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장. 모두 함께. -03
서조운이 얼굴을 찡그렸다.
알면서 이러는 거라면 괘씸해서였다.
“짜증내면 나만 소인배가 되니까.”
“교활한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아요.”
“그게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선을 교묘하게 넘나드는 것도 어떻게 보면 능력이야.”
“낯짝이 두꺼운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요.”
씁쓸한 얼굴로 서조운이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말이다.
반호진이 무상문을 운영하는 걸 가까이에서 보면서 서조운은 정말 많은 걸 보고, 느끼고 있었다.
“살아남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그보다 쉽지 않지?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는 게.”
“네. 죽을 맛이에요. 비슷하게 만드는 건 의미가 없어서 참고만 하고 새롭게 만들고 싶은데 생각한 대로 되지가 않아요.”
“무공을 만드는 게 쉬웠다면 너도 나도 일대종사가 되었겠지. 익히는 것과 가르치는 게 다른 것처럼 무공을 창안하는 것 또한 완전 달라. 웬만한 이해도와 지식 없이는 엄두도 낼 수 없으니까.”
“정말 그걸 요즘에 처절하게 느끼고 있어요. 계속 실패만 하고 있고요. 하면서도 이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단순히 무공을 익히는 것과 새로이 만드는 건 완전히 달랐다.
그 사실을 서조운은 요즘에 처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도.
무공을 만들면서 서조운은 겸손도 같이 배우고 있었다.
“처음부터 목표를 너무 높게 잡지 마.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걸음마도 못 떼었는데 뛰려고 하면 쓰나.”
“맞는 말씀이기는 한데, 욕심이 나서요.”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능력을 갖춘 다음에 욕심을 내도 늦지 않아. 그렇다고 시간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 유화와 휘경이, 휘성이가 기틀을 잡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리잖아.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기본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냐. 오히려 재능이 있을수록 더 기본기를 확실하게 다져야 해.”
“알고는 있는데 조급증이 사라지지 않아요.”
서조운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라고 반호진처럼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다만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니기에, 세 명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기에 서조운은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쯧쯧. 잡념이 많아서 그래.”
“그런 건가요?”
“때로는 비울 줄도 알아야 해. 비우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안 돼. 완벽한 무념무상을 이루어야 하지. 그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너도 알고 있고.”
“시간낭비이지 않을까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잖아. 때로는 돌아가는 게 더 빠르기도 해.”
반호진이 느릿하게 차를 들이켰다.
서조운의 심정은 알겠으나 때론 쉬었다가 가는 법도 필요했다.
무작정 달린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게 아니었다.
“으음!”
“네가 말했지? 바른 길로 가는지 확신이 안 든다고.”
“예. 그래서 형님을 찾아왔지요.”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자. 지금 네가 익히고 있는 축융신공이 완전무결한 무공일까?”
“…….”
서조운의 동공이 흔들렸다.
분명 축융신공은 개세절학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무공이었다.
양강기공 중에서는 단연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그러나 완전무결하냐고 묻는다면 서조운은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달마삼검 역시 완전무결하지 않아. 적어도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제가 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다만 자기 스스로를 객관화하지 못했을 뿐. 근데 이건 제대로 하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어. 불완전하기에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초조함을 좀 내려놓고 차근차근 하나씩 해 봐. 나도 그러는 중이니까.”
“참, 형님께서도 기본공을 만들고 계시죠?”
“지금은 없지만 나중에는 문도들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제자에게 가르칠 무공은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고.”
서조운이 눈을 반짝였다.
표현은 어느 정도라고 했지만 반호진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거의 완성된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서조운은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형님이세요. 벌써 완성하시다니.”
“다 만들어진 건 아니고, 얼추? 난 시작한 지 시간이 제법 흘렀잖아. 숭산에서부터 미리 준비하기도 했고.”
“저도 늦지 않게 완성해야 할 텐데.”
“넌 성질이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내공심법에 어울리는 무공들을 만들어야 하잖아. 나보다는 난이도가 높지. 만들어야 하는 종류도 많고.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해.”
“알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조언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서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도 있듯이 서조운은 반호진의 말대로 차분하게 하나씩 문제를 풀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막막한 건 여전했으나 그래도 그에게는 믿을 구석이 있었다.
“이론적으로 막히는 게 있으면 의성이한테 도움을 구해 봐.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무론을 보는 게 학사들이니까.”
“의성이도 무공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중인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서로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최소한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어?”
“그건 그렇죠. 참, 형님 혹시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찻잔을 든 채로 반호진이 반문했다.
너무 광범위한 질문에 무엇을 묻는지 알 수 없어서였다.
“출처는 모르겠는데 형님께 안 좋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고 합니다.”
“아아. 하오문과 엮어서?”
“알고 계셨습니까?”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하는 반호진의 모습에 서조운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은밀히 떠도는 소문이고 반호진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기에 아무래도 다들 말하기를 꺼려 해 알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있자 놀란 것이었다.
“왜 모를 거라 생각한 거야? 내 동생 중 한 명이 하오문의 소문주인데.”
“난 소저가 직접 알려 주었군요.”
“개방에서도 알려 주던데.”
“괜찮으세요?”
서조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사자 앞이라 내용을 순화해서 그렇지 실제로 떠도는 소문은 상당히 저급하고 적나라했다.
