세가, 사천당가가 떠나며 할 일이 확 줄었기에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해야 하는 일은 줄었는데 받아 가는 일당은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림표국의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반호진에게 훈련받기 위해 오자 다들 얼굴이 밝아졌다.
“오다가 엿들었는데 누나들도 기뻐하더라고. 우리랑 같은 생각이었던 거지.”
“우리야 집으로 가지만 누나들은 여기서 숙식을 같이하니까 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
“근데 쟁자수들의 인원이 꽤 많다. 저들이 다 예비 표사들이란 말이지.”
“나도 한때 표사를 꿈꿨었는데.”
아이들 중 한 명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죽을 때까지 점소이를 전전하거나 운이 좋으면 숙수가 되는 게 고아들의 미래였다.
그중에 정말 성공하면 자신만의 가게를 갖는 것이었고.
때문에 표사라는 직업은 말 그대로 꿈이었다.
“그럼 저기 표사분들에게 부탁해 봐. 안내하면서 들었는데 어른들은 다 일급표사라고 하더라고. 혹시 알아? 눈에 들면 제자가 될 수 있을지.”
“그래 봤자 일급표사의 제자가 될 뿐이지.”
넌지시 부추기는 친구를 향해 곽춘이 콧방귀를 끼었다.
청림표국은 여기 있는 아이들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중원에서 나름 규모가 큰 표국이었다.
말석이기는 하나 중원십대표국 중 한 곳이기도 했고.
하지만 무상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맞아. 애초에 비교할 급이 안 되지.”
“지금은 하인이지만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있어.”
“정식 문도가 될 가능성이 말이지!”
“더구나 인수인계할 동생들도 많지!”
곽춘과 한륭을 위시로 아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지금은 일개 하인이지만 앞으로도 그러라는 보장은 없었다.
더욱이 반호진에게서 직접 기초무공도 배우고 있기에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하인을 넘어 무상문의 정식 제자가 될 가능성이 말이다.
스윽.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봇짐을 메고 있던 쟁자수들이 이쪽을 힐끔거렸다.
묘하게 경계하는 눈빛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부러운 듯이 바라보는 쟁자수들도 있었다.
“손님들 앞에서 무슨 추태니?”
“부총관님!”
“문주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반듯한 모습을 보여야지. 우리가 하인, 하녀라지만 그래도 엄연히 무상문 소속이야. 그런데 이렇게 못난 모습을 보일 거야?”
언제 다가왔는지 황매향이 쌍심지를 켰다.
자기들 딴에는 작게 떠들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실상은 달랐다.
멀리서도 들릴 정도로 아이들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괜히 쟁자수들이 힐끔거린 게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다들 오늘 할 일에 대해서 완벽하게 숙지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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