낭설을 넘어 소설을 쓰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였기에 서조운은 반호진의 표정을 살폈다.
“원래 잘난 사람은 많은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어. 너나 방이, 척이와 이륭이도 마찬가지고. 나하고 비교하면 조금 순할 뿐이지 크게 보면 비슷해.”
“그래도 너무 악의적이에요. 형님을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너무 분명합니다.”
“근데 그것뿐이야. 소문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물론 저도 그걸 알고 있습니다만, 너무 분해요. 지금의 평화를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게 바로 형님이신데! 철혈성주를 잡은 것도, 북해빙궁주를 잡은 것도 다 형님이시잖습니까!”
말하는 와중에 울분이 치솟았는지 서조운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점차 높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벌게졌다.
“흥분할 것 없다. 하오문과 금가장에서 소문의 출처를 알아보고 있으니까. 내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나서더구나. 근데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형님.”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겠다는 말은 아니다.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지. 그동안 내 할 일 하면서 말이야. 굳이 헛소문에 휘둘릴 이유는 없어.”
“역시!”
서조운은 감탄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응이어서였다.
만약 그였다면 분분히 날뛰었을 텐데 반호진은 전혀 달랐다.
지극히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최선의 선택을 했다.
“분풀이는 알아낸 다음에 해도 돼.”
“저도 거들겠습니다. 감히 형님에게 이딴 저질스러운 소문을 붙이다니요!”
“달리 말하면 아직 무상문이 만만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난 소저와 소장주님이 꼭 소문 낸 놈을 찾아냈으면 좋겠어요.”
“놈이 아닐 수도 있지.”
많이 가라앉기는 했으나 여전히 분기를 참지 못하는 서조운을 보며 반호진은 차를 따라 주었다.
냉수 마시듯 차를 단숨에 마셔 버렸기에 찻잔이 비어 있었다.
“년일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반호진은 난희주가 떠나기 전에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말해 줘야 마나 고민했으나 결국 반호진은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걸로 괜히 서조운을 심란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확실해지면 말해 줘도 늦지 않으니까.’
설사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반호진은 이번에 참전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서조운의 말마따나 천하사패의 야욕을 막은 것만으로도 제 몫은 다 했다고 생각해서였다.
중원무림에 인물이 그만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반호진은 지금처럼 적당히 일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평온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응접실에 들어 온 방일석은 앉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함께 온 방현승이 오두방정을 떠는 통에 정신이 사나워서였다.
“이제 곧 검신을 만나게 된단 말이지.”
“청림표국주님. 체통을 지키시지요.”
“체통은 무슨. 지금 소림검신을 만나는데!”
“검신은 맞지만 배분상으로는 사제입니다.”
“그래서 더 대단한 거지. 약관의 나이에 천하를 평정했다는 뜻이니까.”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 사촌형의 모습에 방일석은 이마를 짚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믿음직한 이가 방현승인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형님.”
“넌 사제를 만나 봤지만 난 초면이라고.”
“나이를 생각하세요.”
“허어. 절대고수를 만나는데 어찌 긴장을 하지 않겠느냐.”
“방장도 절대고수예요.”
누가 봐도 들뜬 기색의 방현승을 보며 방일석이 장탄식과 함께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제발 체통을 지켜 달라는 방일석의 부탁에도 방현승은 좀처럼 엉덩이를 가만히 두지 못했다.
“그렇긴 하지만 사제는 영웅이지 않더냐. 그것도 전쟁을 끝낸 영웅. 무림 역사상 사제의 나이에 전쟁을 끝낸 이는 없었다. 달마 조사와 장삼봉, 천마와 견줄 만한 무인이라는 뜻이지. 게다가 우리는 엄연히 부탁하는 입장이지 않더냐. 잘 보여서 나쁠 건 없지.”
“호진이는 사제입니다만.”
“그게 뭐? 그게 밥 먹여 줘? 사형 대접 받는다고 해서 재산이 늘어나냐?”
“…….”
적나라한 방현승의 말에 방일석의 입이 다물어졌다.
법무는 딱 자리만 만들어 주었다.
그 이상은 두 사람 하기 나름이었다.
저벅저벅.
그때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두 사람의 입이 다물어졌다.
끼이익.
규칙적인 발소리가 끊어진 것과 동시에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반호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방 사형.”
“하하하. 몇 년 만이지? 근데 나는 네 소식을 자주 들어서 그런지 얼마 전에 헤어진 것 같다, 야.”
“그렇습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청림표국주님.”
아는 사이인 방일석과 먼저 인사를 나눈 반호진이 방현승과 눈을 마주하며 정중하게 합장을 했다.
청림표국주이기 전에 사문의 사형이기에 그에 따른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말씀 편히 하시지요.”
“그럼 먼저 사형이라고 해 주셨으면 합니다. 표국주님이라는 호칭은 너무 딱딱하게 느껴져서요.”
찌릿!
방일석이 방현승을 노려봤다.
무릇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방현승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사형.”
“그럼 나도 지금부터 말을 편히 하겠네.”
“예. 앉으시죠.”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놓는 방현승의 모습에 반호진은 옅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황매향이 조심스럽게 작은 다과상을 가지고서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믿기지가 않네. 반 사제와 이렇게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이.”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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